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명共鳴
2
정식 입단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개인 집무실에서 시간을 보내다 식사 시간에 맞춰 나온 정은, 바깥 공기에 잠시 움츠렸다가 등을 바르게 폈다. 겨울 특유의 쌀쌀함이 공기 중에 감돌고 있었으나, 자세를 고치고 보니 볕이 드는 날이라 썩 포근한 날이었다. 새삼스럽다. 그대로 희멀건 겨울 하늘을 올려다보던 정은 문득 별난 것을 발견하였다. 집무실의 지붕 끝에 못 보던 처마 장식이 삐죽이 솟아있었다. 그렇게 사실적이고ㅡ심지어 금방이라도 쫑긋, 움직일 듯 생생한ㅡ처마 장식은 본 적이 없으므로 정은 잠시 응시하고 말았다. 이내, 그것이 동료 단원 중 하나의 인영임을 깨달았다. 성은 없고, 이름은,
"요하!"
생각보다 큰 소리로 부르게 된 것은 앗, 하는 사이 그의 균형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ㅡㅡ부웅,
찰나, 주변의 공기가 느리게 흐른다.
요하는 정의 목소리로 한 발 늦게 상황을 파악한 듯했다. 그러나 별안간의 낙하에도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을 뿐이다, 글자 그대로 놀란 토끼처럼. 그의 몸은 마치 흩날리는 꽃잎처럼 둥실 바람을 타고 정의 팔 안에 내려앉는다. 상냥한 바람이 정의 피부에도 휘감기듯 불었다가 없던 일처럼 흩어진다. 장성한 사람을 받아든 반동으로 정은 한 발짝 뒤로 밀려나며 바닥을 디뎠다. 감수減壽하는 줄 알았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요하가 아니라 정 말이다.
애초 지붕 위에 올라갈 수 있다면 내려올 수도 있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소리로만 알려주어도 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에 미쳐 무안한 마음이 들 즈음, 요하가 먼저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건네주었다. 이제 내려달란 뜻임을 알았으므로 정은 정중히 그의 양발이 땅에 닿도록 내려놓았다.
"다치지는 않으셨습니까?"
"덕분에요. 감사합니다, 한 공."
"아뇨. 하지만 다행입니다."
정은 요하를 받아들 때 피부에 닿던 인위적인 공기의 흐름을 떠올렸다. 아니었다면 요하도 정도 부상을 입을 수 있었다. 그가 정말로 다치지 않았는지 아래위로 살펴본 뒤에야, 정은 가장 얼굴에 익은 표정ㅡ미소를 지어 가까스로 안색을 가다듬었다.
"방금의 것은 요력입니까? 저도 덕분에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네, 가까운 곳에서만 할 수 있지만요……."
요하는 겸양을 꾀한 듯 했지만, 정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의 웃음은 우러나오는 것이었다.
"아하하, 뭇 인간들은 눈앞의 것도 하나 다룰 수 없답니다."
오랜 지기知己는 어릴 때부터 빈 손 위에 흙구슬을 뭉칠 줄 알았다. 시간이 흐르고 활용이 능란能爛해지며 차차 구球의 수가 많아지거나 지름이 커지기도 하고, 막대, 몽둥이, 정의 무릎까지 오는 크기의 토용土俑으로도 발전하였다.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정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정이 두 발로 걷거나 손가락 끝을 써서 책장을 넘기는 것처럼 당연해보였으므로, 정이 할 수 없는 일이리라 짐작하였을 뿐이다.
자연自然에서부터 비롯되어 태어나는 것들이 그들의 바탕인 그것을 힘으로서 다루는 모습은 언제든 경이로웠다. 정은 그들의 묘한 힘을 요력妖力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은 분명 인간이리라 생각해 왔다. 그 힘으로 문제의 현훈玄熏을 퇴치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아주 최근에나 알게 되었다.
"활을 맨 모습을 보았었는데, 공기의 흐름을 잘 아실 테니 도움이 되겠습니다."
"네. 잘 쏘진 못해도요. 하지만 사람은 잘 찾을 수 있어요!"
"아하," 요하의 귀가 쫑긋거리는 모양에서 정은 강하게 설득되었다ㅡ아마, 소리는 공기를 통해 전해지는 것이고 청력이 뛰어날 요하이니 더욱 그 능력과의 상성이 좋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군요. 아주 탁월한 응용입니다."
가진 재능을 잘 활용하기 위해 요하 본인이 궁리하고 연구한 시간도 있을 것이다. 요하와 조금 더 가까운 사이였다면 귀 사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칭찬할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례가 될 수 있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대신, 정은 가벼운 당부를 붙였다.
"사색도 좋지만, 너무 깊이 골몰하면 당장의 발밑을 볼 수 없게 된답니다."
"조심하겠습니다."
……. 당신이니 괜찮을 것 같지만, 사정을 모르고 보는 입장에서는 간담이 다 서늘했으니까요. 간담肝膽까지요? 아하하, 농담입니다. 그러나 토끼 요괴에게 간 운운하는 농담은 적절하지 않았을지도, 정은 생각했다. 저, 식사는 하셨어요? 아, 마침 지금 먹으러 가던 길입니다. 식전이시면 같이 가시죠. 같이 가요! 두 사람은 수라간까지 함께 걸었다.
* * *
"이렇게 하면?"
"음, 이건……."
"앗, 악수였나요?"
"하하, 설마 상대의 훈수를 원하는 건가요."
"아뇨! 제가 생각할 테니까요."
"……."
요하의 또 다른 재주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뒤의 일이다. 그는 그를 길러준 노인의 바둑 상대를 해 왔다고 들었다. 그리고, 정이 주안상보다 사이에 두길 반기는 상은 바둑판棋盤 하나뿐이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술을 마신 지는 이제 겨우 10년 남짓이지만 바둑은 재미를 배우고부터 평생 정의 오락이었다. 덤을 받지 않고 두는 접바둑이었고, 모쪼록 놀이였으므로, 승패에 연연할 필요는 없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복기를 생략하기로 하고 바둑판을 비운다. 흑돌을 골라 집고 있던 그가 흥이 났는지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하였다. 대국이 즐거웠다면 좋은 일이다. 정은 그것을 웃으며 들어 넘기다가, 아, 하고 작게 탄성을 뱉었다. 머릿속에서 무심코 그의 콧노래에 노랫말을 붙이고 있었다,
비바람이 없어도 봄은 오고 여름은 가고,
눈물이 없어도 꽃은 피고 낙엽은 지네…….
ㅡ음률에 꼭 들어맞는 것으로.
뒤늦게 좋아하는 노래임을 깨닫고, 반가운 마음에 정은 미소했다.
"아, 이 노래. 노랫말이 근사하여 저도 좋아합니다."
"정말요? 꽤 옛날부터 알고 있었는데, 가사가 있는 줄은 몰랐어요!"
감탄하는 요하의 눈이 동그랗게 부풀었다, 흡사 토끼처럼. 그 얼굴은 언젠가 이미 본 적이 있다.
아니, 그때와는 조금 다른가.
"조금 불러볼까요."
정은 눈을 가늘게 하며 웃고는, 큼, 하고 잠시 목을 가다듬었다.
숨 한 모금을 깊이 들이쉬었다가,
토해내었다. ■
공명(共鳴) [명사]
1. 남의 사상이나 감정, 행동 따위에 공감하여 자기도 그와 같이 따르려 함.
2. <물리> 진동하는 계의 진폭이 급격하게 늘어남. 또는 그런 현상.
3. <물리> 양자 역학에서 입자의 충돌로 생기는 에너지의 총량이 복합 입자의 에너지 준위와 일치하는 곳에서
단면적 에너지의 극대가 나타나거나 새로운 복합 입자가 생김. 또는 그런 현상.
4. <화학> 어떤 화학 결합이나 분자의 결합 구조가 두 가지 이상의 구조식으로 혼합되어 있는 현상.
190223
왕게임 벌칙로그(※대금 연주에 맞춰 노래하기) 겸 요하 관록.
노래 가사는 이선희 선생님의 <추억의 책장을 넘기면>에서 일부분을 차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