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 잘 됐다, 나 술 많이 샀는데. 너 한가하면 술이나 한잔 하자.”
당연히 한가하지요. 단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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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異國의 바다는 단에게 당혹감을 주었다.
학창 시절의 봄 소풍까지 모두 여행으로 쳐도 단은 여행 경험이 많지 않았다. 그나마도 여권은 이번 기회에 처음 갖게 되었다. ESTA? 설명이 필요할지. 그런지라 하와이란 단어의 울림은, 분명 지구 위에 실재하는 어떤 제도諸島의 이름임을 알고 있음에도, 상징적인 이미지만 막연히 떠오르는 것이었다. 투명한 바다와 야자수, 화관, 트로피컬 칵테일, 꽃이며 과일이 프린트된 하와이안 셔츠……. 그런 것들은, 대한민국 서울의 단에게는 모니터 속 바탕 화면 사이즈로 보는 편이 차라리 친숙하다.
가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별세계로의 모험을 떠나기에는 아직 젊거나 때를 놓친 것만 같았다.
아니 어쩌면, 서울을 사랑하고 있을지도.
그러나 휴가자 명단은 저승사자의 그것마냥 별다를 누락이 없었다. 친교가 있는 도깨비―승아와 함께 기내에서부터 몇 잔 기울이다 보니, 얼렁뚱땅 미지의 해변까지 떠밀려 와 있었다. 단이 그 모니터 속의 이경에 무사히 섞여 있었음을 깨달은 것은 해가 지고 나서였다, 등 뒤에서 팔을 흔들며 불러 세운 사람 덕분에 문득. 하마터면 길을 잃을 뻔 했다는 것도.
“좋죠, 선배. 짐은 저 주시죠~”
침착하게. 취기를 한 겹 걷어내며 돌아본다.
(단의 이름은 알고 있을까?)
(그 전에, 승아 씨의 이름을 들은 기분이 드는데.)
아니, 기분만이 아니다. 단은 들었다. 그리고 아마 장승이 단을 대작 상대로 선택한 과정에는 승아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 외의 이유를 별로 생각할 수 없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승아가 그에 대해 뭐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됐어. 따라나 와라.”
“왜 그러십니까~ 저는 부려주셔야 마음이 편한데요.”
지부 사람 중에 이 땋은 머리의 저승사자를 모르는 이가 얼마나 있을까. 굳이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지 않듯, 단의 회사에 나이 세는 것을 잊은 사람들은 수도 없이 있다. 나이를 함부로 짐작하는 것은 무례인 것 외에 큰 의미가 없겠으나, 장승이 이 유서 깊은 조직 안에서 터줏대감 노릇을 하고 있는 사람 중 하나란 사실은 조금만 기회가 되어도 알 수 있다. 돌발 상황이 밥 먹듯 터지는 필드 업무 전반에서 능숙하게 일당백을 해내거나, 여러 저승사자의 신뢰를 받는 모습만 보더라도 그 연륜은 아득하게 느껴지므로. 단에게 직접 향한 적은 없지만 이따금 사무 팀 방향에서 터지는 노성이 귀에 익기도 했기에, 여러 이유로 조금 긴장이 되었다.
“와~ 묵직한데요. 혼자 드시려고 이만큼 사신 겁니까?”
다시 말해 방금은 남은 취기를 끌어모아 넉살을 부렸다는 뜻.
“야. 싫으면 들어가던가.”
“아하하, 제가 마다할 게 따로 있죠~ 전 언제나 환영입니다 선배.”
반쯤 입에 발린 대답을 했지만, 단에게 공짜 술을 마다할 이유는 없다. 단은 장승에게 넘겨받은 봉투 안을 굳이 들여다보며, 내용물을 하나, 하나, 하나……. 또 하나……. 확실히 많다. 옛날 사람들은 다 이런 것일까. 모자란 것보단 남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어쨌든 헤아릴 수 있는 수였으므로 간단히 수를 헤아려보았다. 일곱 캔의 맥주와 보드카였다.
——그 양반, 내 술을 참 좋아하지. 조선시대부터인가?
승아의 코멘트가 한 박자 늦게 떠올랐다.
그렇군. 그렇다면.
단 역시 그의 술을 참 좋아하는 사람 중 하나니까, 아마 장승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으려나.
장승의 반걸음 뒤에 따라붙으며, 단은 안주거리를 하나 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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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휴가 때가 좋았는데 말입니다~ 정작 쉴 때는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쉬다가 일하려니 몸이 잘 안 따라주네요.”
6-2-12시.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 병을 뒤집었다 가볍게 흔들자, 녹색 유리 속에 작은 소용돌이가 단번에 휘몰아친다. 첫 한 모금은 버린다.
장승이 잔을 들었다. 술병의 바닥이 몸쪽을 향하도록 하고, 오른손으로 술병의 상표를 가리듯이 감싸 쥔다. 왼손으로는 술병이 흔들리지 않게 손목을 받쳐 든다. 깍듯하게 술을 채웠다. 아쉽지도 넘치지도 않을 정도로 하자 잔 위의 수면이 잔잔히 일렁인다.
“너는 대체 뭐가 문제냐?”
“하지만……. 입사하고 그렇게 오래 쉬어 본 건 처음이었거든요. 부담스럽다고 해야 되나……. 쉬는 게 적응이 잘 안 되더라고요.”
“염병할. 이 회사가 문제인가?”
“아하하~ 복에 겨운 줄 제가 몰랐죠 뭐.”
이미 말했지만, 옛날 사람들은 다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정말로 모자란 것보단 남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하지만 누가 둘이 마시려고 소주를 이렇게 여러 병 사는 것인지.
물론 단은 술도, 술 못지않게 술자리도 좋아하였다. 어쨌든 취기는 단을 조금 이완시켜주었고, 다른 사람에게도 비슷하게 작용하는 듯했으므로―물론, 예외인 인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모두 알고 있다―. 덕분에 술잔을 사이에 두고는 평소보다 조금 더 독특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단에게 평소 보이는 것들이 보이지 않고, 단에게 평소 보여주지 않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되는. 그런 시간을 나눌 상대를 새로이 얻은 것은 분명 기꺼운 일일 것이다, 초행이었던 별세계에서라면 더더욱.
“말씀 듣다보니 궁금해졌는데, 그런 휴가는 몇 년에 한 번쯤 보내주는 건가요?”
장승이 병을 받아들었으므로 잔을 집으며, 단은 별이 반짝이던 섬바다를 떠올려본다.
기분 탓인지, 조금 어지러웠다. ■
180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