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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의 애매한 서화

편린片鱗






"어릴 적 꿈을 꿨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청라와 편히 이야기를 나누게 된 건 아주 최근부터의 일이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사실 모두 정의 잘못이었다. 발걸음이 유독 가뿐해 보이는 모습에 안부를 묻자, 벽옥碧玉같은 눈동자가 정을 돌아보았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엷게 웃었다.


"어릴 적?"

"응. 정이 너도 나왔어."

"그런,"


정으로 말할 것 같으면, 유년幼年이 그리웠던 적은 없다. 세월이 흐른 탓으로 아련하게 느껴지는 순간들은 있으나, 인간은 느리게 자라므로, 그 시절의 정은 지금보다 어리고 아둔하였다. 할 수 없는 일이기에 굳이 원하지 않지만, 불에 태워 회비연멸灰飛煙滅할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해도 좋을 시절이다. 그것의 잔재에서는, 분명 지독한 풀내음이 연기처럼 피어오를 것이다. 생각해보면, 정에게 그 시절의 좋았던 기억이라곤 청라와의 것뿐일지도 몰랐다.

아니, 너무 지나친 생각이다. 정은 상념을 그만두기로 했다. 


"나를 그렇게 생각해줄 줄이야."


낮게 웃으며 농담을 던진다.

청라의 꿈속에서 어린 날의 정이 무엇을 하고 있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꿈 덕분에 아침에 눈을 뜨면서 기분이 좋았다면 아무래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옛 친우를 만나는 꿈에는 뜻밖의 좋은 소식을 듣게 된다는 해몽이 있다. 정이 얼마나 그에게 좋은 벗이었는지와는 별개로, 정은 그의 어린 시절을 아는 몇 안 되는 고교故交였다. 해몽이란 일단 붙인 뒤에 우기는 것이니, 모쪼록 그 꿈이 청라에게 길조吉兆가 되기를 바랐다. 






편린片鱗 

2






정의 손은 거스러미 하나 없이 단정하였으나 대체로 딱딱하였다. 나서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으나, 단단한 물건을 쥐기 시작하고부터 부드러웠던 손 곳곳이 버릇처럼 눌려 못이 박혔다. 금琴을 연습하면서 생긴 손끝의 것은 없어지기도 했지만, 검을 잡는 자리만은 물러질 틈이 없었다. 전쟁만 빼고 모든 것을 하는 것이 평화로운 시대의 군사들이었으므로, 도끼를 쥐는 것도 정에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소나무는 질감이 검소하고 단단한 목재였기에 나무의 질에 따라 가구의 재료로도 땔감으로도 흔히 쓰였다. 그렇다곤 하나 기껏 장인의 손을 거쳐 세공된 다음 쓰이지도 못한 채 장작이 되다니 멀리도 돌아왔다. 조사를 위한 매입이 있었던 터라 처리해야 할 가구의 양은 상당하였다.

입단에 각오를 다진 시점에서 자초自招한 고생이었으므로 정은 수 시간의 막일에도 묵묵하였으나, 근처에서는 종종 친우의 앓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인간이 하는 일은 요괴도 할 수 있다지만, 인간에 비해 상대적으로 신체능력이 떨어지는 요괴에게 평등한 분장分掌이었을까 정은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인간의 편견에 기인한 생각임을 알기에 내색없이 이따금 곁눈질을 했을 뿐이다. 다행히 청라는 장작 패기에도 현훈 퇴치에도 요령이 있었고, 잠시 방심하여 보인 틈에는, 마침 정이 끼어들 수 있었다. 


양단兩斷한 현훈은 연기가 되어 사라지며 마치 한 줄기 단말마의 비명처럼, 강렬한 빛을 발하였다. 

눈이 시려오는 이례적인 광량에 정의 홍채가 한계까지 이완한다.


ㅡ내가 유배를 오고 나를 찾아온 이는 휘 뿐이었다.


어째서인지, 정은 가 본 적도 없는 허름한 초가에 객客이 들었음을 알게 되고 만다.






* * *






"맞다. 내 전에 들은 얘기가 있는데."


청라가 수라간에서 한입거리를 조금 얻어왔다. 나인들하고 친해졌거든. 그의 근본은 사교의 음료를 담는 자기瓷器였으므로 뛰어난 친화력은 요력만큼이나 자연自然한 것일지도 모른다. 술은 없었다. 술잔 요괴와 막역한 사이라면 단연 그와 마신 술의 양도 상당해야 할 것 같지만, 정의 주도酒度는 절제를 바탕으로 했다. 청라가 과음하지 않기도 했다. 그와는 술은커녕 함께 식사를 했던 일도 손에 꼽을 만큼 적다. 오랫동안 비밀처럼 만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이유로, 정은 청라가 정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대하는지 화종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붙임성이 좋은 그는 사람들과 빠르게 친해지며 넉살을 부리곤 했고, 그래서인지, 굳이 다시 친해질 필요가 없는 정과는 종종 소원하게까지 보였다. 하지만 그와는 해가 바뀌면 20년 지기가 된다. 스무 해. 남들이 보기에 두 사람이 어떠하든, 연연할 이유가 될 수 없을만큼 세월이 흘렀다. 정은 그 대신 청라의 보다 편안하고 안정된 일면들을 알고 있었다.


"스무 번째 개국공신 이야기 말이야."

"으음."


마침 그 숫자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대륙에 혜국의 이름을 세울 때에 열아홉 명의 공신이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이야기는 이제 전설傳說에 가까워진 역사였다. 반면에, 공을 인정받지 못한 스무 번째 개국공신이 원귀가 되어 이승을 떠돈다는 이야기는, 야사野史조차 되지 못하였다. 어린 궁인의 처신을 단속할 때에나 입에 올리는 괴담이었다.


"그 이야기는 갑자기 왜?"

"요새 단순한 괴담이 아니라는 소문이 돈다더라고."


청라가 목소리를 한껏 낮추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정은 처음에 웃었다. 어떤 괴담이 단순한 이야깃거리가 아니란 말은, 떠도는 모든 괴담에 붙일 수 있다. 술잔이기 때문일까, 소문과 이야기에 밝은 청라는 최근 수라간 나인들에게서 들었다는 따끈따끈한 소문을 정에게도 들려주었다. 


"현훈을?"

"이런 이야긴 너무 흔한가 싶지만, 현훈이라 하니까. 현훈이 요새 난리이긴 한가보다 싶더라고."

"이런 이야기?"

"원한 서린 귀신 이야기."


"하긴……."


원귀冤鬼의 탓으로 돌려버리면 편리해지는 문제들은 분명히 있다.


정은 문득 평북으로의 원정遠征을 떠올렸다. 유배지라 불린 지역의 조사만은 어명御命이 있었다며 단장이 직접 지휘하였던 일에, 정은 내심 유의하고 있었다. 조사에 가시적인 성과는 없었다고 하나 그 곳에 대해 역모를 꾀한 개국공신이 귀양을 살았던 곳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었지만. 


그 이야기는, 헛소문이었던가?






* * *






<내가 유배를 오고 나를 찾아온 이는 휘 뿐이었다.>

<그가 나에게 "나 말고도 오고 싶어 하는 자들이 있었으나 눈치를 보느라 차마 오지 못하였다"고 말을 하기에 나는 그저 웃었다.>

<그는 우리 집 대문 앞에 서 있는 포졸을 힐끗 보더니 적어도 돌아다니는 것은 편하도록 해보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믿지는 않았지만, 사사건건 내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던 포졸은 며칠 후부터 보이지 않았다.>


눈앞이 빛의 잔상으로 가물거렸다. 빛과 함께 뇌리에 스며들어온 편린의 기억을, 정이 전부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의 기억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까마득한 세월에도 엷어지지 못한 채 사무치는 감정들이 정에게 한 조각의 쓸쓸함을 주었다. 하지만 그마저 정의 것이 아니었다. 덧없게도. 정은 부서져 반짝이는 누군가의 감각을 꺼내 들었던 검과 함께 납納하였다. 정은 제 것이 아닌 것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으므로 그 검에도 이름은 없었다.


"청라야."


이름을 부르며 돌아보면, 청라는 머리카락 한 올도 상하지 않은 채 온전하였다.


정은 굳이 다치지 않았느냐고 묻지 않았다. 상황이 완전히 끝나기 전에 함부로 상대에게서 눈을 떼어서는 안 된다는 군소리도 지금은 의미가 없었다. 정은 우두커니 자신을 바라보는 친우를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코끝이 매웠다.


"너도 보았니?"


한恨서린 빛 속에서,

어쩌면 스무 번째 개국공신일지 모르는 누군가를.  ■








편린(片鱗) [명사]

한 조각의 비늘이라는 뜻으로, 사물의 극히 작은 한 부분을 이르는 말.


190306

마지막 미션로그. 이 즈음에 너무 아파서... 개근에 의의를(그러나 지각함)

청라와의 친분을 자랑할 자리가 많지 않아 아쉬움이 많은데 미션이라도 같이 해서 다행인듯

제목은 <파편(#)>에서 이어지는 로그라 감안하여 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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