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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의 애매한 서화

연, 정의






1


하루는 사람을 주웠다. 정은 그 날의 일后事을 꽤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밤비로 땅이 젖어 흙내음이 흠씬 올라왔던 날. 관복의 소매 안까지 스며들던 늦가을의 청명한 찬바람이나, 시장 골목에 감도는 따뜻한 활기, 그것을 둘로 가르는 정적, 발을 끌며 걷는 걸음, 이방인에게 쏠리는 경계의 시선들, 시큼하고 비릿한 이취異臭, 어린아이의 울음소리, 색을 알 수 없게 되어버린 도포……. 어떤 순간의 감각은 어제처럼 생생하였다.

판에 박힌 듯 단조로운 정의 일상과 크게 괴리가 있는 날이었기 때문일지도, 그 날 만나게 된 인연이 정에게 너무나 예사롭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계절이 바뀌도록 기억이 퇴색되지 않는 것은 정이 그 날을 종종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집으로 데려왔단 말이냐.”


그 날. 정은 집의 주인이 아니었으므로, 일찍이 가주를 찾아가 상황을 고하였다. 가주, 정의 어머니는 사랑하는 따님과 차를 마시고 있었다. 집에 오기까지 지나온 사소한 난항과 애로들을 전부 늘어놓을 생각은 없었으나, 그는 이미 지루해졌는지 정의 말허리를 잘랐다.


“네, 객방에 있습니다.”

“손톱은 확인하였고?”

“네. 어머님.”

“그렇다면 괜찮겠지.”


그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무심하였다. 무엇이 괜찮은 것인지 괜찮지 않은 것인지, 정은 그 대화만으로 이해하고 있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부하의 등에 들쳐 업히느라 허공에 늘어졌던 이의 손끝을 봐두었던 것은, 어머니의 보수적인 경향에 동의하지 않는 정마저 하고 마는 일이었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것은 인륜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초조한 마음에, 정은 그만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고 말았다.


“그렇구나.”


네 말이 맞다만,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정이 아닌 정의 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경아, 혹시 네가 원치 않는다면 바로 내보내마.”

“외람된 말씀이오나, 그보다 정이의 인덕仁德을 칭찬해주시는 게 어떠신지요. 쉽지 않은 일을 하였지 않습니까. 세간에 미담이 될 것입니다.”


경은 그런 날에마저 고귀한 인격의 한경 그대로였다. 다만 그의 말은 옹호를 넘어 어쩐지 어머니를 부드럽게 나무라는 듯 들렸으므로, 정은 오히려 그 자리가 불편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약간의 침묵을 견디고 나면, 어머니는 그 상賞으로 정에게도 잠시 눈길을 주었다.


“문제가 생기면 정이 네가 책임지는 것이다, 알겠느냐.”


그것만은 처음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저의 손님입니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정은 고개를 똑바로 든 채 고하였다.






2


“그렇게 말해주다니 고마운걸요, 설.”


하루는, 설이 목숨에 대해 말하였다.

무언가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정은 웃으며 거절했다. 마음대로 한 일에 상을 요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목숨이라니. 군은 충忠을 사랑하는 집단이었으므로 군인인 정에게 그런 말은 처음 듣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뿐인 것을 주면 그 자신에겐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구명救命에 대해 보은하고 싶다면 지금처럼 어울려주는 것으로 좋다고 달래 보았지만, 설은 석연치 않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럼, 저도 제 목숨으로 돌려드리죠.”


그의 기분이 상했으면 하여 사양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정은 잠시 생각하며 고른 말을 보태었다. 농담에 농담을 돌려주듯.


“어떤가요?”

“하하.”


정의 의도를 알아주었을지, 설이 마른 웃음을 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정은 아직 알지 못한다. 다만, 신체의 상처나 쇠약이 호전되고 있음에도 설에게 그의 목숨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때가 많았다. 그가 초연한 사람이기 때문일지도 모르나, 이따금 정은 그가 삶에 대한 열의를 모두 잃은 것처럼 느껴지곤 하였다. 그 자신에게 덧없는 것을 답례로 받아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기왕 저승까지 갔다가 건져 온 목숨이라면 정은 그가 그것이 도로 식게 두는 대신 조금 더 소중히 여겨주길 바랐다. 그 자신의 의지로, 그 자신을 위해, 그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면서.


그러나, 살아가는 것은…….

죽음보다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고 흰 손톱의 인간이란 나약한 존재이므로. 정이 마음대로 구해놓았을 뿐인 것에 대해 어떻게 써 달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차가 식었네요.”


정은 그의 몸 속이라도 따뜻해지길 바라며, 온기가 남아있는 다관茶罐을 정중히 기울였다.






3


하루는 술자리가 생겨 귀가가 생각보다 늦어지고 말았다. 설을 객방에 들인 이래 정이 잘 하지 않는 일이었다. 평소 그렇게 굴지 않던 후임이 만취하도록 마시고는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석별惜別의 마음을 술로 나누는 수밖에 없다면 그 또한 변화를 결정한 정이 감내해야 할 것이다. 이미 야심한 시간이었으므로, 정은 문안 대신 사용인에게만 귀가했음을 알리고 바로 객방으로 향했다. 귀가 전인 정을 위해 대문 앞을 밝혀둔 것을 빼면, 불빛이 남은 곳은 그 방 하나 뿐이었다.


“다녀왔어, 설아.”


식사는 어떻게 했어? 그것은 늘 정이 신경 쓰는 것 중 하나였다. 함께 있지 않은 시간에도 정은 어쩐지 설의 안부에 대해 생각하고 말았다. 신발을 벗지 않은 채 마루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자니, 방 안의 설이 대답 대신 위화감을 감지하였다.


“냄새가 다르네.”


그래? 술 냄새인가. 정은 한 손으로 입을 가리는 시늉을 했다. 술 마셨어? 설이 고개를 기울였다. 응. 정은 멀거니 웃었다. 주량을 넘지 않았다곤 하나 술을 마셨으므로 취기를 피할 수는 없다. 술을 먹으면 다 그렇게 되는 건가. 글쎄, 정은 그의 질문에 언젠가와 같은 대답을 한다. 하지만 아플 때는 마시는 게 아니야. 안개 낀 새벽처럼 머릿속이 명료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정은 늦은 시간까지 그가 깨어있음에 기쁨을 느끼고 말았다. 그로서는 그 방에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을 알면서도. 정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있잖아, 설아.


“기다렸어?”


나를 기다렸다고 말해주지 않을래.

난 너에게 돌아오는 것으로 하루를 마치는 것만 같아서.






4


하루는 눈을 떴을 때 설이 깨어있었다. 아직 동이 트지 않아 방 안은 어두웠고, 설이 아주 가까이에 있었으므로, 그가 깨어있다는 것만을 인지할 뿐이다. 정은 잠이 짧은 설의 앞에서 감히 잠든 척을 하지 않았다. 이미 깊이 잠든 모습도 잠이 옅어져 눈꺼풀이 열릴 때의 모습도 전부 드러낸 뒤이므로, 그에게 얄팍한 수를 써봤자 간파당할 것이 분명했다.


“일어났어?”


잠꼬대처럼 말을 걸자 설이 식은 웃음을 기대어왔다. 정은 이불 속에 들어있던 손을 꺼내어 설의 드러난 목에 가져다 댄다. 손바닥을 넓게 눕혀 체온을 전했다. 함께 잠드는 날이면 설이 버릇처럼 확인하는 것이 정의 손가락 끝에서도 맥동하였다, 그 자리에 두 사람이 아직 살아있기 때문에. 


정아. 설이 이름을 불렀다. 그의 목소리는 귀로 듣기 전에 맞닿은 몸을 통해 전해져왔다. 응. 정은 언제나처럼 대답하였다.


“좋은 냄새가 나.”


여러 번 들은 적이 있는 말이다. 비밀도 아니었으므로 몸에 지니거나 방 안 곳곳에 두는 향낭이나 향로를 소개한 적도 있지만, 설은 조금 다르다며 고개를 저었다. 같이 살았다는 요괴와 하던 일일까 생각한 적도 있지만, 정은 설의 응석을 좋아하였으므로 상관하지 않았다. 


네게서도 나는걸, 좋은 냄새. 방 안에 남아있는 졸음이 달아나지 않도록 나직하게 속삭이자, 설이 의아하다는 듯 한숨을 흘렸다. 설이 뱉은 숨이 늘어뜨린 머리카락에 미열을 묻혔다. 으음, 그래? 그래. 냄새는 배니까. 그건 알지만, 몰랐어. 냄새가 밴다는 사실은 알지만, 냄새가 밴 줄은 미처 몰랐단 말이리라. 정은 목을 울려 웃었다.


“모를 수도 있지.”


다행히 설도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한다.


그러니까, 이런 것은 모르겠지.

너의 손끝에 일정한 맥박을 전하기 위해, 고르게 호흡하기 위해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곤 하는지.


산천의 꽃.

눈이 내린 정원의 풍경.

달빛,

바둑판 위의 격자,


흑과 백,

어느 돌의 사활死活…….


하지만 아름답고 고요한 것만을 떠올리려 할 때에도 정은 가끔 그 날이 아찔하였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던 상념이 흐르고 흘러 이따금 설을 잃어버릴 수 있었던 날에 다다르곤 하였다, 설에 대해 영영 알지 못한 채 떠나보냈을지도 모르는 날을.

고맙게도 설은 그 날에 살아남았으므로,

아무리 정이라도 그와 닿아있는 내내 한결같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닿은 자리를 통해 이미 무언가 들켜버린 것은 아닐까.

지금도 설에게 아주 얕은 수를 부리고 있을 뿐인 것은 아닐까.


정은 심박이 너무 빨라지기 전에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사용인들 사이에 도는 말에 대해 알고 있다. 객방 손님이 객방에 없는 날이면, 도련님의 방에 두 사람의 인영이 비치다가 그대로 불이 꺼지곤 한다는. 정이 크게 개의치 않는 것은 그 말에 왜곡이 없고, 그 일에 부끄러움이 없고,

곤경에 처한 자를 구명한 일은 세간의 미담美談이 되기 때문이다.


“설아.”


이번에는 설이 응, 하고 턱을 들어 올린다.

정은 정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몰랐으므로, 한 손으로 설의 눈 위를 지그시 덮었다. 몇 번인가 눈을 움직이는 작고 미약한 깜빡임이, 손바닥 안의 눈꺼풀에서부터 그대로 전해졌다.


“조금만 더 잘까?”


잃고 싶지 않은 마음.

조금만 더, 너와 이렇게 있었으면 하는 마음.

그것이 너무나 열렬한, 불꽃처럼 뜨겁게 타올라 한순간에 재가 되어버릴 마음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과 현실에 타협을 거듭하며 바라는 것 없이 살아온 정이 이렇게까지 정성을 들인 것은 없었다. 그 날로부터 지금까지 온 신경과 사고를 기울여 설의 생사에, 회복과 건강에, 그 이후의 안정에 아낌없이 마음을 쏟아왔다. 알아갈수록 명설이란 자는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정은 그 누구보다 설의 쾌유를 바랐지만, 한편으로는 설을 가까이에서 보살필 수 있는 명분이 끝나지 않기를 내심 바랐다.

하지만 설에게도 더 이상 정이 필요하지 않은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매인 것이 없는 그는 맨발로 저승의 문턱까지도 다녀왔으니,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하고 싶은 것을 찾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석별惜別의 날이 왔을 때 정은 어떤 표정을 짓게 될까.

마땅히 기뻐해야 할 일에 아쉬움을, 외로움을 느끼게 되진 않을까.


우리가 입맞출 수 있을까.

다른 누구와도 하지 않는 일을, 아니, 소문보다 더한 짓을 해버릴까.


이런 생각은 이상할까.

설아.


“좀 더 자자고 한 사람이 누구더라.”

“아하하. 그래.”


상념에 빠진 정을 붙잡는 설의 목소리가 다감하였다. 달도 진 새벽, 아직 동이 트지 않았지만, 그래서 방 안은 어두웠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너무 가까웠으므로 설도 정이 잠들지 않은 것만은 알고 있다.

당장 물을 수 없는 것에 골몰해봤자 번뇌만이 남을 것을 알았으므로, 정은 설의 손길에 순순히 눈꺼풀을 닫았다. 이윽고, 낮은 잠이 찾아왔다.






5, 8, 9, 10


하루는 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객방 손님께서는?” 문을 열어준 사용인에게 습관처럼 그의 안부부터 물었을 때, 조금 전에 정원에서 마주쳤더라는 답을 들었다. 정의 마음이 밝아졌다. “그런가요.” 웃으며 안으로 들어섰을 때, 백의白衣를 갖춰 입은 설이 시야에 들어왔다.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설은 정이 그 집에서 가장 사랑하는 정경情景 속에, 처음부터 속해있던 것처럼 녹아 있었다. “설아.” 불렀다.

설은 화종에 들어가려 한다 말했다. 설을 생각해 가져온 주전부리를 나누어 먹고 난 뒤였다. 그가 단 음식에 미소를 짓고 은은한 향기를 따라 코를 묻고 일자리를 구하여 현훈을 쫓으려 하는, 그런 몸짓 하나하나가, 그가 생生을 살아가고 있음을 의미했다. 곧장 이뤄질 일은 아니었지만 정은 그가 앞으로의 그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뭔가 지망志望하게 된 것이 무척이나 기특하였다. 마침 정이 하려는 일과 같기도 하였으므로, 함께 할 수 있는 시간도 조금 더 늘어나게 될 것이다. 정은 어깨에 기대어있는 설의 체중을 감당하며 정원을 바라보았다. 제철마다 향기와 녹음을 선사해온 나무들은 이미 앙상한 가지만 남았다. 잔디처럼 짧은 설의 머리카락을 칭찬처럼 쓰다듬었다.


설이 원했던 그대로, 하루는 그와 함께 금의문을 넘었다. 숙실宿室의 정리를 전부 마치고 숨을 돌리자니 설이 슬그머니 찾아왔다. 중간 방이면 옆방이네. 옆방이야. 정은 화종으로서의 첫 과업을 마치고 온 그에게 칭찬을 건넸다. 다른 사람들하고는 인사했어? 일단은. 정의 손길에 머리를 맡기고 있던 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은 여러 사람과 무리를 지어 지내는 생활이 설에게 처음임을 알고 있었다. 머뭇거리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쓰였으므로 무어라 조언을 건네려 입을 열었다. ……. 이상하게도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응? 정의 낌새를 알아챈 설이 무언無言에 되물었다. 아니. 정은 말을 아꼈다. 설을 겪어온 시간이 있었으므로, 잘 해내리란 믿음이 있었다.


하루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에 작은 위기를 맞았다. 혼절한 단원을 등에 업고 돌아온 설을 정은 차가운 머리로 맞이했다. 부상자의 용태를 살피는 것이 우선이었다. 빠르게 숲을 빠져나온 덕분인지, 다행히 창백했던 뺨에 서서히 혈색이 돌아오는 것이 육안으로도 보였다. 모든 일엔 차질이 따르기 마련이다. 임무의 성공 여부야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어떻게든 임무였던 썩은 나뭇가지까지 챙겨 나온 모양이었다. 산에 익숙한 설이 아니었다면 빈 손으로 돌아왔을지도, 그 정도 피해로 그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설이 너는, 괜찮아? 어떻게 된 거야.” 자초지종을 물은 것은 모든 상황이 종료되고 단둘이 된 뒤의 일이다. “이제 물어봐?” “다친 사람이 있었잖아. 그리고,” 정은 눈을 가늘게 떴다. “네 편을 들어줄 수 없으니까.” “날 믿는 줄 알았는데.” “믿지만. 공과 사는 구분해야지.” 말하고 보면, 정에게 설과의 관계는 너무나 개인적私的인 것이었다. 하다못해 통성명에서부터 같은 조직의 동료가 되기까지의 그 모든 순서가, 깊이가, 다른 이들과의 것과는 이례적이었다. 그래서 다른 단원들을 대할 때보다 오히려 냉정해지는지도 몰랐다.


하루는 설이 방에 건너와 술을 권했다. 이봐, 도련님. 나랑 한잔 할래? 정은 권주를 거절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머리를 늘어뜨린 채 그를 따라나섰다. 술 좋아해? 좋아. 좋아. 기분이 좋아져. 그가 취한 모습을 처음 보았으므로 정은 조금 놀랐지만, 그의 체온에는 면역이 있었다. 이보다 심한 술주정을 부리는 사람도 많이 알고 있다. 정은 그의 나이다운 웃음을 처음 보았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영내에서 만취는 금물이었으므로 돌아가는 길에는 산책을 권했다. 씩, 소리가 날 것처럼 설이 웃었다. 그의 미소 위로 달빛이 아름답게 떨어져 부서졌다. 무심코 손을 뻗었다. 왜? 웃음기가 남은 얼굴의 설이 얌전히 눈을 감으며 물었다. 무구無垢한 그의 물음에 정은 할 말을 송두리째 잃고 말았다. 싱겁기는, 말없이 손을 떼어내자 설이 웃음을 터뜨렸다.






6


“복잡하군,”


처음엔 그것이 바둑에 대한 감상인가 했다. 바둑판 위의 규칙은 고루하게 느껴질 정도로 단순하지만, 돌을 번갈아 놓아가며 바둑판 위를 점하는 과정에는 심오한 고찰 또한 필요하였다. 정이 좋아하는 놀이에 관심을 두는 것이 기꺼웠으므로 정은 설에게 흑돌을 쥐여 주었다. 차가운 촉감이 마음에 들었을지 설은 바둑돌을 몇 번이나 손으로 찰그락거렸다.


“우정이라기엔 애정이 있는데.”


애정이라,

그것은 언제나 정이 바라는 것이었다. 어쩌면 영영, 바라온 것이다.


사랑과 인정에 목말라 어쩔 줄 모르며, 그것을 한 몸에 독점하는 누이를 사랑하고 존경하며, 만족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괴롭히며 살아온 나날들이 쌓여 지금의 정을 이루고 있다. 정은 바둑판에서 눈을 떼고 잠시 설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한 말은 잊은 양 생각에 잠겨있다. 시치미를 떼는 것인지 정이 일러준 바둑의 규칙을 곱씹고 있는지는 모른다.


물론, 바둑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야기였다.


“우정友도 애정愛도 있다면 우애友愛라고 할 수 있겠지.”


정은 결국 누구나 할 수 있는 답을 내놓았지만, 애초 형태없는 관념에 이름을 붙이려 연연하는 것은 오로지 인간뿐이었다. 인간들은 많은 단어들을 한 단어와 다른 단어의 뜻글자를 더하는 방식으로 만들어내곤 하였다. “우애,” 중얼거린 설이 하하 웃음을 흘렸다.


“아쉽게도 정의할 순 없어.”


꽃,

눈 내린 정원의 고요한 정경, 달빛…….


정은 습관처럼 그런 것들을 떠올리고 말았다. 이윽고 바둑판의 일정한 격자와, 그 선들이 교차되는 점 위에 놓여있는 흑과 백의 둥근 돌들로 시선을 옮겼다. 설이 장난처럼 던진 수로 인해 위기를 맞은 백의 활로活路를 차분히 짚어나갔다.

설과 맞닿은 채가 아닌 것만이 다행이었다.






7


하루는 누이의 바둑 상대를 했다. 정은 언제나처럼 최선을 다해 대국에 임하고 불계패不計敗했다. “끝까지 둬 본 적은 없어?” 설이 물었으므로 정은 웃었다. 그에게 누이의 이야기를 할 때가 되었다. 물론 정은 평탄하고 유복한 삶을 살았으나, 설이 설의 깊은 이야기를 들려준 만큼 정도 비슷한 것이나마 돌려줄 필요가 있었다.


“뭐, 이 정원에 불을 지르고 싶은 날도 있었지.”


누이의 이름을 입에 올릴 때면 정은 늘 얼마나 누이가 대단한 인재이며, 그런 누이를 자신이 얼마나 경애하는지부터 말하곤 하였다. 그러나 설에게는 조금 다른 이야기도 털어놓았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건 정이 쉽게 입에 올리지 않는 어린 시절의 저의底意였다.


그 시절에는, 그런 짓을 저질러 경악의 눈길을 구할 수 있다면 그것이라도 간절하였다.

간절히, 외로웠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것 같네.”


설의 손가락이 손가락 사이의 약한 살점에 얽혀왔다. 한 번 불타 재가 되었다기엔 너무나 오래된 정원이었다. 정에게서 떼어낼 수 없는 것들로 하여금 정이 괴롭고 분하더라도, 그런 정을 정이 용서하지 못해 괴로웠던 시절에마저, 자라난 곳을 불태우고 속한 사람들을 미워할 수는 없었다. 정은 설을 향해 가늘게 미소하였다.


“맞아, 그렇게 하지 않았지.

그럴 수는 없더라고.”


누이와의 우애友愛란 그렇게 고역스러운 것이었다.






11


평온을 되찾은 새해, 그 날은 정이 설을 불러내었다. 별일이군, 네가 먼저 권하기도 하고. 그랬나. 오늘은 너와 마시고 싶어서. 환자로 대해온 기간이 길어서인지, 정은 설에게 권유받을 때가 아니면 술을 권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좋아. 이번엔 네가 취할 때까지 안 일어날 거니까. 흠. 그건 어려울 텐데.


“끝이 났네.”

“응, 드디어.”


짧다면 짧은 여정이 되었으나 그만큼 화종이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친 셈이다. 설이 앞으로 무엇을 하든 궁에서 일한 경력은 그에게 좋은 양분이 되어줄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일말의 명분마저 빛에 녹아 사라진 지금에도, 정은 설의 미래를 염려하였다.


“소감이 궁금한데.”

“소감?”


이번에야말로 설에게 물어야만 했다.

정 자신의 마음만은 이미 오래전부터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친구는 많이 사귀었는지,” 


그래도 나와 가장 가깝다고 말해주었으면 해.


“제일 좋았던 일과 제일 싫었던 일은 뭔지,”


말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

여전히 나를 가장 먼저 떠올려줬으면 해. 


“여기에 온 보람은 있었는지…….”


네가 조금은 머뭇거리고,

또 겁을 내고,

내가 곁에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해.


“어떤 것을 배우고 느꼈는지,

전부 듣고 싶어.”


그러기에 너무 현명하고 강인한 너란 것을 모르지 않지만,

아직 내가 필요하다고 거짓말을 해주었으면 해.


하지만 이제 남은 명분이 없다. 화종에서 생활하는 동안 잠시 미뤄두었던 석별의 시간만을 앞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 이 다음의 설이 뜻할 어떤 미래에 여전히 정이 곁에 있을지 알고 싶었다. 더 이상 꽃과 나무를, 정원을, 하얀 눈이나 달, 동그란 기석棋石의 삶과 죽음을 떠올려가며 태연을 가장하고 싶지 않았다. 정은 천천히 병을 기울여, 설의 술잔에 청주를 가득 채웠다.


“어때, 설아.”


설아,

내 마음은 가볍지 않아.


이런 나를 이해해 주겠지.

너를 볼 때면, 너의 앞이면 어쩐지 기울어버리고 마는 나의 저울 때문에 내가 너에게 조금 공정하지 못하더라도.


그 목숨을 구한 것이 나여서, 내 것이 되어달라고 할 수는 없지만.


너의 마음이 그때와 같다면,

네게, 우정으로도 우애로도 정의할 수 없는 애정이 있다면,


그것이 너무나 애절하고 열렬한, 불꽃처럼 뜨겁게 타올라 한순간에 재가 되어버릴 마음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연緣에 무어라 이름을 붙여 정의定義하고 싶다면.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져 온 단어 하나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아직도 네 목숨을 내게 주고 싶어?”


함께 살까.


영원히 살 수는 없겠지만, 살아지는 데까지 한 번 살아볼까.

그러다 같은 날 한 줌 재가 되어버릴까.


또 새로운 것을 할까.

네게 살아갈 이유가 필요하다면, 함께 찾아볼까.


다른 연인들이 그렇게 하듯이,

연애戀愛를 할까.  ■








Light will guide you home


190325

고록. 여담이지만 이 로그는 쓰고 보니 공미포 N599자가 나와서 그 이상 퇴고를 하지 않았다.

<우애, 정(#)>에서 이어지는 로그라 운율을 맞추고 싶어 만 이틀을 고민했다.

어쨌든 둘이 사귄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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