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받는 이의 이름과 경칭이 쓰인 듯한 부분, 그 위에 잉크 얼룩이 형편없이 번져있다. 이하 정갈한 필체로 쓰인 문장이 이어진다.)
건강은 좀 어떻습니까. 이 서신을 읽고 있다면 적어도 봉인을 뜯었을 양손과 쓰여 있는 글자를 읽을 두 눈은 모두 무사하겠죠. 읽히기 위하여 보내는 글인 만큼, 당신이 그러하리라 믿고 더 걱정하지 않겠습니다.
오랜만에 펜을 잡자니 대공大公을 모시고 갔던 원정이 생각납니다. 너나 할 것 없이 편지를 많이 쓰던 시절이었죠. 다른 사람들을 따라 펜을 들긴 했지만, 무엇을 그렇게들 적고 있는지 몰라 겨우 두 문장을 만들어 보낸 일도 있었죠. 아마 당신의 건강을 묻는 한 줄과 나의 안부를 전하는 한 줄이었을 겁니다. 그래도 이따금 하다 보니 그보다는 긴 편지를 쓸 수 있게 되었네요. 처음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면, 편지를 잘 받았는지 물은 적이 한 번도 없었군요.
2
“림, 자네가 해 보겠나.”
“네.”
부름을 받은 림이 말을 몰아 몇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화창하고 구름이 빠르게 흐르는 날이었다.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가늠하며 잠시 공중에 먼 시선을 보내던 림은, 선뜻 활시위에 화살을 메기어 천천히 겨냥하였다. 모두가 숨을 죽였으므로 사방이 고요해졌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순조로운 방향으로 멀어지고, 곧, 감탄과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과녁에 화살을 꿴다는, 단순한 재주였다.
“다녀오겠습니다.”
사냥한 것을 줍기 위하여, 림은 달려나갔다.
림은 순순한 사람이었다. 살아있는 것을 꿰뚫거나 베어 그 명을 끊는 일, 공격하는 자의 의도를 저지하거나 제압하는 일, 그로서 어버이의 땅과 그 땅에 안겨 살아가는 자손들을 지키는 일. 공적功績에 대한 환호나 치사를 견디는 일까지 모두 림에게 주어진 임무였고, 베테레스에게 말한 것처럼, 림은 굳이 좋은 일과 싫은 일을 구분하지 않고 임하였다. 군말이 없는 태도는 군인으로서 훈련된 바였으나 림의 천성에도 잘 맞았다.
림다운 삶이었다.
3
태어난 도시, 불의 땅에서는 모국의 왕을 어버이라 부른다.
어버이에게는 연고 없는 고아를 거두어 그 용처用處를 찾을 때까지 사양飼養하는 취미가 있었고, 림은 은혜를 입은 아이들 중 하나였다. 궁성에서 마구간 일을 시작했으나, 말을 돌보는 일 못지않게 승마를 잘한단 사실이 발견되었다. 며칠을 앓아누울 때마다 키가 자랐다. 훌륭한 혈통을 가졌으나 등이 까다롭던 말을 기어코 닦고 구슬려냈을 때, 왕은 크게 칭찬하며 림을 기병대로 보냈다. 첫 상관은 함께 온 말을 림에게 주었다. 빈손으로 태어나 빈손으로 온 림이 받기에 과분한 파격이었으나, 어차피 림이 아니었다면 탈 수 없는 말이었기에 모두가 납득하였다.
“자네 덕분에 목숨을 구했네. 어떻게 감사해야할지 모르겠군.”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대공님.”
어리고 푸를 때부터 가장 많이 칭찬을 받은 일이므로, 그 말 위에서라면 무엇이든 조금 더 자신이 있었다. 활을 쏘는 것도 창검의 날을 휘두르는 것도, 선봉에 서서 부대를 지휘하거나, 승리와 패배, 희생과 전리戰利를 결정하거나, 누군가의 등 뒤를 지키는 것도……. 그 일을 좋아했는지 싫어했는지는 생각한 적이 없지만, 모두 살아있는 것을 해치거나 구하거나, 둘 다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불의 자손에게 주어진 소임이었다.
“자네에겐 명마도 명검도 있으니 다른 보상을 줄 수밖에 없겠군.”
“그렇군요. 포상은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좋은 술이나 담배를 받지 않을까, 림은 술담배를 즐기는 대공의 취향을 알았으므로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러나 충정으로 모셨던 림의 마지막 상관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림, 내 아들을 거두지 않겠나?
나의 자부子婦가 되어, 세제르의 이름을 널리 드높이게나.”
그는 명령이라기보단 재미있는 농담을 떠올린 듯한 표정이었다.
“두 아드님이라면 전부 혼인을 하지 않았습니까.”
림도 그것이 오래된 민담을 흉내 낸 농담인 줄 알았다. 전설 속의 용을 베어 넘기고 납치된 공주를 구출하여 돌아오면 공주를 아내로 맞고 왕위를 물려받게 된다는. 때문에 제가 정부情婦나 하고 있을 사람입니까, 하는 의미를 담아 농담을 돌려주자, 그는 껄껄 웃었다.
“하지만 막내가 남아 있지. 군인이 아니라 본 적이 없나? 이름은,”
4
요나.
당신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비가 쏟아지는 날에도 눈이 쌓이는 날에도,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당신의 가족으로서 함께 할 것을 서약하였으나 사실 함께 한 날이 많지 않습니다. 나는 나의 전장에서, 당신은 당신의 서재에서, 각자의 젊은 세월을 재로 만들며 보내오지 않았습니까.
이미 처음부터 지킬 수 없었던 맹세입니다.
그러니, 당신을 만나러 가는 것은 깨진 약속을 이만 마치기 위함입니다.
5
남편은 집에 두고 나왔다.
도망치듯 나선 길이었으므로 가려는 곳은 없었다. 몸처럼 아끼던 말은 다리가 부러져 죽였고, 하사받은 명검도 푼돈에 전당을 잡았다.
마레에게 말한 것처럼, 모두 림이 거절에 재주가 없었기 때문이다. 몸에 무익한 연기를 들이마시거나 술잔을 높이 들었다 입가에 가져가는 일처럼, 해도 하지 않아도 좋을 일을, 림이 거절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쩌면, 태어날 때 갖지 못한 장소와 지위에 매이고 속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대공이 전사한 전투를 끝으로 림은 퇴역했다. 스스로의 재주로 얻어낸 자리와 이름과 쌓아온 행적에 숨이 막히기 시작한 것은 결코 평화가 불행했기 때문이 아니다. 일이 없어진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그것은 그저,
잡다한 생각이 조금 많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6
요나, 나는 사막 너머에 있습니다.
먼 걸음을 준비하기에 앞서, 당신을 받은 일만큼은 후회한 적이 없다는 말을 전해두고 싶군요. 잘 쓴 편지든 못 쓴 편지든, 어차피 읽어줄 사람은 당신밖에 없었습니다. 나에게 가족이라곤 한 사람이 전부니까요. 당신이 안전한 장소에 남겨져 매일 무사하리란 믿음이 내게 오래도록 큰 위안이 되어주었다는 사실을, 당신이 부디 알아줬으면 합니다.
모래의 바다를 건너는 일이 떠나올 때와 마찬가지로 위태로운 항해임을 알지만, 도착하는 날까지 내가 가진 힘과 지혜를 모두 다하겠습니다.
신의를 담아,
림 세제르
200404
림은 <왜 사막을 건너게 되었을까?> 에서 시작한 캐릭터라
이 이야기 정도는 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느즈막히 완성하였다고 한다
요나가 편지를 받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림은 매번 그러하듯 읽으리라 생각하며 쓴 듯
(편지란 본래 그렇게 쓰이는 글일 것이다)
로그의 제목은 림과 동행하였던 시타라 알자우라크의 워딩에서 빌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