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지금 바빠,
책에 몰두해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주위에 귀기울이고 있지도 않았기에, 어렴풋이 들은 이진의 목소리는 묘하게 멀었다.
바쁘진 않아,
대답하는데 어째서인지 조금 마음에 들지 않는 소리가 부스럭거린다. 그러니까 가령 옷장 문이 열리고 옷걸이에 걸려있던겉옷을 꺼내는 소리, 그걸 옷걸이가 좋으니 뭘 입어도 옷이 산다는 좋은 옷걸이ㅡ이진에 걸치는 소리, 아마도 좋아하는 편에 가깝지만 가까워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조금 기분나쁜 감이 있는걸음소리, 뭐 그런 것들이. 꼭ㅡ
……어디 나가?
ㅡ꼭 어디 외출하려는 듯한 기세기에 뒤늦게 보고 있던 페이지의 숫자ㅡ257페이지ㅡ를 힐끗 살피고 고개를 들어보니, 이진은 화분 밑에서 반으로 접힌 천 원짜리 지폐 몇 장을ㅡ비상금인가?ㅡ꺼내 바지 뒷주머니에 찔러넣고 있었다. 해진은 힐끗 시계에 시선을 주었다. 9시가 다 되어간다.
…담배 사러. 한 박자 늦게 이진의 목소리가 대답으로 돌아왔다.해진은 조금 인상을 구기며 다시 시계를 봤다. 정확히 8시 46분을 지나가고 있다, 물론 P.M.이 시간에, 담배 사러? …아.
대답하기 전에 이진은 조금 머뭇거린 것 같다.
다 떨어져서.
…흐음.
해진은 수 년 전에 장난삼아 담배를 접하게 해줬을 때 이진이 냈던ㅡ극히 레어한 반응이다ㅡ 기침소리를어렵지 않게 기억해낼 수 있었다. 심기를 거슬린 감이 있었을까, 아니 분명히 그런 것 같지? 고막을 통하지 않고 청소골의 진동을 통해 울려온 목소리에서, 해진은무언가가 꼬인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 꼬임이이진에게도들린 모양인지,눈치를 살피는 모양이 한심스럽다. 주제에 잘도 그런 건 알아서, 둔한 녀석이 이런 쪽에만 눈치가 빠르다.
선배,
아마도 좋아하는 편에 가까운 조용한 걸음소리가 몇 차례 이어지며 조금 가까워졌다. 이진은 분명 똑바로 서서 해진을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해진은 수 미터 아래에서 그가 자신을 올려다본다는 기분을 받았다. 왜, 대꾸하면서 해진은 펼쳐져있던 페이지 수를 다시 확인했다. 분명히 257페이지.
같이, 안 갈래,
…….
어딜? 답을 알면서 묻는버릇은 사실 썩 좋은 버릇이라고 말하긴 뭐하지만, 고칠 마음은 없었다. …그러니까, 담배 사러. 그런 버릇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단 듯한 웃음을 옅게 띄우면서, 이진은 말했다. 편의점? …응, 요 앞에. 해진은 턱을 조금 들어 이진을 똑바로 올려다봤지만, 어째선지 내려다보고 있다는 기분을 받았다. 기분이 조금ㅡ실은비교적 많이좋아졌다.
그럼, 가 볼까.
꼬임이 풀리는 소리는, 꼭 읽던 책을 덮는 것과 흡사하게탁, 하는 경쾌한 음으로 울렸다.
/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