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나에 대해 고찰해보자면, 굳이 내가 인정하지 않더라도 별로 믿음직한 타입은 아니다.
그럴만한 그릇도 아니거니와, 권욕도 물욕도 없다. 그런 것에 따르는 책임감이라는 것은, 갖기에 성가신 점이 많은 것이다. 애시당초 그렇게 성실한 성격이 아니고, 몇 번인가는 변덕이 일어서 동아리의 부장이라든가 갈 곳 없는 여고생을 맡는다든가 하는 일도 했던 적은 있지만, 그런 정도다. 학비를 내야하니까 일을 한다든지, 학점이 필요하니까 과제를 한다든지, 졸업을 해야하니까 공부를 해야한다든가, 그런 것들에 쓸려다니다보니 별 일도 없이 서른을 넘기고 있었다.
"엄마."
지금 와서 생각하기에도 이런 내게 아이가 있다는 건 놀랍다.
엉? 하고 얼뜨기처럼 굴고 있자니, 제 엄마와는 달리 똑똑한 아이는 분명한 표정으로 '저녁 해야되니까 세 시간 지나면 알려달라면서요, 세 시간 지났으니까.' 하고 말했다. 그랬었지. 책에 열중하고 있었던 건지는 생각에 열중하고 있었던 건지는 벌써부터 기억나지 않지만, 시간이 흐르는 걸 잊고 있었다는 것 정도는 알겠다. 읽던 책에 책갈피를 끼워넣고 침대에서 일어나려는데, 아이는 아직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칭찬을 기다리는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하지만, 팔을 뻗어서 품까지 끌어올린다. 나날이 무거워지고 있었지만, 아직은 어떻게 들어올릴 수 있었다. 작은 머리에 꾹 턱을 눌렀다.
"애기 덕에 살았네."
"没关系."
왜 한어로, 그것도 나무랄 데 없는 성조를 사용해가며 대답하고 있는 건진 사실 잘 모르겠다. 물론 간단한 중국어를 가르쳐본 건 그걸 할 줄 아는 나였지만, 별로 좋은 교사는 아니었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으니까.
뭐 상관없지. 마음껏 내 애기 우리 애기 하고 부르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그 남자의 아이다. 뭘 해내도 이상할 건 없다. 임신을 한 채 전 세계를 떠돌고 있었던 만큼 뱃속에서 멋대로 주워들은 지식이 많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면 내가 다른 일을 하는 동안 중국 드라마 같은 걸 혼자 보고 있었을지도. 그런데 우리 집에 TV가 있었나?
"애기야."
"?"
"그런데 뭐 하려고 타이머 부탁했던거지?"
정말로 기억이 안 난다. 물어봤더니 조금 한심해하는 표정이 돌아온다. 그리고 그걸 숨기려는 아이의 표정을 보자마자 다음 스케쥴이 저녁식사의 준비였다는 걸 기억해냈다. 그런 것이 아니면 사실 내가 시간에 촉박할 일은 별로 없다. 정기적으로 일감을 주는 곳은 있지만, 출근이 아니라 계약을 하는 나는 비정규직에 가까우니까. 식사를 준비하는 쪽이 내겐 훨씬 정규직의 업무라는 느낌. 그 남자도 자취력이 길었던지라 못 맡길 정도는 아니지만, 보통은 내가 하는 것으로 정해져있다.
"무슨 책이었어요?"
채 썬 감자를 들들 볶고 있는데 질문이 돌아왔다. 아이가 나한테 무언가 물어보는 일은 오랜만이어서 감동했다. 지난 크리스마스에 어린이용 국어사전을 선물받았더니 그 이후로는 제 손으로 답을 찾아보는 쪽이 더 좋은 모양이었다.
"뭐가?"
"아까 읽던 책이요. 재미있으니까 밥 시간도 잊어버리는 거 아니에요?"
"그렇네."
무슨 책이었더라, 하고 머리가 생각하기 전에 나는 책 제목을 일러주고 있었다. 10년쯤 전에 출간된 인기도서라는 말은 붙이지 않았지만 그 책에 관련해서만큼은 재미있는 사연이 있어서 그것을 대신 소개해봤다. 발매일에 나와 그 남자는 같은 전동차의 같은 칸에 탄 채 그 책을 읽고 있었던 거다. 발견해버린 오역에 꿍해있던 참에 마침 그가 그 페이지를 읽고 있어서 말을 걸 수 있었다. 그 때 연락처를 주고받은 인연으로 지금은 결혼까지 했다. 그 책이 없었다면 그 남자를 못 만났을테니 아들은 없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출생비화라고 하면 비화인 것이었는데, 아이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재미있는 책인가보네요. 나중에 빌려주실거죠?"
저 애가 겨우 네 살이라니, 귀염성이 없는 부분만은 날 닮았기 때문일까 싶어 미안해진다.
왜냐고 물어도, 그 남자는 정말 정말 귀엽기 그지없으니까.
"역시 애기는 재미없네."
"네?"
"반응이 재미없어. 그 책이 없었으면 애기는 못 태어났다고?"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나는 책임지는 것이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 알고 있다. 그 남자 정도가 아니었다면 결혼도 안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쩌다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결혼을 하게 됐다고 해도 아이까지는 무리였겠지. 가족을 만드는 건 책임이 따르는 일이고 그게 부모의 역할이라고 하면 식사당번보다 수백 배는 더 막중하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왠지 자연스럽게 피임을 그만뒀다. 임신한 것을 알았을 때 그 남자의 반응도 굉장히 따뜻해서, 난 기쁘게 엄마가 되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잘 태어났잖아요?"
"……그렇네."
그것도 밀월여행 중이었다. 여행기간이 긴 탓이지만 진정한 허니문 베이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겁을 줘봤지만 먹히지 않는다. 이쯤 되면, 엄마의 위엄은 둘째고 너무 업신여기지나 말았으면 좋겠단 기분이 든다.
"그리고, 같은 책을 읽고 있었더라도 엄마가 아빠한테 말을 안 걸었으면 똑같은 거잖아요."
"음, 그렇지."
"말을 걸었더라도, 엄마랑 아빠가 좋아하게 된 게 아니면 결혼을 안 했을테구요."
"그렇겠지."
"결혼을 했더라도, 아이가 싫었으면 난 못 태어나는 거죠."
마지막은 아마 나리 양의 케이스를 생각한 것 같다.
"……으음."
딩-동, 딩-동.
머릿 속에서 종이 울렸다. 그 소리가 우리 집의 초인종 소리라는 게 생각났을 땐 이미 아이가 사라진 뒤였다.
이미 아빠를 맞으러 현관으로 나간 것 같았다. 굳이 누가 나가지 않아도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르면 들어올 수 있지만 그 남자는 굳이 초인종을 누르는 걸 좋아하고, 나도 그 남자가 문 앞에 서서 나를 기다리는 것을 좋아하니까 그런 것은 익스큐즈다. 그리고 지금처럼 내 손이 바쁠 때는 아이가 대신 해주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감자볶음에 통깨를 조금 뿌려 마무리하고, 다녀왔어 아들.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하고 나한테 해야할 대사가 들려오는 쪽을 돌아봤다.
"다녀왔어, 지민아."
"새 반찬은 감자볶음인데."
"좋은데?"
내게 책임감을 주는 남자가 눈부시게 웃는다. 새삼 반하는 건 우습지만, 끌어안고 싶구나 히메. 그리고 그렇게 하자 이야, 오빠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 하고 즐거워하는 목소리가 뺨에 닿았다. 눈을 잠깐 감고 바깥의 공기를 맡는다.
여전히 나는 권욕도 물욕도 없지만, 이런 것에는 욕심이 있다. 거기에 책임이란 게 따라야하는 일도 있는데 해보실건가요 하고 물으면 어쨌든 기꺼이, 하고 대답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 귀찮음을 무릅쓰고 그 남자가 가라앉았던 바다에 뛰어들 수 있었던 것처럼, 왠지 그냥 할 수 있게 되어버린 것이다. 왠지 모르게 무적이 되고, 왠지 모르게 어른이 된다. 물론 그 책임은 아이의 몸무게만큼 나날이 무거워지고 있지만, 거기에는 나날이 즐거워지는 부분도 따르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내 쪽도 '좋은데?'에 가깝다. 결국은 다 그 책 덕분인걸까 아닌걸까. 같은 건 모르겠지만, 만약 그 책이 없었다면,
글쎄,
만날 수 없었다면 슬플 거라고는 생각한다.
하지만 이미 만나버린 뒤에 생각해봤자, 만약의 케이스 같은 건 없다. 나는 그 날 그 책을 샀고, 이 남자에게 말을 걸었고, 좋아하게 되어서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 그걸로 이미 그 책에 의미를 두는 건 즐거운 일인 것이고, 아이도 이야기를 듣는 동안 몇 번이나 감동받은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 그것으로 참 다행입니다, 하면 된다. 우와, 하고 놀라주는 대신 이런저런 말을 끌어오는 게 지나치게 똑똑해서 귀엽지 못할 뿐이다. 아니, 그런 점이 귀여운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책은 좀 심오한 사상이 가미된 연애소설이다. 내용을 이해하는 건 무리일테니, 좀 더 자라면 빌려주기로 하자.
"우와."
탄성은 아이 대신 그 아빠의 입에서 나왔다.
"왜?"
"방금 우리 아들, 굉장히 귀여운 표정."
귀여운 표정? 나도 구경하려는 마음에 뒤돌아봤을 때, 이미 아이는 말끔한 표정으로 수저통을 열고 세 사람 몫의 숟가락을 꺼내고 있었다. 귀엽지 않은 건 아니지만 언제든지 보고 있는 표정을 두고 방금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지나간 거지? 안타깝네요, 딱 엄마를 빼앗긴 어린애의 표정이었는데. 윽, 내 애기는 왜 나한텐 그런 거 안 보여주지? 나도 엿본 거라. 쑥스러운 거 아닐까? 쑥스럼이라니, 누구한테 물려받은거지? 난 아닐텐데. 나도 아닌데요. ……음, 도련님일까?
한일번역을 하는 애니까 살짝 그런 느낌을 목표로 했는데... 목표는 이루지 못해서 목표인 것인듯ㅋ...
캐릭터에 따라서 1인칭 문체가 죄다 다를 구석구석을 생각하고 있으려고 하면 역시 3인칭이 짱인 것이지 싶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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