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증은 몸의 위험에 대한 경고신호라고 한다지만, 통증 때문에간신히 청한 잠에서 깨야할 지경이란 것은 조금 가엾다.
…….
이진은 그 가여운 케이스에 처해있었다. 머리를 송곳으로 쑤시는 듯한 두통 때문에 문득 잠에서 깨어났지만 눈꺼풀을 들었는지 어쨌는지에 대한 자신조차 없었다. 시야는 부옇거니와 어두웠다. 목이 탔지만 물을 마시러 나갈 힘이 없었다. 땀이 적고 체온이 높은 체질이거니와, 지금은 식은 땀으로 몸이 물먹은 솜마냥 늘어져 열에 들끓고 있다. 그런데도 추웠다.
감기에 걸렸었나, 나. 이진은 생각했다.
시야에 못지않게 어둡고 몽롱한의식 중에,깨어나기 직전 자신이 무어라 작게 입술을 달싹였던 것을 기억했다. 누군가를 불렀었는데. 누구를 불렀더라?그리고나서야 누구를 부르든 간에 대답해줄 이는아무도없다는 사실을 느리게 깨닫는다. 누군가를 그런 중에 불러야 한다면 부를 수 있는 사람이라곤 해진 뿐이라는 사실도 함께. 미지근한 물을 뒤집어쓴 듯한 기분의 자각이 사실괴로웠다. 그가 아니고서야 자신이 그리워해도 좋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선배가 옆에 없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걸까. 어쩌면 그런지도 모르겠다고 믿었다. 감기는 옮으니까. 그러고보면 감기에 걸린 게 얼마만이지. 5년 만인가? 3년 만인가? 덮고 있는 이불은 납처럼 무겁게 자신을 짓누르고, 침대의 매트리스는 어중간하게 자신을 끌어안고, 그 안에 갇혀 이진은 죽을만큼 답답했지만 호흡기인 코와 입은 얼마든지 숨을 쉴 수 있었기에 질식사할 염려는 없었다. 그저 죽을만큼 외로운 것 뿐이다.
생각하자. 이진은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제 슈퍼에서3천원 어치를 사다 씻어뒀던 사과를 생각하고, 다듬어둔 콩나물을 생각하고, 볶아뒀던 땅콩이라던가 그 땅콩을 절반쯤 거덜내면서 내일 본가에 가야 돼, 부모님 제사.거기서 잘 지도 몰라. 말하던이틀 전의 해진을 생각했다. 그리고 해진이 아플 때 먹이려고ㅡ했지만 단 한 정도 먹이는 데 성공한 적 없는 해열제라던가 쓰다만 가계부라던가 끝내놨지만 마감날짜가 오늘이었지만 제출하러 나가지 못했던 레포트를 기억해냈다. 제사일은 어제였으니 지금 들어오지 않는 건 다른 여자라던가와 술이라도 마시고 있어서일 것이다.
사실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잠들고 싶었다.
지금 몇 시나 됐을까. 느리게 고개를 돌리자 노랗게 빛나는 숫자가 열 두시 반을 알린다. 여섯시간 즈음 잤나.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갔을 때가 여섯 시였으니 그 정도 되겠거니 생각했다. 지금쯤 제사지내고 있으려나. 눈을 감자 노란 불빛은 사라지고 대신 눈가가 조금 서늘해진다. 밥이고 뭐고 김치랑 반찬도 안 되는 콩나물밖에 없는데 선배는 언제 오려나. 밥은 먹고 오려나. 선배 누나들이 제사음식 좀 싸주면 좋겠는데, 밥이야 선배도 할 줄 알테지. 선배. 아 물기가 마르지 않는다.
이러다 정말 죽는 거 아닐까, 이진은 사실 몸을 웅크리고 싶었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아직 죽기엔 이르지않나, 아들 얼굴은 보고 죽어야 할텐데, 생각했다. 머릿 속에서 고래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시끄러운 공사장의 포크레인 소리도 들렸다. 아무도 들어올 일 없는 방문이 열리는 소리를들었다. 아, 그래. 환청 말고 제대로 된 다른 소리를 듣고싶었기에, 목소리를 짜냈다.
선배,
다 갈라진 목소리가 되어서는 그렇게 속삭여봤자 조금도 슬프지 않다.
대답처럼 누군지도 모를이가 속삭인 듯한 환청을 들었지만, 환청이란 것을 이진은 알았기에 누구였는지를 생각해볼 마음조차 없었다. 문득 열이 치밀었다. 아, 하고 싶다. 뜬금없이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금이라면 썩 좋아하지 않는 안기는 일이라도 얼마든지 해줄 마음이 있었다.
…선배,
닿고 싶어, 닿고 싶어, 닿고 싶어, 시트를 움켜쥘 힘조차 없었지만 이진은우는 것이 열을 올리는 데 좋은 효험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어느샌가 말라있던 눈가에 미지근한 물기가 어렸다. 선배, …선배, 그가 곁에 있고서야 자신이 이토록 괴로울 리가 없었다. 눈 앞이 아찔했다. 극심한 두통 속에서 검은 정장을 입고 있지 않을까 싶은 그를 생각했다. 언젠가 자신의 이마를 짚던 서늘한 손을 떠올렸다. 까마득히 멀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있을그 곳도 어떤 의미에서는무척 먼 곳이었다.
…….
목소리가 끊기자, 고래인지 갈매기일지 모를 것이 또 아득한 곳에서 울었다. 눈을 떴다. 청소는 해뒀으니까 아줌마라던가 부르지는 않겠지, 문이 열리는 환청이 들린다.차라리 고래가 낫잖아. 생각하면서 다시 눈을 감았다. 그만해. 잔뜩 쉰 목소리가 물기없이 울었다. 선배. 뭐라도 좋았지만, 누구라도 좋았지만, 이진에겐 해진 뿐이었다. 눈 앞은 카맸다.
……ㅡ.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때 하다못해 최대한 빨리 와달라고 부탁할 것을.
선배, 어서, 돌아와,
어미를 기다리는 새끼 새처럼 이진은 우짖었다. 헛소리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곧 스스로를 동정하고 싶어졌기에 그만뒀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를 끝으로 환청도 멎었다. 이제 좀 잘까, 생각하는데, 꼭 밤공기같은기척이 다가와있다. 그 기척이 잠시 내려다보다가, 거칠게이불을 걷어 올렸다. 무거워, 생각하기도 전에 몸 위로그것이 파고든다.술냄새가 풍겼다. 이런 건 환각도 아니고 뭐라고 해야하나.
…뭐야,
아. 선배 목소리다. 조금 기뻤지만 기쁨을 표할 힘도 방금의 헛소리로 다 써먹은 모양이었다. 환청이 아니었으면 싶은 목소리가 잠시 멈칫한다. 이마를 더듬는다.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손이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 뺨을 매만진다. 손길은 섬짓했다.
너, 아팠어?
너무 선배 같은데, 생각하다가 이진은 간신히 눈꺼풀을 들었다. 시야는 여전히 어두컴컴했지만, 눈물이 흘렀다. 선배, 그만두기로 했던 것 같은데 또 부르고 있다.침실의 보조등이 켜진다. 흐린 시야에, 기억하는 많고 많은 얼굴들 중에 가장 사랑하는 것이, 그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것 중에 제일 미묘한 표정을 지은 채로가득 들어찬다.
선배, 환각이 아니기를 빌면서 이진은 온 힘을 짜내 뱉었다. 조금 슬펐다.
……. 아팠으면 전화라도 했어야 할 거 아냐. 나……. 전화가 아니면 문자라도. …선배. 그래, 나야. 왜. 그럴 힘도 없었다고 대답하자고 생각하는데 나 선배랑 하고 싶어, 목소리가 멋대로 지껄인다. 미간이 좁혀진걸까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뭐? 눈가를 엄지로 문지르다 멈짓하는촉감이 너무 생생해서 눈물이 흘렀다. 간신히 팔을 들었다. 나 죽을 거 같아. 옷깃을 움켜쥐었다. 어쩌라는거야, 대체. 화난 듯한 음성이 그런 소리를 뱉었다. 그러고보면 그는 병간호고 뭐고 하는 것에는 서툴었지. 기억해냈다. 웃고 싶었다. 선배, 눈을 깜빡일 자신이 없었다. 그래. 선배, 그래. 나라니까. 서럽게도, 눈꺼풀을 감았다 뜨면 해진은 없을지도 모른다.
뭐래/-- 그냥 아파서 갈겼구요 전 잘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