출처가 없는 그 곳에서 펌.
몇 개 남았지만 더 이상 갱신하지 않습니다. 수행물의 내용은 귤밀 귤밀 그리고 또 귤밀.
1. 마주잡은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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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 않은 거리를 손만 잡고 걷는다. 나중에는 장갑이 불편한지 왼쪽 한 짝은 벗어버리고 맨손을 내민다. 따뜻해보이는 장갑을 끼고 있었는데도 손가락이 얼음장같았다. 그의 보폭만큼 그녀의 목도리가 한들거리고, 그녀의 걸음속도대로 그의 오른팔이 간간히 흔들거리고, 맞잡은 두 사람의 손이 상냥하게 얼어가도록, 길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있잖아, 난 되게 마음이 따뜻한 여자일거야.
그렇게 생각하지? 찬 손이 무안했는지 지민이 언 손등을 문지르며 물었다. 손의 온도와 마음의 온도의 관계에 대해 기율이 갖는 감상은 없었지만, 묻는 대로 고개를 끄덕이기로 한다. 그러자 지민이 눈을 이지러뜨리며 활짝 웃었다.
좋-아, 난 마음이 따뜻한 여자니까 캔커피를 사줄래.
캔커피?
네, 캔커피. 따뜻한 걸로……난 두유 마실까?
물주 좋으실 대로……아, 저기 편의점 있네.
지민의 손은 날씨에 상관없이 차가웠다. 마음이란 것의 온도를 어떻게 측정할 수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그녀의 손만은 기율의 체온으로 쉽게 미지근해지는 것이었기에, 다른 것은 문제되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2. 같은 모양의 반지
자수정일 것 같단 얘기를 했었던 것 같은데 반영되어있지 않은 풍경... 칠할 엄두는 안 나는 듯
3. 커플티
4. 교차하는 눈빛
ㅋ....ㅋㅋ...
써놓은 지저분한 고록이 있으니 넷북을 꺼내면 그 때 링크하기로…….
6. 100일
……이젠 진짜 봄이네.
하고 힐끗 기율을 봐도 그는 정말, 봄이네, 하고 온화해진 날씨에 감탄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매일매일의 달력을 기념일로 채우고 싶어 안달이 난 지민의 사정이나 D-Day를 꼬박꼬박 알려주는 핸드폰의 부가기능에 대해 아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날짜를 세어가며 만들어야 하는 기념일에 대한 의욕은 사실 지민에게도 생경하고 서툰 개념이었다. 이상하게도,
처음 만났을 땐 늦가을이었는데.
벌써 그렇게 됐나, 시간이 빠르게 가네. 지민이도 나도 한 살씩 먹었고.
그와 만나는 매일매일은, 굳이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특별한 날이 되곤 했던 것 같다.
기억나? 만났던 날?
그럼. 그 날은 기억해?
그 날?
크리스마스 이브.
그러니까, 굳이 지나온 날을 세어나가지 않아도.
기억하고 있구나, 착해요.
에이, 그런 걸로 칭찬해주는 거야?
네, 칭찬. 그리고……잠깐만.
……? 뭐 사려고?
짠, 상입니다.
상? 나 주는거야?
응응. 율이 거.
그래서 지민은 그 자리에서 머리핀을 사다가 그의 앞머리에 찔러넣은 것이다.
7. 첫경험
바다 특유의 소금기가 피곤했는지, 지민은 절여진 배춧잎처럼 축 늘어져있었다. 그녀가 금방 잠들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기율은 달리 말을 붙이지 않기로 한다. 그러자 눈을 몇 번인가 끔뻑거리던 지민이 입을 열었다.
율아.
응?
또 올 수 있을까?
바다에?
응, 바다에.
방금 것은 바다에? 가 중요한 질문이 아니었다. 그것을 두 사람 모두가 잘 알고 있었지만,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서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사실 중요한 것은 바다에? 도 또? 도 너랑 같이? 도 아니다.
……글쎄, 다시 오고 싶어?
기율은 몸을 기울여 지민을 본다. 손을 뻗어 뺨 위를 덮자, 얼굴 위로 손바닥만한 그늘이 졌다가 손 안으로 사라진다. 지민은 꼭 가려졌던 달빛만큼 한 줄기 미소짓고는, 뺨 위의 손을 감싸쥐었다. 하얗고 차갑고, 조금 축축한 손이었다.
글쎄, 지금은 그냥,
……그냥?
지민의 목소리는 잠에 젖어있었지만, 감겨오는 손가락은 차갑게 식어있었지만,
이 여름이, 조금 더 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적어도, 무엇이 더 중요한지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다시 안 와도 될 만큼?
응. 다시 안 와도 괜찮을 만큼.
그것만이 중요한 일이었다.
8. 처음으로 드는 실망감
"말도 안 돼. 헤어졌다구?"
지해가 입을 떡 벌렸다.
"응."
대답하면서, 지민은 들고 있던 소주잔을 한 숨에 비웠다. 달고 끈적거리는 액체가 목 안을 긁으면서 넘어갔다. 지해는 그런 그녀를 신기하단 듯이 보다가 빈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술시중에 고마워하기도 전에 번거로운 질문이 돌아왔다.
"왜?"
그러니까, 번거로운 질문.
"왜 헤어졌는뎅? 얘기해죠."
글쎄 왜였을까.
대답하지 않자 지해는 저 혼자 이것저것 떠들기 시작했다. 군대는 다녀왔다 그랬잖아? 군대는 아니고, 설마 손버릇인가? 나빠? 나쁜 거 알았으면 더 일찍 헤어졌을테고. 아님 너무 바빠? 거의 맨날 보는 것 같더니 아니야? 아님 밀이가 바빠서? 그건 아닐텐데. 그게 아니면……. 지해의 수선을 잠시 무시한 채, 지민은 침대에 등을 기댔다. 희미한 취기 덕분에, 헤어진 남자친구의 키나 얼굴이나 학벌 같은 것에 대해 운운하고 있는 지해의 목소리는 조금 멀리에서 들린다.
왜?
지민 안의 이유는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사소한 불안에 불과했다. 그것에 먹혀든 지민이 어리석을 정도로 작은 불안이었다. 그것을 입 밖에 내버리지 않았다면 지금 지해가 저렇게 기율의 가상 프로필을ㅡ어떤 부분은, 지민보다 더 자세히 기억하는 것 같다ㅡ읊으며 요란을 떨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었다면 또 다른 이야기를 주제로 요란을 떨고 있었겠지.
기율이 얼마나 좋은 남자친구였는지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지해가 떠들지 않더라도 잘 알고 있다. 그 좋은 남자친구에게 결별을 선언한 것은 지민이었고, 이별을 견디는 데 익숙한 것은 지민의 몇 안 되는 자랑거리였다. 크고 작은 이별들에 상처입으면서 지민의 속은 갈수록 견고해졌고, 갈수록 마실 수 있는 술이 늘었고, 갈수록 외로워졌지만, 연애에 열중하던 순간순간 지민이 시달렸던 크고 작은 긴장과 두근거림과, 불안에서만큼은 잠시 해방될 수 있었다.
그래서 지민은 이별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 이유가, 사소하고 멍청한 것일 뿐이었다.
"게이다."
팡, 하고 지해가 박수를 쳤다.
"게이인거지? 게이였던거지?"
"아니야."
본 적도 없는 사람에게 실례는 충분히 저지른 것 같다. 그의 비교적 일반적인 연애관을 지켜주면서, 지민은 그럼? 하는 표정으로 보고 있는 지해를 보았다. 왠지 한숨이 나와서, 지민은 내려놓았던 잔을 들어 입 안에 털어넣었다.
"내가 차였어."
기율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이유를 말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두 사람은 1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케이크를 사서 나누어먹고, 촛불을 끄고, 장난처럼 교제를 약속했던 그 때처럼 입맞춤을 나누고 돌아갔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되고 말았다.
이별을 말한 것은 지민이었지만, 이유를 묻지 않은 것은 기율이었다.
그 순간의 기율은 분명 평소의 미소와는 조금 다른 표정을 지었지만, 그 얼굴 뒤의 것을 읽을 수 있을만큼 눈이 좋지는 못했다. 지민이 그와 보낸 1년이 기율이 그녀와 보낸 1년과 같은 무게가 아니라면, 어차피 두 사람은 헤어져야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 날이 조금 빨리 온 것 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민은 입 안에 물고 있던 이유를 말하지 못했다. 그러자 그렇게 소중하고 무거웠던 불안과 두근거림이, 긴장과 피로들이, 하잘것없이 가볍고 무의미한 것처럼 느껴졌다.
"엉?"
"차였다니까."
"진짜? 거짓말이지?"
"정말이야."
그러니까 그 말은 절반쯤 진짜였다.
"말도 안 돼! 왜?"
"글쎄……,"
그런 와중에도 지해는 술잔을 채우는 데 열심이었다. 하지만 술을 따르는 척,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잠시 조용해진 지해의 정수리에서 시선을 떼고, 지민은 그녀의 발끝을 내려다봤다. 한 해와 네 계절이 지나가는 사이, 엄지발톱에 꾹꾹 채워 발랐던 연두색의 페디큐어가 절반쯤 밀려있었다. 내일은 이걸 덧발라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지민은 느릿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덕분에 목소리가 갈라지지는 않았다. ……나는 별로 좋은 여자친구가 아니었거든.
지해가 술병을 내려놓고 지민을 꾹 끌어안았다. 체온이 높고 축축한 손이 멋대로 지민의 머리를 끌어다 가슴 위에 짓누른다. 괜찮아 괜찮아, 밀이는 이제 더 좋은 남자 만날거야. 그치? 지민은 매번 더 좋은 남자라는 단어의 정의를 알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지해의 서툰 위로는 언제나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언제나, 도움이 되었다.
지민은 지해의 어깨 너머로 그녀의 방을 본다. 낯선 가구들과 익숙한 가구들이 뒤섞인 방은 원래부터 2인실이었던 것처럼 눈 앞에 들어차있었다. 가희가 가져온 입식 의자와 지민이 쓰는 좌상, 그리고 익숙한 현관을 차례로 눈에 담는다. 알려줬던 비밀번호 대신 매번 성실히도 도어벨을 두 번 누르는 남자가 그 너머에 서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지민은 눈을 감았다. 지해의 작은 손이 연신 어깨를 토닥이고 있어서, 취한 척 잠들 수도 없었다.
벨소리가 들릴 일은 없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기대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9. 밤새 하는 통화
핸드폰을 뺨에서 조금 멀리 하고, 둘은 조금 더 이야기를 했다. 오빠 노트북, 바탕화면에 이상한 논문이 잔뜩 있더라. 취발이가 어쩌고 말뚝이가 어쩌고……. 이거 봉산탈춤이지? 그런 거 같네. 과제하는 거 아닐까. 그렇지? 아침에 일어나면 노트북부터 반환해야지. 반환. 그리고? 음, 그리고, 전기장판 사고 싶다. 전기장판? 아직도 많이 추워? 아니. 지금은 좀 덜 추운 거 같아, 핸드폰 뜨거워져서……. 생각했던 그대로의 답변이라 기율은 웃었다. 다행이네. 졸리지는 않고?
……조금. 아까보다 한 꺼풀 더 졸음이 묻은 목소리가 말한다. 율이도 졸리겠다, 이제 잘까? 나른해진 목소리에 덩달아, 기율의 목소리에도 달아났던 졸음이 스며든다. 자야지, 내일도 수업 있잖아. 응, 내일도 수업 가야지……. 율아. 응?
[지금 뭐 입고 있어?]
……응?
10. 두근거림
이런 건 어때?
어떤 거?
내가 보건실의 양호교사고 율이는 나를 마음 속으로 짝사랑하고 있는 고딩.
…….
아니면 네가 우리 학교에 실습하러 나온 교생이고 내가 율이를 마음 속으로 짝사랑하고 있는 고딩.
왜 다 마음 속으로 짝사랑인데?
보통은 왜 하필 고등학생이냐고 묻는 거 아니야?
그런가. 왜 하필 고등학생인데?
그냥 고등학생.
…….
그리고, 짝사랑이 좀 더 야한 느낌이잖아?
그렇군요. 덜 야했던 거야?
이럴 수가, 짝사랑이 아니었단 말인가요?
이럴 수가, 짝사랑이었나요?
…….
11. 봄(春)
지민은 지하철을 좋아했지만 여름에 한정해서 그리 즐기지 못했다. 지하철이나 버스 같은 대중교통이나 은행, 동사무소 같은 기관엔 그런 규칙이라도 있는지 하나같이 북극으로 변해버리는 탓이다. 보통 이럴 때 옆에 붙어서 체온을 나눠줘야 할 절친은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바람처럼 한국을 떠났고, 한동안 장마 때문에 밖에 나가지도 못하다가 이제 겨우 해가 났을 뿐인데, 이 열차는 누가 지하철 아니랄까 뼈가 시리도록 에어컨을 틀고 있는 것이다. 아니, 요점은
"추워."
춥다는 거다.
"……냉방이 좀 심하긴 하네."
눈 앞에 서 있던 남자친구에게 불만사항을 토로하자, 미소가 돌아왔다. 사실 자리에 얌전히 앉아서는 연두색 셔츠밖에 보이지 않을만큼의 장신이지만, 지민이 턱을 들고 기율이 허리를 숙인 덕분에 눈을 마주치는 데는 무리가 없다. 왜 웃냐고 묻지 않은 것은 그 보기좋은 미소가 그의 습관적인 표정이란 것을 알고 있어서지만, 역시 어리광을 받아주려는 것 같아보인다. 지민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 마저 투덜거릴 생각이었는데, 저도 모르게 살짝 미소짓고 만다.
"좀이 아닌걸."
보통 이런 대화를 하는 건 지해와였다. 그럼 지해는 어리광부리지 마, 밀이! 세상은 원래 이렇게 춥고 매서운거야! 하면서 어깨나 손을 슥슥 문질러주곤 했다. 지민은 불과 두 달 전에 막 성년의 날을 보낸 참이었지만, 스무 살이라면 대한민국의 막내 어른답게 아직 이 세상에 대고 어리광을 부릴 여지는 남아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리고 나면 금방 따뜻해질거야."
보통은 밖에 나가면 더워질거라고 하지 않나 싶지만, 지민에 한해서는 맞는 말이다.
"봄에 눈 녹듯?"
"봄에 눈 녹듯."
"……뭔가 이상한 표현인데."
"네가 먼저 썼잖아."
기율을 따라 조용조용하게 웃다가 말고, 지민은 가방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다. 도로롱. 한창 더울 시간이라고들 하는 두 시를 조금 넘겼다. 도로롱. 몇 시야? 2시 2분. 아, 나 그 시간 좋아해. 좋아해? 2시 2분을? 2가 2개잖아. 보통 2시 22분을 더 좋아하던데, 2가 더 많잖아. ……글쎄, 적어도 20분 뒤엔 이미 도착한 뒤일걸? H역.
"그러게, 얼마나 왔지?"
그러고보니 어디로 가는 길인지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덜컹덜컹.
좋아하는 지하철이 좋아하는 리듬으로 흔들리고, 한 손으로 손잡이ㅡ정확히는 손잡이들이 매달린 바ㅡ를 잡고 있던 기율도 흔들린다. 그리고 별로 좋아하지 않는 멜로디와 함께 안내방송이 답한다. 다음 역은 시청, 시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소요산, 청량리 방면으로 가실 분들은 이번 역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주시기 바랍니다. 다음 역은…….
"시청이네."
"응, 시청."
시청이나 덕수궁에 볼일이 있는지 아니면 1호선으로 갈아탈 생각인진 모르겠지만, 옆에서 한참 음악을 듣고 있던 여자가 MP3을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일어선다. 자연스레 옆자리에 핸드백을 내려놓으며 손짓하자, 기율이 큰 키를 구겨 자리에 앉는다. 여느 지하철 안에 나란히 앉은 커플들처럼 해볼까 하다가, 기율의 어깨는 기대기 조금 높으니까 대신 오른손을 끌어다 잡아본다. 겨우 그 뿐인데, 얼어있던 왼쪽 팔에 묘하게 온기가 어린다.
어디선가 봄바람 냄새가 났다.
12. 서로에게 맞댄 이마
100404
13. 자전거 데이트
바이시클... 100416
14. 권태
귤은 겨울과일이다. 길거리의 행상에 귤바구니가 보이기 시작한 걸 보면 다시 겨울이 온 모양이었다. 지민은 고개를 돌려, 나란히 걷고 있던 남자친구를 잠시 올려다본다. 그의 온화한 얼굴 위로 크리스마스 풍의 화려한 불빛들이 울긋불긋하게 비쳐보였다. We wish you a merry christmas, we wish you a merry christmas……. 거리에는 온통 캐롤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굳이 귤이 아니어도 겨울이 온 것은 알 수 있다. 내일이 벌써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We wish you a merry christmas, and a happy new year.
두 사람은 이브부터 사귀었으니까, 내일이면 1주년이 되는 셈이다.
"……."
기율을 만난 지 벌써 1년이나 되었다는 사실은 잘 와닿지 않는다. 1년이 너무 길었던 걸까, 5년 즈음은 된 것 같기도 하고, 또 너무 짧았던 것도 같아서, 겨우 며칠 전에 번호를 교환한 것처럼도 느껴진다. 지민은 잠깐, 어느 쪽이 더 그럴 듯한 착각인지 고민하느라 걸음을 멈췄다. 꼭 1주년만은 아닌 것 같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율아."
"응."
헤어지게 될 날이 올거란 건 어느 날엔가 깨달았었다. 언제였을까, 그건.
"내일이 벌써 이브네."
"그렇지?"
버스 정류장에서 입을 맞췄던 어느 가을이었을까,
파도 위를 떠다니던 어느 여름이었을까, 그가 보고 싶어 핸드폰을 열었던 어느 봄이었을까,
사실 '어느' 같은 관사를 붙일 필요는 없다. 그와는 꼭 1년동안 딱 한 번의 계절을 보냈으니까, 어느 순간일지라도 단 한 번밖에 없었을 그 봄이고, 그 여름이고, 그 가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다시 겨울이 돌아왔다.
어쩌면 함께 제과점에 들어가 케이크를 고르던 첫 날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민은 그런 것들에 대해서 무언가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기율이 느슨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벌써 1년이네. 케이크라도 하나 살까?"
크리스마스 케이크가 되겠지만……. 하면서, 거리의 불빛들을 둘러본다. 지민은 그런 기율을 1년 전에도 본 기억이 있었다. 그 많은 거리의 빛들 사이에서 제과점을 찾아내면, 손을 잡고 그 안으로 들어가 자신에게 케이크를 고르게 해줄 것이다. 어쩌면 카운터의 점원도 1년 전과 같은 인사를 건넬지도 모른다. 연인이신가봐요, 잘 어울리시네요. 오붓한 크리스마스 이브 되시길 바랄게요……하고. 그 때, 지민은 기율에게 돌아보며 물었었다. 연인일까? 어떻게 생각해요? 하고.
올해에는 같은 질문을 할 순 없을 것이다. 1년 전에 기율이 그 질문에 웃었으니까.
"저기 보이네, 베이커리."
"……지금 사게?"
"생각난 김에. 아니면 내일 살까?"
지민은 잠시 상처받는다. 내일 그와의 1주년을 축하하며 함께 케이크의 촛불을 끌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 이 순간 이별을 말하기엔 기율이 너무 빛나게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지민의 마음 한 켠을 시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의 이 온유하고 빛나는 연애도 분명히 끝맺을 날이 올테고, 그 끝은 결혼이 아니고서야 이별일 것이다.
"……기율아."
"응?"
언젠가 이 사람과 헤어져야 한다면, 차라리 오늘이 좋았다. 꼭 채운 1년인 것이.
단 하루도 빠짐없이 사랑스러웠던 365일인 것이.
"무슨 일이야? 지민아."
"……."
금새 눈빛을 바꾸며 안색을 살펴주는 모습은, 처음 만났을 때나 지금이나 상냥하기 그지없다. 기율이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 이별을 말하면 그가 조금은 슬퍼해줄지, 지민은 알고 싶었다. 그러니까…….
"결혼할래?"
"ㅡ응?"
아. 잘못 말했다.
15. 발각
검은 선이 세 줄 들어간 고무 슬리퍼, 높지 않은 굽의 하얀 리본 샌들, 아무런 장식도 없는 롱 부츠, 데님 재질로 된 로우탑 스니커즈와 한 번쯤 신어본 흔적도 없는 에나멜 펌프스, 마지막으로 기율이 방금 벗어놓은 하얀 운동화까지, 모든 신발들이 신발장과 현관 사이의 있어야할 자리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그런데 방 안에 지민만이 없었다.
음, 2분 전만 해도 분명히 창문 너머로 기율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는데.
A. 침대는 깨끗하다.
B. 지민의 방은 탁 트인 원룸이니까, 다른 방에 있을 가능성은 없다.
C. 그 사이 새 신발을 산걸까 생각해본다. 하지만 그녀가 새 신발ㅡ까만 에나멜로 된, 코가 둥그런 구두ㅡ을 구입했다가 굽이 너무 높다면서 다시 스니커즈로 돌아간 것이 불과 이틀 전의 일이었다.
D. 설마 창 밖으로 뛰어내린 건……기각.
"지민아?"
기각이라면서도 침대 위에 올라가 창 너머로 고개를 내밀어본다. 날아가진 않았을 테니 뛰어내렸다면 길에 떨어졌겠지 생각했던 것 같은데, 길 위에 널브러진 것은 지나가던 꼬마가 버리고 간 음료수캔 하나 뿐이었다. 설마 싶어서 하늘로 시선을 돌린다. 날아가는 여자친구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아니, 진작에 기각했던 안 같은데…….
E. 욕실?
"지민아, 있어?"
노크를 해봤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린 것이 무색하게, 욕실 문이 삐걱거리며 열리다가 쿵, 하고 욕조에 부딪힌다. 대형세탁기로 비좁아진 욕실에 무리해서 욕조까지 들여놓은 탓에 미는 문이 활짝 열리질 않았던 것이다. F안으로 쓸만한 다른 답이 떠오르지 않아서, 기율은 토콰즈색의 욕조에 잠시 걸터앉는다.
"택배 왔어요, 배 지민 씨."
없는 택배 얘기도 해 보고.
"아이스크림 사왔는데, 녹기 전에 먹어야지."
정말로 사 온 간식 얘기도 해 보고.
"메이데이, 메이데이, 긴급상황. 여자친구 나와라, 오버."
호출에도 반응없음.
아, F안.
"못-찾겠다, 꾀-꼬리."
숨바꼭질을 끝내는 주문을 외우고 다섯을 센다. 순전히 욕실 문 뒤의 숨죽인 인기척을 느낀 탓이었다. 다섯, 넷, 셋……둘. 지민의 팔이 불쑥 눈 앞에 나타나 술래의 목을 바짝 끌어안는다. 나 들켜버렸네. 응, 들켜버렸네. 참고 있었던 모양의 웃음을 허물없이 터뜨리며, 지민은 즐겁게 깔깔거렸다. 다행히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이었다.
걱정했잖아. 에이, 안 날아가요. ……. ……설마, 정말 날아갔을까봐 걱정한 거야? 하하, 아이스크림 녹을까봐 걱정한 거지. 아, 아이스크림. 뭐 사왔어? 메로나? ……아니, 오늘은 투게던데? 투게더? 정말? 나 아무데도 안 갈게.
16. 백허그
17. 무릎베개
18. 기다림
거리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화려한 불빛으로 가득찬 채,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번잡하게 흘러가고 있다. 유독 얼음같은 밤공기가 뺨 위를 누르고 지나간다. 기율은 잠시 움직이지 못하고 걸음을 멈춰서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무심한 거리에 지금의 기분이 멋대로 씻겨내려갈 것 같았다.
지금의 기분.
밤이 차가운 것이 아니라 뺨이 더운 것이었다. 뒤늦게 자신도 그 위에서 함께 들떠있었던 것을 깨닫는다. 길게 숨을 내뱉자, 가슴에 남아있던 미열이 하얀 입김에 섞여 한 모금 빠져나갔다. 마냥 반짝이며 흘러가는 사람들과 불빛들 사이를 눈으로 헤매다가, 기율은 익숙한 실루엣을 찾아낸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지민아."
그녀만은 흐르지도 떠내려가지도 않고, 거리 위에 그저 서 있었다. 서서, 기율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냥 여자사람친구 말고, 정말 여자친구.
"멋있던데, 주 기율 씨."
그녀가 가늘게 눈을 휜다. 짧은 말과 미소만으로, 옅어지고 있던 무대 위의 여운을 아무렇지 않게 긍정받는다. 지민과 헤어졌던 것은 기율이 밴드에 베이시스트로 들어가기 전의 일이었기에, 그녀가 공연을 보러 온 것은 처음이었다.
"어때, 재미있었어?"
"응. 율이는 재미있었어? 신났어?"
지난 2월마다 거듭했던 것처럼 한 걸음 반 앞에 멈춰서려다가, 한 발 더 다가가 팔을 뻗는다. 지민은 조금 휘청거리며 기율을 받쳐안다가, 끌어안겼다가, 작은 기합소리와 함께 발꿈치가 공중에 들려버리고 말았다. 잠깐만, 하고 멈춰세우기도 전에 한 바퀴 타원을 그린다. ……알았어, 알았어. 신난 거군요. 네, 신났습니다. 다행이네요. 네? 바짝 매달린 어깨 너머로 하얗게 숨을 뱉으며, 그녀가 날아오를 듯이 웃었다. 미지근한 열기가 한 모금 섞인 웃음소리였다.
"계속 웃고 있길래, 좋아하고 있구나 생각했었어."
"……내가 그랬어?"
"응, 계속 보고 있었으니까 확실. 그렇지?"
사실, 두 사람이 이런 사이로 돌아간 지는 얼마 지나지 않았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되어버린 나리와 나리의 남편이나, 더 먼 사이가 되려고 하는 연과 연의 애인과는 달리, 어렸던 날의 두 사람과 꼭 닮은 거리의, 하지만 그 때와 온전히 같지는 않은 사이로. 하지만 그래서, 그게 언제부터냐는 나리의 질문은 대답하기 모호한 것이었다. 그것은 꽤 오래 전부터의 일이기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일이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그녀는 줄곧 그 자리에서, 움직인 일 없이 기율을 기다리고 있었다.
"응, 좋아해."
같은 온도의 웃음을 공중에 흘리며, 기율은 눈을 감았다.
19. 손끝이 닿다
지민은 다시 눈을 감는다. 기억나지 않던 노래의 제목을 떠올려보려고 했다. 멀리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양치질 중인 가희의 기척인 것 같았다. 물소리에 익숙해지자 이번에는 시계의 째깍거리는 소리가 귀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지민은 애써 물소리 쪽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자꾸 손끝이 시려오고 발목이 차가워지고, 그 노래를 알아듣고 반가웠던 기억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만이 끊임없이 끊임없이 지민의 고막을 긁었다.
째깍,
째깍,
"왜 이렇게 손이 차?"
손등에 스친 그의 손끝이 굉장히 차가워서, 저도 모르게 손을 잡아끌었다. 차가운 감촉의 손가락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녹이다가, 자신의 손끝이 녹고 있는 것을 깨닫기도 전에 손목을 잡혔다. 아이구, 네 손이 더 차가운데요? 상냥한 웃음과 함께, 기율은 지민이 했던 것처럼 그녀의 손가락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번갈아가며 녹여주었다.
째깍,
사실, 몇 초 정도, 헤어진 사이라는 걸 잊어버릴 뻔했다.
"아, 이 노래 아는 노랜데."
"……그래?"
지민은 평소처럼 떠들었다. 이번에 고3이 되는 선영이와 이제 고등학생이 된 지원이의 이름을 뒤바꿔 말했던 것 같지만 기율은 그녀의 실수를 못들은 척 하거나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기율이 무언가 빨간 성게나 OMR 카드나 떡볶이 같은 것을 운운했던 기억이 났지만 어느 게 그가 들어간 밴드 이름이고 밴드의 간식인지까지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
째깍, 째깍,
노래의 첫 소절도 기억나지 않는 것은, 애초부터 그런 것을 귀기울여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손 같은 것은 누구랑 잡고 있어도 닳지 않지만, 기율의 미소가 한결같이 따뜻한 것은, 그의 손이 예전처럼 상냥한 것은 조금 슬펐다. 연인이었던 시절과 그렇지 않게 된 오늘의 기율이 변함없는 것은, 한 번도 지민과 연인인 적이 없었다는 뜻일지도 몰랐으니까. 그래서 지민도 그 때와 다르지 않게 웃고 떠들고 식사를 했다.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저, 그저 어쩌면,
째깍,
연어의 식감이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였던 게 아닐까 생각할 뿐이다.
20. 일코가 해제되는 순간
21. 한눈을 팔다
22. 손등에 입맞춤
23. 약속
……지민아, 뭐해?
응? 아니……아무 것도.
등 뒤에는 하얀 턱시도를 입은 기율이 서 있었다. 어디 갔나 했잖아. 춥지 않아? 달빛을 등진 채 웃는 모습이 눈부시게 빛났다. 지민은 그의 다정한 눈을 마주하며, 그에게 질세라 환하게 미소짓는다. 불쑥 몸을 내맡기며 매달리자, 기율의 팔이 지민을 감싸안았다. 기분 좋아? 팔 안에서, 지민은 대답했다. 응. 기분 좋아. 날아갈 것 같아. 날아가버리면 안 되는데? 꽉 붙잡고 있어야겠네. 어디 안 날아갑니다, 못 날아요. 단순한 비유법입니다. 이 쪽도 마찬가진데요?
……나도 알지만,
그녀는 외로이 죽어 바다거품이 되었다.
지민은 그녀와는 달리 울었고 웃었고 그리워했기에, 눈 앞의 빛을 움켜쥐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그래도……꼭 잡아줘.
ㅡ그러니까, 이 이와 함께라면,
영영 지민이 그녀가 되는 미래는 오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그러기로 약속한거잖아? 오늘.
열렬한 믿음이 닿았을까, 기율이 당연하지 않냐고 되물었다.
응, 그랬지. 넌 이제 끝난 거에요. 나한테 꽉 잡혀사는 거에요. ……그거 그 의미의 잡는다였어?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기율이 웃음을 터뜨렸다. 바다 위에는 달과 배와 두 사람 뿐이었고, 두 사람 분의 미래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지민은 그 사실에 깊이 안도한다. 이만 들어갈까. 그럴까요, 잠깐만…….
24. 감기
아이구, 왜 설렁탕을 사왔는데 먹질 못하니...
난 먹을 건데?
귤인 그런 애드립을 쳐주는 남자잖아? 매번 반할 것 같긔...
그림은 사진참고.. ...ㅋㅋ:@...
25. 첫 키스의 온기
지하철 안에서 그를 처음 만났던 날, 지민은 얼핏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짐작했었다. 그가 비어있던 지민의 발치에 섰을 때 그에게 감탄했던 이유는 그의 훤칠한 키나 그 키 때문에 턱밖에 볼 수 없었던 얼굴 때문이 아니라, 그가 들고 있었던 것에 있었다. 그는 지민이 무릎 위에 펼쳐놓은 그 날의 신간과 똑같은 표지의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럼 이만……어디선가 또 만나요.'
'어디서 보려나요?'
'……글쎄요, 연이 닿으면 다시 보게 되지 않을까?'
'글쎄?'
지금 생각하면, 인간관계에 대한 지민의 예감은 대개 맞는 편이었던 것 같다.
"왜?"
기율이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 듯한 뻔뻔하고 사랑스러운 표정이었다.
"아니."
지민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처음부터 우리가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고 뜬금없는 고백을 하는 것보다야 이 쪽이 훨씬 나은 대답같다. 그러자 그가 그럼 됐고, 하며 웃고는 숙였던 허리를 편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감탄할만한 키이긴 하지만, 그 키 때문에라도 그가 몸을 숙여주지 않으면 역습을 돌려줄 타이밍은 오지 않을 것 같다.
'기왕이면 지금 닿는 쪽이 편하지 않을까? 연.'
그는 그 때도 그런 표정으로 핸드폰을 내밀었었다.
"봄이 오려나봐."
"……봄? 벌써?"
흘러내린 목도리를 천천히 고쳐매면서, 지민은 내일부터 조금 더 간단한 목도리를 매야겠다고 생각한다. 두꺼운 털실로 짠 것을 칭칭 감아두르는 게 물론 따뜻해서 좋지만, 지금은 왠지 조금 덥게 느껴진다.
"아직 좀 이른가, 봄?"
"뭐어, 곧 입춘이긴 하네."
그렇지? 꼭 봄이 온 것 같았는데.
26. 어깨에 걸쳐준 외투
이건 패러렐이니까 링크를...
27. 직접 만든 요리
지글지글지글.
잘게 썰린 햄과 야채들이 식욕을 돋구는 소리를 내며 들들 볶이고 있었다. 기름을 두른 프라이팬의 지글거리는 소리를 반주삼아 지민은 오래된 샹송을 흥얼거리고 있었는데, 차츰 소리가 커지고 가사가 붙더니, 어느샌가 영어판으로 가사를 바꾸어 부르고 있었다. Blue, blue, my love is blue. Blue is my world, now I'm without you…….
"엄마, 슬퍼요?"
옆에서 노래를 경청하고 있던 윤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지민의 노래가 뚝 그쳤다.
"애기는 왜 비오는 날에 부침개가 먹고 싶어지는지 알아?"
대답하기 귀찮은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는 것이 그녀의 육아방침이었다.
"……우린 부침개 안 먹잖아요? 가끔 나리 이모가 하는 거 아니면."
"그건 말이지, 저 지글지글하는 기름소리가 비 떨어지는 소리랑 비슷해서래."
"게다가 지금은 비도 안 오는데요."
"내일은 비 온대. 일기예보 봤어."
"그리고 지금 먹는 건 부침개가 아니라 햄야채볶음밥이잖아요."
"그렇네, 내일 비 오면 전화해서 이모랑 애기들이랑 놀러오라 그럴까? 이모가 부침개 해줄 것 같다."
"……."
팽팽하고 느긋한 대화 끝에 결국 윤이 네 뭐, 부침개……부침개 좋네요. 하고 대답하자 지민이 턱을 괴며 웃는다. 이 정도로 대화가 엉망진창이면, 나이 또래들보다 영특한 윤보다도 어떻게든 대화가 이어지게 만드는 지민 쪽이 대견하게 느껴진다. 노래를 다시 시작하는 대신 지민이 흥얼거리듯 말했다. 율아, 밥은 어젯 밤에 해놨어. 밥솥 열어봐.
"아, 응."
한 줄로 상황을 요약하자면, 오늘은 내가 짜파게티 요리사…….
메뉴는 짜파게티가 아니지만, 그녀가 대견하게 여기는 것은 오랜만에 부엌에 선 남편 쪽인 것이 틀림없었다. 밥솥에서 밥을 퍼다 프라이팬 위에 끼얹자, 치익-하는 소리와 함께 김이 올라온다. 납작한 나무주걱으로 밥을 으깨면서 볶고있던 재료들과 조금씩 섞어나간다.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지민이 입을 열었다. 애기야. 실은 아빠도 요리를 잘 해요.
"사귈 적에만 해도, 아빠네 집에서 자다가 깨서 배고프다고 징징거리면 아빠는 잠옷차림 그대로 일어나서 앞치마를 매줬지……."
글쎄, 지금이라고 사정이 달라진 건 아니다, 징징거리는 방법이 조금 덜 과격한 쪽으로 변했을 뿐. 지금도 지민이 침대에서 아, 율이가 한 밥 먹고 싶다. 하고 다 들리게 혼잣말을 하지 않았다면 기율이 손수 앞치마를 입었을 리는 없었다.
"아빠네 집이요?"
"처음부터 아빠랑 엄마가 한 집에서 산 건 아니거든요. 따로따로 자기 집에서 살다가 알게 된 사이니까……결혼하기 전엔 가끔 엄마가 아빠 집에서 자기도 하고 가끔 아빠가 엄마 집에서 자기도 하고 그랬지."
"어……그럼 자기 집에 안 가도 되는 거에요?"
"아마도? 다 큰 어른이잖아. 혼자 살았으니까 걱정시킬 사람도 없는걸. 그리고,"
"그리고요?"
"그리고, 밤에도 헤어지기 싫었으니까."
……지글지글, 지글지글지글.
잠시 주걱이 멈춘다. 별로 지민의 말이 감동적이었던 것은 아니고, 모처럼 아내가 아들과의 문답에 성심성의껏 앞뒤가 맞는 대답을 하고 있어서도 아니고, 마침 볶음밥이 완성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주걱질을 할 필요가 없었다. 메뉴는 한정되어있지만, 기술적인 점에 한해 나무랄 곳은 없는 일요일의 짜파게티……아니, 햄야채라이스의 요리사였다.
그러다가 이렇게 결혼해서 계-속 헤어지지 않기로 서로 약속을 한 거야. 지민은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말을 끝마쳤다. 등 뒤의 풍경을 볼 수 있는 초능력은 없지만, 지금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애기도 크면 알게 되겠지만, 누드 에이프런 차림은 남자가 해도 여자가 해도 지켜보기에……."
"ㅡ저기요, 바지는 입고 있었습니다만."
완성된 음식을 지민의 접시에 조금 덜어주면서 잘못된 기억을 정정해준다. 지민이 뻔뻔하게 그랬나? 하고 웃으며 수저를 든다. 잘게 썬 햄과 당근, 감자, 완두콩을 흰 밥과 함께 볶은 정도지만, 색감만은 알록달록해서 그럭저럭 먹을만한 음식처럼 보인다. 지민이 볶음밥을 숟가락 가득 입에 넣고 천천히 우물거린다. 온 가족ㅡ이라고 해봤자 남은 구성원은 둘 뿐이지만ㅡ이 지민의 입에서 시식평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숨을 삼켰다. 지민이 심각한 표정으로 수저를 내려놓았다.
"주 기율 씨."
"응. 별로야?"
"볶음밥에 반했습니다. 결혼해줘."
아?
심각한 표정은 온데간데 없고, 지민이 씩 웃었다. 몇 번째일지 모를 그녀의 청혼에 기율은 어김없이 눈을 휘었다.
몇 번을 들어도, 듣기 좋은 울림이란 데는 틀림이 없다.
"죄송합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이미 가정이 있는 몸이라……."
"어머, 정말?"
미안한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기율은 익살스레 왼손의 반지를 보여준다. 지민이 짐짓 실망한 표정을 연기하며 한 손으로 입을 가린다. 그녀가 일부러 입가에 가져간 그 왼손에도, 기율의 것과 같은 디자인의 반지가 반짝이고 있다.
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더 이상 헤어지지 않기로 약속했던 그 날에, 기율이 손수 끼워준 것이다.
"누구 남편인진 몰라도, 아내 분은 참 좋으시겠네요."
"그러게요. 누구 남편인지 몰라도."
몸을 숙여 그 아내 분께 입을 맞추고 떨어지는데, 지켜보고 있던 아들이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저…….
"응?"
"그래서 누드 에이프런이 무슨 차림인데요?"
"……."
지민이 다시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When, we, met…….
"How the bright, sun, shone……."
"알았어요. 나중에 사전 찾아보면 되잖아요."
28. 장난
"멀리 나갔어?"
"응. 사람 없는 데까지."
"좋았겠다. 썬크림 없는 데까지?"
"썬크림 없는 데까지."
그래서, 파라솔 아래로 돌아와서 썬크림을 발라줄 땐 다시 화기애애해졌다. 사실 미안해야 할 건 갑자기 배가 아프고 기분이 다운된 이 쪽이 아닐까 싶은데, 사과도 받고 아이스크림도 받아먹고 해서 지민은 배가 불렀다. 아픈 것도 잊고 기분좋게 25분 놀아주고 다시 보내줘야지 생각하는데 뺨이 번들거리도록 썬크림을 발라줬더니 기분 좋아진 게 티났나 어리광을 받아주기로 한건가, 사람좋게 웃으면서 같이 모래장난이나 하잔 거다. 그래서 지금 보내드리는 이 대화는,
"좋았겠다……."
모랫 속에 귤……아니 남자친구를 생매장하면서 나누고 있는 단란한 대화.
열중해버려서 그만 향 피우고 묵념이라도 해줘야할 것 같은 모래무덤이 완성됐지만, 결혼도 안 한 남자 때문에 과부가 되는 건 취향 밖의 일이다. 그래서 그냥 마음을 다잡고 마저 샌드 아트를 시전, 지금 막 인어 꼬리의 지느러미를 완성했다. 기율은 아랫쪽의 사정을 볼 수 없겠지만 너그러운 성격이니 나중에라도 이 정도 장난은 이해해줄 것 같다.
"있잖아, 사진 찍어도 돼?"
"나를?"
"응. 율이 사진을."
찰칵찰칵, 그러자 인어공주가 웃으며 농담을 했다. 포크로 머리라도 빗어줄까?
29. 결혼?
네 감사합니다. 'ㅅ'-3
30. 온통 핑크
주 기율 씨.
응?
내가요 생각을 해봤거든요.
무슨 생각?
그러니까아,
그러니까,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그렇군요.
완전평화, 불행한 일 없음, 인 거에요.
좋게 들리는데?
짱 좋아요. 행복해요.
이야, 짱 좋았어요?
네. 그치만,
음?
좋은 일밖에 없어서 그냥 행복한 그런 게 아니에요. ……뭐라 그러지?
……?
음. 그러니까, 슬픈 일이나, 귀찮은 문제 같은 게 생겨도 그냥, 다 버틸 수 있을 것 같은……그런?
…….
……간지러, 왜?
31. 보고싶다...
아.
유독 피곤한 날이었다. 지민은 하루를 욕조에서 마감하기 위해 옷을 벗다가, 웬지 모를 위화감을 느끼고 거울 앞에 섰다. 눈과 귀는 한 쌍에 코와 입은 하나씩, 그 이목구비로 굉장히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가 그 안에서 지민을 바라보고 있다. 앙상한 어깨는 늘 그랬듯이 볼품없었지만, 평소와 크게 달라진 것은 없는 것 같았다. 지민은 거울 안의 여자를 한참 뜯어보다가, 그녀가 거울 앞의 칫솔 한 쌍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나는 지민이 어릴 때부터 써온 취향의 연두색이었고, 나머지 하나는……혼자 사는 집에서 뭐하러 칫솔을 두 개씩 꽃아 놓은거지? 지민은 이유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당황했다. 하지만 주인모를 칫솔은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었다. 오래 전부터, 아주 당연한 것처럼, 그 자리에 줄곧 꽃혀있었다. 지민은 눈을 가늘게 뜨고 칫솔을 내려다본다. 세월에 조금 바래있었지만, 무슨 색인지는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노을과, 오렌지와, 가로등 특유의 시린 불빛을 떠올리게 하는 색.
……그리고, 그것들과 동시에 떠오르는 사람.
지민은 칫솔의 주인을 기억해낸다.
위화감을 느낀 것은 거울 속의 여자였을텐데, 지민은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도 아무 표정도 없는 그녀를 보고 조금 놀랐다. 결코 무덤덤한 기억을 떠올린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민은 울고 싶었다. 떠올린 기억이 아팠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자는 아무런 감흥이 없어보였다. 얼핏 웃고있는 것도 같았다. 항의하듯이 노려보아도, 여자는 아무 말 없이 지민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눈가가 얼핏 젖어드는 것도 같았는데, ……그 뒤로는 여자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지민이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기 때문이다. 욕실의 얼음장같은 타일에 등을 기대자, 숨이 막힐 듯한 오한이 스며들었다.
ㅡ기율과는,
오늘같이 피곤한 겨울밤에 헤어졌었다.
32. 사소한 말다툼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역시 공주는 율이 같은데, 난 기사님.
하하, 양보의 미덕을 좀 발휘해봐. 너라니까요? 그리고 저는 기사가 아니라 왕자거든요.
어차피 왕족이면 공주여도 되잖아. 싸우자 공주.
글쎄 왕자라니까. 부부싸움이 하고 싶어?
부부싸움은 아니고, 프린세스 자리를 걸고 결투.
아하, 종목은 뭔가요 공주님?
음. 뭐가 좋을까…….
별 따와. 못 따오면 나의 승리. 이런, 페어 플레이 정신은 어디에 팔아버리셨나요. 음, 그치만 네가 따오면 난 귤 따올텐데. 바다 한복판에서 어떻게 귤을? 네가 별 따오면 그 때 생각해보지 뭐. 아마 그 전에 제주도에 도착할지도 모르잖아. 아하. 아니면 베개싸움할까? 베개도 하나밖에 없는데 무슨 베개싸움을. 아-아. 우리 너무 가난한 것 같아. 무슨 집에 베개가 하나밖에 없어? 2인용 원앙금침이니까 그렇지. 몰라. 다음엔 꼭 베개를 다섯 개쯤 사줄 수 있는 남자랑 결혼해야지. 다음에? 다음에 언제? 다음 주에 네가 베개 사주면 그 때 너랑. 아하. ……아, 아니다. 검약하는 주부가 될래. 결혼식은 한 번이면 됐고, 베개가 여러 개 있으면 네 배 깔고 못 자잖아. 그러게요.
33. 질투
"우와."
탄성은 아이 대신 그 아빠의 입에서 나왔다.
"왜?"
"방금 우리 아들, 굉장히 귀여운 표정."
귀여운 표정? 나도 구경하려는 마음에 뒤돌아봤을 때, 이미 아이는 말끔한 표정으로 수저통을 열고 세 사람 몫의 숟가락을 꺼내고 있었다. 귀엽지 않은 건 아니지만 언제든지 보고 있는 표정을 두고 방금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지나간 거지? 안타깝네요, 딱 엄마를 빼앗긴 어린애의 표정이었는데. 윽, 내 애기는 왜 나한텐 그런 거 안 보여주지? 나도 엿본 거라. 쑥스러운 거 아닐까? 쑥스럼이라니, 누구한테 물려받은거지? 난 아닐텐데. 나도 아닌데요. ……음, 도련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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