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히,
"음,"
나,이사할까봐, 그런 비슷한 말이 귀에 들려왔기에, 이진은껍질을 벗기고 있던 볶은땅콩에서시선을떼어내 그 음원에게로돌렸다. 상당히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다. 낯설었지만 처음 보는 표정은 아니었다. 어디로? 되물은말이덤덤했던것은,그것이설마해진 혼자만의 이사라고는생각지도못했기때문이다.
"…나야 어디든 상관은없지만,이 아파트좋아하지 않았나,"
돌이켜생각해보면참멍청한 꼴이다,
"…그러니까,"
…조금도눈치채지못하다니.
"이사는 나 혼자서."
해진의 표정은, 언제나의뻔뻔하게 정색한ㅡ한 대 쳐주고 싶도록, 사랑하는ㅡ모양이 못 되었다.미소짓고 있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미간이 조금 구겨져있고,아니 일그러져있고, 아니 반듯하게 펴져있고.그 눈은 평소와는 달리, 안정이 없고 가늘게 떨렸다. 어찌되었든 이진에게는생경한 표정이다.
"뭐?"
하지만, 그 눈이 전하는뜻은 한없이 생경함에도 불구하고, 분명했다. 그제야 농담이아니라는것을알고,되물어서 돌아올 대답 따위는 한 조각도없다는 것도 알고,알았어, 라고대답했다.
언제 처음 만났더라. 라고되짚어보는 작업이 무색하도록 선명하게 처음 그가 찾아왔을때의 열 여섯을 기억한다. 그 때의 초여름에서부터 지금까지의, 이진은 빠르게 머릿 속으로 헤아렸다.
…11년.
누가 뭐래도, 상당히오랜세월이다.알았어,란한마디로끝내기는 쉽지않다. 하지만,달리어떤대답을할수있었을까.
정해진이라는,Destined 같은 형용사를 떠올리게 하는이름으로 그 자신을 소개했었던,아버지의 제자는, 이진의 길고 지루하고 자극적이었던 과외교사는, 그러니까 선배는,그 때부터 지금까지 조금도변하지않았다.ㅡ아, 실례가 될 것 같으니 덧붙이겠다, 몸은 조금 자랐겠지 싶다.
"미안."
그는 조금도 미안하지 않다는 표정으로, 그런 말을 하고, 웃을 수 있을만큼 뻔뻔하다. 꼭 질린 물건을 골라아나바다 시장 같은 곳에내놓으려는 투로 담담하게 들렸지만, 이진의기분 탓일 것이었다.그런 그를, 그렇게 할 수 있으면서도 조금도 잔인하지 못한그를,이진은 한 때 어렴풋이 질투했던 것도 같고, 동경하기 시작했다가,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가, 또 싫어한다고 믿었다가, 다시 좋아하고 있음을 알았었다. 사실은, 지금도 무척 좋아하고 있다. 앞으로도 좋아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뭐가."
쭉, 자신과 만나기 전부터, 이미 이진의 눈에 해진은 완전체였다. 이진이 없더라도 그는 잘 할 것이다. 하지만, 그에 비해 그에 의해 자라고 물들고 변하고, 그럼에도 아직도 완전하지 못한 이진은,
"……."
아, 무어라 입술이 달싹이려다 다물어지는모양을 보다가, 하마터면잊을뻔했다.
이진은, 아마, 잘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그러니까, 아나바다 시장 같은 곳에 내놓게 된질린 물건처럼, 비교적 점잖은 방법으로 버려진 것이다.조금 괴로워져서, 다시 땅콩이 그득히 들어있는보울로 시선을 내렸다. 우득, 껍질이 부서지는 소리 말고는 아무 말소리도 더 오고가지 않는다. 이진은 스스로가 이 침묵에 슬퍼하고 있는 것인지 어떤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다만 조금 추웠다고 기억한다.
한번은, 선배가없이는안돼,라고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었다.대개 부탁이란 것은 명령조와 흡사하게 해진이 이진에게 하는 편이었기에, 이진이진심으로부탁하는일은드물었다. 하지만 그 드물기 그지없는자신의 희망에한해서만큼은,지금껏 해진이 들어주지 않은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었다. 그가들어주지않을리없었다. 지금까지의 해진이라면.
진심으로 말한 것 치고는 처음 받는 거절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생경하다는 기분이 없었다. 놀라지도 못했다.
해진은 애초부터 해진의 것이었지만, 이진에겐 해진 이외의 누구도 없었다. 자기 자신을 소유하는 방법도 자기 자신에게 소유당하는 방법도, 달리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법조차알지 못했다. 그렇다고 소유당하지도 의지하지도 못한 채 살 수 있을 만큼 강하지도 못했다. 그러니까.
11년,요약하자면 그 짧은 단어가 되는, 길었던 시간동안, 해진의 것이었던 이진이다.
이미 홀로 남겨진 이진을 줍고, 몸으로나마 사랑하고, 입술로나마 아끼고, 선후배를 넘어 가족처럼, 연인을 넘어부부처럼 함께였다. 그런데, ㅡ그런데. 두사람사이에생기는혐오감,내지는권태감같은것을, 어떻게 한쪽은느끼는데다른한쪽은느끼지않을수있을까.해진은과연언제부터'이사'라는 걸생각하고 있던걸까. 그리고 아마 이 집을 먼저나가는 건 이진이 될것이다.
"…더 말하지마."
이미 더 말하지 않고 있는 해진에게, 이진은 말했다. 그래도 지금 손질하고 있는 땅콩은 전부 해진의 입 안으로 들어갈 것이었다. 차라리 땅콩처럼 그 몸 안에 온전히 녹아들었다면 쉬웠을 일이었다.
O<-<
처음 진진 세트하고 있을 적에 낙하하는 저녁을 읽었어서, 해진이랑 헤어지면 이진인 이렇겠구나 같은 생각을 했었던 기억이 있어. 하지만 역시/-- 뭐랄까 둘이 헤어진다면 이진이가 먼저 밀어내겠지 싶지. 그러니까 그냥 패러디라고 치자/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