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터리가 꺼져가던 핸드폰에 울려온 전화를 받고 몇 마디 하기도 전에 연구실을 뛰쳐나간 이진이었다.그 걸음은평소보다 보폭이 크고 속도도 붙어있었지만, 결코난폭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마도 동요했을 것이었다. 혹은 긴장했거나, 당황했거나, 놀랐거나. 그 나름대로는 다급했던 참이다. 탁, 탁, 바닥을 거의 때리듯이 운동화 밑창이 닳는 소리가 조금 컸던 것도 같다. 중간에 그는 아는 얼굴을 몇 만나고 꾸벅, 인사하기도 한다. 하지만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선배."
한숨처럼 숨을 길게 몰아뱉으며, 이진은 경영학부 근처의 벤치 하나에서 멈춰섰다. 불렀지만 해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자의 머리만이 고개를 들어 자신을 보고, 곁의 해진을 흔든다.
"해진아, 불러달란 애 왔어ㅡ해진아?"
그녀는 미희라고 했던가, 아니, 분명히 미희다. 아마도 해진과 같은학부의 4학년이라고 했던. 이진은 사실 그녀를 썩 좋아하진 않았다. 적당히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라던가 예쁜 얼굴이라던가 립스틱의 색깔이라던가, 선이가늘고 아담한몸매라던가, 해진이 가끔씩 몸에 묻히고 오는 그녀의 썩 괜찮은 향수냄새도 해진의 취향에 맞는 것일 테니까.그것을 알았기에, 밉다는 생각도 싫다는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그 어깨에 기대있는 해진은, 싫었다.
"…선배,"
이름도 무엇도 알고 있었지만, 서로 통성명을 한 사이도 못되었기에 이진은 조금 호칭에 대해 고민해야 했다. 호흡이 조금 거친 것을 빼고도,지금흘러나온 소리엔 뭔가 억누르는 듯한 감이 있다. 말 끝은 조금 무례한 것도 같지만 조심스럽게 짧다.
"이 뒤에,이 선배강의 더 있나,"
미희는 난감한 듯이 웃었다.아직도 해진과 동거중이라는 후배는 조금 어정쩡하게 벤치 앞에 서서는, 자신을,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옆에서힘겹게 눈만 겨우 뜨고있는 환자ㅡ해진을덤덤하게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금방이라도 인상을 확 구기면서 해진에게 주먹을 휘둘러도 이상하지 않을 표정이었다. 동시에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를 끌어안아도 놀라지 않았을 표정이다. 말 그대로 이상한 표정.
"…해진이 시간표야 해진이가 알겠지."
대답하면서, 미희는 이진의 눈에 띄는 인상을 훑었다. 몇 번 스치듯 봤을 때에 매번눈에 들어왔던 훤칠한 체격이나 잘생긴 편의 이목구비보다도, 다급하게 온 듯 흰 실험가운을ㅡ뭘전공하던 애인지는 들은 기억이 없다ㅡ벗지도 못한 채면서 그런 침착한 표정인 것이, 한참 뭔가 하던 중인 듯 두어번 소매를 접어 걷어붙인 채였다던가, 실험가운 아래로 길게 뻗은 진즈와조금 낡은 운동화가. 그리고 지금은 낙엽이 다 떨어지기도 전에 첫눈이 내린 11월이라는것이, 미희의 눈에도 조금 인상깊었다.
"…그렇네."
선배, ……. 선배, 일어나야지. 이진은 발치의 인형이나 베개나 잠든 애완동물 같은 것을 툭툭 치듯이 선배, 하고불렀다.셋을 셀 때까지도 응답이 없자, 조심스럽게허리를 숙였다. 미희의 어깨와, 거기에체중을싣고 있던 해진의머리를, 가르듯이 손으로 감싸떼어내버린다. 미희의 어깨를 조금 밀어내는 손은 조금 조심스러웠지만, 머리를 떼어내는 쪽은 조금 매정한 느낌이 있었다.
"정해진,"
친한 선후배 사이가 아니었나 생각하자니, 이진은 가만히 해진의 이마에 손을 짚고 있었다.
"나 봐."
손이 떨어지며 시선을 맞춘다. 해진의 시야는 이진에 가려있을 테다. 눈을 느리게 깜빡이는 모양을 보았다. 강의 더 있어?해진은 간신히 그 소리 즈음부터 들렸는지, 고개를 끄덕인 듯 싶었다. 중요한 거야? 또 끄덕인 모양이었다. 빠져. 목소리에 날이 서 있다고, 미희는 근거없이 생각했다. 해진은 거의 잡아 끌리듯이 허공으로 몸을 일으켰다 싶더니 이진의 등에 완전히 업혔다. 묘한 모양이었다.
"그럼 이만, 실례."
이진은 다시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캠퍼스를 빠져나간다. 그 걸음은평소보다 보폭이 크고 속도도 붙어있었지만, 결코난폭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마도 동요했을 것이었다. 혹은 긴장했거나, 당황했거나, 놀랐거나. 그 나름대로는 다급했던 참이다. 탁, 탁,바닥을 거의때리듯이 운동화 밑창이 닳는 소리가 조금 컸던 것도 같다. 중간에 그는 아는 얼굴을 몇 만났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걸음을 멈추지도 않았다.
사실 이진은 스스로의 걸음걸이가 어떤지 따위는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등 뒤의 해진이 목을 끌어안으며 그제야 눈을 감은 것도 신경쓰이지 않았다. 닿아오는 몸은 평소의 배는 뜨거운 것 같다, 지만,그것도 실은 신경쓰고 싶지 않다. 뒤늦게 가운을 입고 나와버린 것을 깨달았다. 모처럼과 동기들과 재밌어보이는 걸 들여다보던 중이었는데, 하지만후회해봤자 이미 빠져나온 것이었다. 어차피 그 곳에 있어봤자 집중하지 못했을 것이다.
ㅡ왜또 아프고 그래.
아마 제정신이 아닐 그에게 이진은 작게 불만을 토했다.
누구와 이야기하든, 안든, 누구를 취향에 두든, 몸을 섞든,누굴 그 품에 기대게 해주든, 또 누구 앞에서 자신에게 하는 마냥 웃어보이든,그런 건 신경쓸 마음도 없었고, 있던 일말의 것마저 접었다. 접은 줄 알았고, 없는 줄 알았고, 사실 신경쓰고 있는 줄 마저도 스스로 모를 일이었는데도. 그런데도, 기분이 나쁘다. 기분이 나빴다. 이진은 한숨에 불쾌함을 담지 않으려고 애썼다.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마.
이진이 내뱉는 한숨에, 그런 말은실려있지도 담겨있지도 같이 흘러나오지도않았다.
내게 기대/ㅋ 언제나 네 곁에 서 있을게/ㅋ 그만두자 이런 구차한 짓/ㅋㅋㅋㅋ
쓰고 싶은 게 있었는데 뭔가 미묘하게 되어버려서 때려치자고 결정했어/수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