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ic Satie - Gnossienne No. 1
델리케이트 · 매터스
Delicate Matters
P. Cup
1.
"닥터 일마즈를 위해."
"닥터 일마즈를 위해."
애도는 모쪼록 살아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정황 조사를 위해 방문한 원기관에서 노아는 기대 이상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뜻밖의 소식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빈틈이 생겼기 때문일지도 모르나, 고용 불안정이 당연한 실적주의나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원기관의 조직 문화를 생각하면 자신의 인간관계에 조금은 자부심을 느껴도 될 것 같단 생각이 든다. 노아는 자연스러운 권유에 기꺼이 현지퇴근을 결정했다.
일행과 함께 바에 들어서자 점원은 머릿수가 맞게 놓여있던 6인용 테이블에서 의자 하나를 구석으로 치워주었다. 장례식은 소수의 지인끼리 치를 예정이라고 들었다. 식에 참석할 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던 노아들은 그들끼리 고인을 기리기로 했다. 그러므로 잔을 부딪치지는 않는다. 반가운 장소에서 반가운 사람들과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었지만, 부고로부터 비롯된 모임이었으므로 평소보다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그런 날이기 때문일까, 바의 선곡도 오늘따라 서글프게 느껴진다.
노아는 닥터 알렉시스 일마즈를 꼼꼼한 사람으로 기억했다. 완곡한 표현일 뿐 '꼼꼼하다'는 성질이 상급자에게 붙이기 좋은 인평은 못 될 것이다. 그러나 노아는 스쳐보고 건너 들은 것 이상의 인상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 노아는 보다 시장경제 원리에 편향된 프로젝트에 참여해왔고 프로젝트의 성과는 통상 인공지능 그 자체의 학습 자료로 사용되었으므로, 실험 방법론의 권위자였던 그와는 접점이 극소하기도 했다.
"기분이 이상해요. 전 닥터 일마즈랑 일해본 적도 없는데."
"저도 그래요."
"이상한 일이죠? 센트럴에서 과로사가 아닌 다른 사인으로 사람이 죽다니."
"하긴, 우리의 운명이야 권고사직 아니면 과로사 아니겠습니까."
저녁 식사 대신으로 주문한 똠양꿍 수프를 홀짝이던 선임 하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하나 더 있죠. 급성 위궤양으로 실려 나가기."
"맙소사."
침울한 토로와 농담 섞인 자조가 술잔과 함께 오간다. 노아는 분위기에 어울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빈 잔을 내려놓았다. 과학과 기술의 힘을 빌린 연명이 인간답지 않다는 의견도 존재하지만, 사람이 쉽사리 죽지 않는 세상임은 분명했다. 노아는 젊었으므로, 본인상이란 단어가 실제로 쓰이는 상황을 이번에 처음으로 접하였다.
"아. 잠시만요." 주도적으로 자리를 만든 연구원 이바노바가 한 손으로 유테크를 조작하며 물었다. 고양이 귀를 연상시키는 디자인의 케이스 덕분에 커다란 장난감을 만지는 것처럼 보였다. "닥터 페이가 지금 어디냐고 묻는데 이리로 모실까요?" "여쭤보세요." "글라스를 하나 더 달라고 해요. 의자도." 노아도 입을 모아 반겼다. "그럼요."
2.
"팀장님. 얼마나 보고 싶었다구요."
그리움을 실어 살갑게 말하자, 닥터 미아 페이는 재미없는 어리광을 들은 것처럼 픽 웃었다. 지난 송년 모임 때 얼굴을 보고 불과 3개월 만이었다. 노아는 언제나 그와 같은 연상 여성에게 약했다. 그런 노아의 경향을 아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닥터 페이는 노아의 이동보조기계를 자칫 잘못 건드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자리에 앉았다. 같은 팀의 직속 상사였던 시절부터 그는 노아에게 세심하고 조용한 배려를 기울여주었다.
"닥터 일마즈의 연구실에 들렀다면서요? 닥터 한."
"제가 반갑지 않으세요? 인사부터 해주셔야죠."
"그래요, 오랜만이에요. 당신이 왔대서 와봤어요. 법인카드와 함께."
와. 노아가 아는 센트럴 특수공학연구소는 제법 개성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집단이었지만, 오랜만에 만난 그들의 면면에는 어쩐지 공통점이 보였다. 다양한 출신의 요원들이 섞여 협업하고 있는 특수범죄전담국에서의 파견 근무를 겪으며 배운 것이다. 무리 안에서는 몰랐지만, 연구소는 단순한 원기관이 아닌 노아의 일면을 설명하는 정체성 중 하나가 되고 말았다. 그 무리에 다시 돌아온 듯한 기분에 노아는 조금 감성적인 기분이 되었다. 이 도시에서 나고 자라 떠난 적 없는 노아가 알 리 없는 노스텔지어의 감정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왜 이렇게 퇴근이 늦으셨어요? 저희 벌써 이만큼 마셨는데."
"글쎄요? 닥터 한의 빈자리가 너무 크기 때문이겠죠?"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마음 아프잖아요."
농담인 듯 농담이 아닌 듯 돌아온 그의 대답에 노아는 과장되게 슬픈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물론 농담일 것이다. 프로젝트 도중 하차한 것이 아니므로 남겨둔 자리 같은 것은 없거니와, 설령 그러하고 노아가 너무나 뛰어난 인재라 한들 대체할 인력이 없을 리 없다. 심지어 연구소의 원로이자 세계적인 석학이었던 닥터 일마즈도, 고인의 업적과 별개로 기관 내의 자리가 메워지는 데엔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센트럴은 본래 그런 기관이다.
"언제든 내키면 돌아와도 돼요. 닥터 한이라면 지금 팀에서도 환영일 테니까."
"그러고 싶은 맘은 저도 굴뚝같죠. 요새 어떤 프로젝트 한다고 하셨죠?"
바가 점점 시끄러워지면서, 자연스럽게 테이블의 화제가 갈렸다. 닥터 페이는 기밀이 아닌 선에서 그가 맡고 있는 프로젝트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예비 범죄 상황을 감지하는 SNS 모니터링 시스템으로 경찰의 치안 업무를 서포트할 계획인듯했다. 노아는 주의깊게 들으며 이따금 고개를 끄덕였다. 굉장히 참신한 이야기는 못 되었으나 도시의 치안을 위해 누군가는 지속적으로 고민해야 하는 프로젝트였다. 정보 수집 권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어렵기에 공개적으로 타임라인이 갱신되는 SNS를 택한 것 같다.
"으으음, 제가 뭘 도울 수 있을지는 알 것 같지만요."
상업성을 띤 연구 과제는 실패 부담이 적으면서도 과제 예산이 높아 팀원을 지키기에 좋았다. 노아가 그런 프로젝트에 주력했던 것도 같은 이유였으므로 그 점을 지적하자, 닥터 페이가 웃으며 답했다.
"인공지능은 인류의 자산이니까요. 보신에 좋은 일만 할 수는 없겠지요."
"닥터 한은 무려 SCA에 있으면서요." 그와 지금도 같은 팀에 있는 이바노바가 거들었다.
"그것도 그렇네요." 잠시 답할 지점을 놓쳤던 노아도, 순순히 인정했다.
"그래서, 닥터 한. 헥사곤 타워는 어때요?"
"음……. 높은 건물이죠."
"그것 말고는 해줄 말이 없어요?"
"거기에 여러분이 없어서 슬퍼요. 진심으로요."
물론 수사 기밀이 아닌 선에서 하고 있는 일에 대해 간략히 설명할 수 있었겠지만, 노아는 시시껄렁한 주제로 이야기를 돌리고 만다. 추모의 순간은 어느샌가 공기 중에 흩어지고, 누군가가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3.
다음 날의 일과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술자리는 데킬라 두 병을 넘지 않고 끝났다.
"오늘 불러줘서 고마워요."
"불러주다뇨. 이런 핑계로 우리끼리 한잔 하는 거죠."
"조심해서 가요. 매번 혼자 가게 하네요."
"혼자 갈 수 있으니까요. 또 뵐게요."
"또 봐요."
과학기술은 인간을 인간으로부터 자립하게 한다. 노아는 어느 인간의 도움도 받지 않고 에어카에 올라탔다. 노아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위해 제작된 차량이었으므로 운전석에는 시트가 없다. 노아의 의자는 퍼즐 조각이 맞물리듯 정확히 차내에 안착하였다. 생체 인증을 마치자 에어카는 노아의 이동 패턴에 따라 북동쪽으로 경로를 설정하고 자율 주행을 시작했다. 노아는 노아의 마른 몸을 의자에 완전히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취기로 조금 올라간 심박수를 달래듯, 차내 스피커에서 부드러운 선율의 피아노 연주곡이 흘러나왔다.
인류의 자산…….
노아는 문득 닥터 일마즈의 연구실에서 살펴보았던 수첩을 떠올렸다. 그는 죽었지만, 그가 남겨온 것들은 인류의 자산으로 남아 본인보다 오래 기려질 것이다. 수첩 안에는 병적으로 반듯반듯한 필체의 수식이 가득했다. 포토그래픽한 기억력을 가진 것이 아니므로 기억하는 것은 불과 몇 행 뿐이지만, 만년필에 잉크를 넣어 종이에 직접 식을 적어두다니 아날로그한 취향의 극치가 아닌가 생각했었다.
(애초 인간의 손이 그렇게까지 균일한 서체를 가질 수 있는지도 경탄스럽지만, 지금은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근무 시간은 끝났고, 취했으니까.)
"……."
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도시에 마침 높은 지능지수의 천재로 태어나 그 사회의 부품으로 살아가는 일에 노아는 크게 불만이 없다. 법 집행기관에 기여하란 권유에도 그는 순응하였다ㅡ물론 거절할 수 있는 권유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노아 한은 태어나서부터 축복받은 인간이었다. 특출난 재능을 잠시도 낭비하지 않고 살아왔다. 그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물론 죽을 수도 있었다.
유기물로서 살아있다는 것.
그것은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인류의 발명은 어디까지나 인류의 편의를 위한 것이다. 인공지능체의 두뇌를 개발하는 직군에서, 인공지능보다 인간이 우월하다는 것을 번거롭게 확인할 필요 따위는 없다. 더군다나 이 시대의 인간다움이란 필멸에서, 비효율에서, 하자와 불완전에서 찾아야 하는 것만 같았다. 노아는 이 유행에 그리 열렬하지 못했다.
물론 그것은 노아가 한 번 부서졌다 수리된 인간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무릎 아래의 다리 근육이 기능하지 않고 간을 비롯한 뱃속의 일부는 인공 장기로 대체된. 전부 삶의 질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정한 노아이고, 그중 몇 퍼센트나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지 알지 못하게 되었다. 간단히 답을 내리기에는 조금, 복잡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아는 아직 살아있었다.
4.
돌아가는 길에, 노아는 마음을 바꾸어 호텔의 스파 서비스를 찾았다. 늦은 시간이었으나, 은은한 오렌지빛 조명이 떨어지는 로비에서는 유니폼을 입은 인영 하나가 오늘의 마지막 예약 고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여느 때와 같이 도와드릴까요?"
"네. 그런데 술을 조금 마셨어요."
노아는 웃지도 찡그리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그러시군요. 페퍼민트 오일로 체온 조절을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세요."
"네. 고객님."
이름모를 아미쿠스가 순종적인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노아는 인공 체액에 젖은 인공 안구가 빛을 받고 번들거리는 모양을 차분히 바라보았다. 그 아름다운 눈동자 너머에는 유리액의 성분을 정교하게 흉내낸 물질에 감싸여 고해상도의 카메라와 적외선 센서 따위가 작동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물론 고도한 공산품이었다.
19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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