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컥, 하고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이진은 아주 멀리서 들었다고 생각했다. 두꺼운 전공서적을 심심하면 취미처럼 들여다보는 해진에 비해, 자신은 결코 독서를 즐겨하는 편이 못 되었지만ㅡ대신 한 번 책을 들면 제법 몰입해서 읽게 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이진은 침실의 침대 위에 기대앉아 독서 중이었고, 침실과 맞붙어있는 욕실 문이 열렸지만 고개를 들지 못할 뻔 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진은 반 박자 늦게 고개를 들었다. 다습하고 따뜻한공기가 금방이라도 이진에게까지 스며나올 듯 했다.
"……선배."
잘 씻었냐는 둥 하는 터무니없는 인사를 할 마음은 없었지만, 이진은 조금 의아해져서ㅡ막 문 앞의 미니러그를 적시며 나온 해진에게 한 마디 던졌다.
"응?"
돌아오는 대답은 태연했지만, 아니 태연하다 못해 뭔가 꿍꿍이가 있는 마냥 웃고 있었지만, 입고 있는 옷은 분명히 욕실 찬장 어딘가에 쑤셔박혀 있어 한 번도 입지 않았을지도 모를, 가운이긴 가운인데 의사가운이나 실험실용의 그 하얀 가운도 아니고 이브닝 가운. 미묘하게 광택이 흐르는 얇고 부드러운 재질의 것이다. 이진이 그 모양을 보자마자 당면한 문제는 실크의 세탁법을 이론으로밖에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지만 그의 것을 그가 입은 걸 갖고 뭐라고 할 수 있는 노릇은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망연히 그 모양을 보았다. 평소 같으면 수건이라도 한 장 더 뒤집어쓰고 나올텐데 어째 머리가 푹 젖은 채여서 물방울이 가끔씩 바닥이나 어깨 위로 떨어진다. 무심결에 그 모양에 시선을 준 채, 이진은 한참 빠져있던 책을 완전히 손에 놓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뭐 어떤가 싶은 기분이 들었다.
"가운 어울리네,"
"칭찬이야?"
"일단 칭찬."
"고마워."
해진의 눈매가 다소 은밀하게 휘었다는 기분을 지우지 못한 채, 아니 실은 그 이유 때문에 이진은 무릎께의 전공서적을 조용히 덮었다. 페이지 수를 확인한다던가 책갈피를 지르지는 못했지만, 그거야 그러려면 책으로 시선을 내려야하기 때문이라는 성가신 이유가 있다. 믿는 신은 없지만 신께 맹세코, 이진은 그저 책을 덮어 치워버리지 않으면 그가 무릎 위로 올라올 수 없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자명종을 조금 밀치고 묵직한 책이 테이블에 조용한 소음을 내며 내려앉자, 해진이 짧게 소리내어 웃었다.
"방해한 거 아냐?"
"응, 방해했지."
이진은, 덤덤한 눈으로 웃어보이며, 가볍게 팔을 벌렸다. 내일 지질학 시험인데.
"ㅡ와."
해진은 요염한 종류의 웃음을 흘리며 그 품으로 미끄러졌다.
거의 비슷한 찰나에 해진은 끌어안기고, 혹은 끌어안고, 비스듬히 매여있던 매듭이 풀리고, 몸을 감싸던 가운이 절반을 넘게 흘러내린다. 쿡쿡, 이진은 드러난 목께에 콧잔등을 기댔다. 샴푸냄새 난다, 그런 감상을 밝히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다. ㅡ그렇겠지, 대꾸는 흥얼거리듯이 돌아온다.
이진은 목께에 입술을 댔다. 혀끝으로 긁듯이 핥자 가늘게 움찔거리며 해진은 소리내 웃는다. 해진의 손가락이 버클 위를 더듬어오기에, 이진은 눈을 감는가 싶었더니 가운 밑으로 등허리를 쓴다. 쿡쿡, 가볍게 퉁기듯이 몸을 휘면서, 해진은 몸 위를 눌러오려는 무게를 한껏 즐겼다.
ㅡ뭐야,
"그렇게 하고 싶었어?"
몸 아래에서, 해진은 다소 도도한 종류의 곡선을 만들며 눈을 휘었다. 뭐어, 조심스럽게 더 아래로 손을뻗으면서, 이진은 품 안에 감겨오는 촉감을 제법 즐겨본다. 부드럽고, 아 실크였나? 실크는 중성 세제를 풀어넣은 물 속에서 흔들어서, 아, 온도도 맞추고. 얼룩이 있으면 직접 세제액을 묻혀서 두드리듯이. 물에 두 번 헹구고, 유연제를 묻혀 가볍게 짜서 마무리하고, 저온 다림질. 저온 다림질을 잊으면 그대로 옷 버리는거지. 뭐어 뭐, 계속 말해. 아, 뭐어, 이진은 성실하게 말을 이었다. …그랬다치지 뭐. 대답이 뭐 그래? 응, 목소리 야하다. 저런, 해진은 웃었다. 목소리만?
"설마."
이진은 밀어처럼 속삭였다. 제발 귀찮으니까 폴리 100%에 실켓 가공, 뭐 그런 거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