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때문에 누군지 못 알아봤어요.”
안개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 생각하지만, 율은 안개 탓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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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율에 대해 단은 간략히만 알았다. 올해 들어온 기술 파트의 신입. 인간이고, 이 정도의 키에 곱슬머리. 사회적 거리가 남들보다 좁다. 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 이따금 제 나이답지 않게 웃을 때가 있다는 것. 이 정도일까. 단에게는 귀중한 후배였으나, 수백 년을 산 이들의 눈엔 올해 3년차인 단도 현장 파트의 신입 이상은 아니었을 것이므로 사소한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이렇게 있으면, 꼭 안개 같은 기분이 들어요.”
거기에 그가 비 맞기를 좋아한단 사실을 오늘 새로이 더한다.
갑작스런 봄비에 혹시나 필요한 사람을 만날까 싶어 우산을 하나 더 챙겼었다. 율에게 권해보았지만 이미 젖었다며 거절당했다. 알게 된 사실에도 불구하고 단은 쓰고 있던 우산을 조금 율의 반대 방향으로 기울여본다. 지척에 있었으므로 그것만으로도 새로운 빗방울이 그의 얼굴에 달라붙는 것 정도는 막을 수 있었다, 율의 머리카락은 습기를 먹은 탓일지 조금 짙은 빛을 띠고, 유독 곱슬거리는 듯 보였다. 입술이 하얗게 질린 것 같은데. 요 앞에서 컵라면이라도 하나 권할까——같은 것을 한가하게 생각하다가,
우산을 놓쳤다. 무슨 말이냐면,
“괜찮아요?”
비가 내리고 있었고,
단은 율의 팔을 인도人道 쪽으로 붙잡아 당겼다.
“그럼.”
율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오히려 감기냐는 물음을 돌려받아 고개를 저었다. 단은 율의 양 발이 제대로 바닥을 딛고 있는 것을 확인한 뒤 목에 걸려있던 우산을 고쳐 들었다. 단도 괜찮았다.
“……그럼 다행이지만.”
분명 단은 율에 대해 잘 몰랐다. 횡단보도의 신호등이 청신호로 바뀌려던 찰나였고 율이 안전하다는 것만은 알았지만, 실제론 어떤 마음으로 차도로 몸을 기울였는지까지는 모르니까. 그런 능력은 없었으므로. 율이 넘어지기 직전에 발로 바닥을 디디며 웃음을 터뜨릴지 그대로 균형을 잃고 젖은 차도 위로 넘어지고 말지는, 단이 함부로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미지의 순간에, 단은 손에 쥔 것을 놓더라도 팔을 뻗을 사람이었다. 아니, 뻗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다행히 율은 팔이 닿는 거리에 서 있었다.
단은 우산 두 개를 나란히 펼쳐들었다. 마른 우산이 탕, 소리를 내며 펼쳐짐과 동시에 비를 맞기 시작한다. 비가 거리를 적시는 소리와 우산의 방수면을 하나, 둘, 여섯, 스물 넷, 두드리는 소리와 편의점 안 냉장고의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와 더 먼 곳의 속삭임들을 귓등으로 흘려 넘기며, 단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심상찮은 밀도의 먹구름과 눈이 마주쳤다.
“이만 복귀하죠. 빗발이 굵어질 것 같네요.”
율은 안개 탓을 하였었다.
단은 생각했다, 안개 이야기를 해서 그런 생각이 들었을지도.
희뿌연 안개비에 번지고 흐려져 없어질 수 있다면.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은 단도 율도 피가 흐르는 산 사람이기 때문에.
“조금만 더 놀다 가면 안 돼?”
“율 씨야말로 감기들 것 같은데, 괜찮겠어요?”
다음 보행 신호를 기다리며, 두 사람은 잠시 서 있었다. 괜찮지 않을까~ 아직 젊은걸. 젊지만~ 조금 더 놀다간 양말까지 젖게 될 텐데요. 에, 말하던 율이 에취, 작게 재채기를 뱉는다. 이어진 웃음소리는 비에 번져 빠르게 흩어졌다. ■
180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