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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의 애매한 서화

사후의 일






6.


후임은 일사천리로 빠르게 구해졌다. 복귀는 어렵겠구나 생각하였을 만큼, 정도 오래 신임하였던 낭장郎將이었다. 돌아올 날을 기약할 수 없는 점을 생각하면 영領을 위해서도 다행인 인선人選이었다. 그에게 업무를 인계하면서 새삼, 정은 이렇게 많은 일을 하고 있었나 생각하였다. 효율적으로 일하고 시간을 쪼개어 쓰는 요령이 없었다면 감당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정 안에서 일상의 관례慣例로 굳어진 일들을 풀어 하나하나 설명하는 일은 그 일을 해 온 매일 매일보다 훨씬 어려웠다.


누이였다면 이런 일도 유려한 언변으로 하여금 잘해냈을까.

무의미한 상념이었다.

 

“퇴청하셨습니까, 도련님."

 

정은 대문을 열어주러 나온 사용인에게 희미하게 미소를 건넸다. 

 

"객방 손님께서는?"

"방에 계십니다. 두 시진 전에 의원이 다녀갔는데, 선생 말로는 예후가 좋다고 하네요. 이제 왕진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그렇다니 다행이군요. 그간 수고해주신 덕분입니다."

 

정은 결코 칭찬에 인색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상대가 사용인이라고 해서 달라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직접 일거리를 안겨 준 사람으로서 그의 노고에 감사를 건네는 것은 당연한 예였다. 

이 경우엔 데리고 온, 이라고 해야 할까.


"다행이다마다요. 처음 데리고 오셨을 때만 해도, 어휴, 말도 마십쇼. 시체 한 구 치우게 될 줄 알았잖아요."

"……."


사용인의 너스레에 정은 고개를 돌려 잠시 그를 돌아보았다. 그 나름의 농담이었겠지만 영 재미가 없는 말이었다. 그는 그가 무슨 말을 한지도 모른 듯하다가, 정의 시선에 당황하며 뒤늦게 손을 내저었다.


"저는 그저, 도련님께서 객방 분과는 마음 터놓고 지내시는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말씀 올린다는 게 그만……. 죄송합니다." 


그런가, 싶었으나 틀린 말도 아니었다.

정은 괜한 소리를 얹는 대신 미소로 답했다. 문득 그가 말한 ‘처음’을 떠올렸다.


"그럼, 다과는 여느 때처럼 부탁합니다."

"네, 도련님."






사후의 일

后事


2






1.


간밤 찬비가 내려 땅이 젖은 날이었다. 정은 부하 몇몇과 격려회를 가지러 나와 있었다. 말이야 격려회니 위로회니 거창하였지만 빈번하게 있는 식사 자리였고, 일의 연장이기에 정은 입술이나 조금 축일 생각이었다. 포만감을 좋아하지 않는 정이었으나 부하들은 든든히 먹이는 것이 좋았으므로 장소로는 시장 외곽에 있는 목롯집을 골랐다. 날도 쌀쌀하니 다 같이 국수나 한 그릇씩 하며 으슬으슬한 몸을 덥히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한가한 전술을 생각하며 시장길을 걷고 있을 때, 정은 작지 않은 웅성거림과 조우했다. 정이 소리를 따라 몸을 돌리자 일행들의 고개가 한 방향으로 돌아갔다.


시선의 끝에, 한 인영人影이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다.

두 발로 걸었으나, 인간도 요괴도 아닌 이질적인 존재로 보였다. 넝마를 걸친 얼굴에는 생기가 없었다. 주변을 의식하거나 소리를 듣지 않고, 질질 발이 끌리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걸어야겠단 의지만이 그를 움직이게 하는 듯했다. 한 손에 꽉 움켜쥐고 있는 것은 젖고 혼탁해져 색을 분별하기 어려웠으나, 분명 사람이 입는 옷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어렵게 다시 한 걸음, 그의 걸음은 점점 느려지고 어려워졌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그가 위태롭게 걸음을 디딜 때마다 길이 넓게 트였다. 누구도 그에게 말을 걸거나 그를 멈춰 세우려 하지 않았으나, 아무도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쿵, 그의 몸이 크게 기울어졌다. 그는 무릎을 꺾으며 무너졌다. 으아앙……. 으아앙……. 끔찍한 악몽에 홀려있다 깬 것처럼, 어린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섣불리 나서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유를 정은 이해한다. 부쩍 불온한 요즘, 출신도 무엇도 불분명한 낯선 이에게 내놓을 수 있는 것에는 친절에도 호기심에도 한계가 있다. 달리 나서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정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쓰러진 이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다가가 한쪽 무릎을 땅에 댄다. 정은, 잘 하지 않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미간을 한껏 찡그리고 말았다. 시큼한 악취가 코를 찌를 듯 풍겨왔지만, 그 때문이 아니다. 그가 맨발이었기 때문이다.


이 발로 얼마나 걸은 것일까. 

흙, 산과 들, 풀과 모래, 잔 나뭇가지나 땅에 구르던 돌멩이, 낙엽, 빗물과 강물, 피와 먼지, 땀과 고름, 길과 길이 아닌 곳, 어쩌면, 사활死活의 경계……. 이승 땅의 모든 것을 밟고 넘어온 듯한 발에는 언뜻 새로운 상처가 벌어져 비쳤다. 발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비가 그친 지 오래건만 그는 땀인지 비인지 모를 것으로 축축하고 뜨거웠다. 다치고 병든 짐승이 앓는 듯한 숨소리에서 그의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윤리倫理를 아는 자라면 누구라도 얼굴을 찌푸렸을 것이다.

그만큼 참담한 몰골이었다.


"중랑장님."


곤경에 빠진 이가 도움을 청하듯, 등 뒤에서 부하가 불렀다.


"중랑장님?"


그 자리의 그 인파 속에서, 가장 시혜施惠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정은 알고 있다. 주변에 맞는 결정을 내릴 뿐이다.


"살아있습니다. 가까운 의원에게 데려가도록 하죠." 


굽혔던 몸을 일으키며, 정은 지시를 기다리는 부하들에게 가볍게 턱짓을 했다.






2.


그는 열에 들끓으며 며칠을 앓았다. 며칠을 먹지도 자지도 않은 채 뛰고 걸었을 것이라니 새삼 인간의 숨통이 생각보다 질긴 것임을 배운다. 애초 어디에서부터 멈추지 않고 걸어와야 이렇게까지 사람이 상할 수 있는 것일까. 정은 그저 의원을 붙이고, 잔정이 많은 사용인에게 간병을 전담시켰다. 정은 매일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객방 손님’의 안부를 묻게 되었다. 집에 들인 시점에서 그는 정의 손님이고 책임이었다. 정은 일과 중에도 종종 그가 깨어나 회복한다면 무엇이 필요할지 신경을 쏟았다. 가장 먼저, 사슴 가죽으로 된 가죽신을 한 켤레 염두에 두었다. 옷도 한 벌 내어줄 필요가 있었다.


그가 눈을 뜬 날에는 차마 말을 붙일 상태가 아니었다. 정은 다음 날 다시 그를 찾아갔다. 그는 여전히 수척해 보였지만, 사람들이 뒷걸음질 치고 아이가 놀라 울음을 터뜨릴 꼴은 어떻게든 면하였다.


"지니고 계시던 도포가 사라졌다고 들었습니다. 살피지 못한 저의 불찰이 무엇보다 큽니다."


수도의 분위기를 흉흉하게 하던 검은 연기에 현훈玄薰이란 이름이 붙었다. 이름에는 힘이 있다. 그 존재와 영향을 위에서 인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정은 현훈이란 것의 실체를 본 적이 없었으나, 그것이 어느새 정의 집안까지 들어왔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떨떠름한 기분이 들었다. 나고 자란 집은 늘 안전한 곳이어야 했다. 하지만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기에 누구도 탓할 수 없었다.


"현훈의 짓이라 하던데, 그게 왜 당신의 잘못입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당신에게 사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중요한 물건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유감입니다."


사연이 있는 도포일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물건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비틀거리며 걷다가 쓰러질 때까지 손에서 놓지 못할 리 없었으니까. 애초 비가 내렸던 날임에도 그것을 입거나 둘러쓰지 않았던 이유도 있을 것이다.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이겠으나 자세한 사연은 묻지 않았다. 그 누구의 삶도 호기심과 흥미의 먹이가 되어서는 안 되었다. 그는 아직 지쳐있었고 당한 일에 대해 스스로 수습할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정은 그저, 이곳은 손님을 위해 비워둔 객방이니 있고 싶은 만큼 머무를 수 있으며, 자유롭게 집 밖을 드나들어도 좋지만, 아직 치료를 받으며 며칠 요양해야 하는 상태이니 서두르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차분히 권하였다. 다른 것은 그를 맡긴 사용인이 이미 말해두었을 것이다. 손님은 잠잠히 정의 설명을 듣고 있다가 반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성정이 침착해서인지 몸을 움직일 기력이 없어서인지는 몰랐다.


"신세를 졌습니다. 집……주인."


정은 난감한 웃음을 띠었다. 지금껏 당신, 당신 하던 그가 정을 어떻게 인식하였든, 정은 그 집의 주인이 아니었다. 가주인 어머니와 소가주인 누이의 훌륭한 인품과 별개로 그들의 귀에 이러한 말이 들어가게 할 수는 없었다. 정은 부드럽게 바로잡았다.


"집의 주인은 제가 아니라 제 어머님이십니다."


어머님께는 제가 말씀드려 두었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설명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정을 두고 ‘집주인 아들’ 따위로 부를 수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정이 말했다.


"이름으로 부르시죠, 제 손님이시니." 


말하고 보니, 통성명이 아직이었다.


"저는 정이라고 합니다, 한 정."


소속과 직위 없이 자신을 소개한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런 정을 가만히 올려다보던 그가 마른 입술을 무어라 달싹여보더니, 곧 정중하게 감사를 전해왔다.


“명 설입니다. 감사합니다.”


명설, 입안에 담아본 뒤에야 설도 정의 이름을 그렇게 했음을 알았다.

정은 방 안의 경계심이 조금 잦아든 것을 느꼈다.






3.


어머니와 아버지, 누이의 순서로 집안의 어른들에 문안을 드린 뒤, 정은 마지막 순서로 정원을 가로질러 객방으로 향했다. 정이 하루를 마감하고 집에 돌아와 답습踏襲하는 관례에 새로운 지점이 생긴 셈이다. 그 방에는, 최근 들이게 된 정의 손님이 있다.


"다녀왔어요, 설."


귀가를 고하는 것으로, 정은 오늘의 피로를 조금 덜어낸다.






4.


달이 밝은 밤이었다.

저녁이라기엔 너무 늦고 새벽이라기엔 너무 이른 시간, 낭비를 꺼리는 가주의 영향으로 집 안은 일찍이 모두가 잠든 양 고요하였다. 정 역시 침의寢衣로 갈아입은 지 오래였으나, 사색이 해보다 길어지는 날이면 도통 몸을 눕히지 못했다. 어린 시절부터의 악습이었다. 하지만 정은 이제 일부러 잠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빈 바둑판 위에 달빛이 떨어지도록 창을 활짝 열어둔 채, 정은 현훈玄薰 현상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다과나 식사를 함께하게 된 설의 분실물에 책임을 통감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다만 그러한 현훈 피해가 빈번해짐에 따라 대응을 전담하기 위한 수사 조직이 꾸려지고 있다. 오늘 정은 상관에게 넌지시 뜻을 밝혀두었다. 재고할 시간을 가지라며 하루 휴가休暇를 받았으나, 정은 그 조직에 입단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변화에는 득도 실도 있을 것이었으나 이현상李鉉相의 실체를 모르는 판국이었으므로 치밀하게 헤아릴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유서 깊은 평화는 무관들을 안일하게 하였다. 미지未知는 언제나 두려운 것이었으나, 정이 이미 아는 길에는 언제나 누군가의 등이 있었다. 평탄하게 닦인 길임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나, 정은 그것이 오래도록 지겨웠다. 예기하기 어려운 변화에 몸 던지길 원한다면 이번이 기회라고 판단한 것이다. 다만 무언가를 재고한다면 충분한 각오가 되었는지, 어떤 각오가 필요한지, 그곳에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감내할 수 있을지……. ……. 바둑판의 격자를 바라보며 오래도록 자문自問하던 정은, 문득 인기척을 느꼈다. 손님이었다.


"설?"


정은 설을 바라보았다. 

달빛을 등진 그의 눈에서 언뜻 윤기가 번들거렸다. 


"하하,"


설이 멋쩍은 듯 웃었다. 정이 내어 주었던 가죽신을 신고 두 발로 선 모습이 여느 때보다 조금 더 멀쑥해 보였다. 그러나 여느 때란 대체 언제를 말하는가. 워낙 예외적인 시기와 장소에서 만났으므로 그때로부터 지금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설에게 있어 평상시였던 날은 없었을지 모른다.

설이 어디로부터 비롯되어 어디에서 온 누구인지, 어째서 엉망이 된 몸으로 탈진할 때까지 거리를 헤매고 있었는지, 정은 아는 바가 없다. 이름 외에 정이 아는 것은, 그가 날선 인상과는 달리 단 음식을 좋아한다는 것, 마른 웃음을 습관처럼 뱉는다는 것, 동요가 적은 사람인 것, 당연하게 통용되어 온 것을 모르면서 아무도 모를 것만 같은 일에는 통달했다는 것, 그런, 눈길을 두고 정성을 기울이며 시간을 공유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뿐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왔는데."

"……."


어쩌면 그렇기에 더욱, 설의 모든 면모와 말과 행동이 괴상하거나 기이하거나 잘못되지 않은, 설다운 무언가로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어서 와요."


그랬으므로, 정은 심야의 손님을 쉽게 맞아들였다.

마침 단맛이 도는 찻잎이 방에 있었다.






5.


깊은 이야기에 밤도 어느덧 칠흑처럼 깊어졌다. 말로 풀어 설명하기 쉽지 않았을 그의 지난 삶을 천천히 털어놓느라, 설은 다소 탈력한 듯 보였다. 달짝지근한 차로 달래던 체온도 차츰 떨어지기 시작했으므로, 정은 설을 그대로 재우기로 했다. 잠들 준비는 해두었으므로 잠시 밝혀 두었던 등잔의 불빛을 끄고 잠들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는 동안 설이 스스럼없이 몸을 뉘였으므로 정도 그렇게 했다. 그리 많은 말을 하지 않은 정도 아득한 피로를 느꼈다. 두 사람은 금세 잠결에 젖었다.


―고마워, 라고 설은 말했었다.

그것은 신세를 졌다는 말이나 일전에 들었던 감사 인사와는 조금 다른 울림이었다. 정은 그와의 관계가 전의 것과 영영 달라졌음을 느꼈다. 저녁으로 돌아가 다시 찻잎을 우려냈을 때 똑같은 대화를 나누고 지금에 다다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을 만큼.

정은 설이 정의 눈앞에서 사경死境을 헤맸던 사실이 새삼 아연하게 느껴졌다.


"설아."

"음?"

"나도 고마워. 이 말을 하지 않은 것 같아서."

"하하, 뭐가?"


제 것을 잃거나 홀로 된 경험이 없으므로, 설의 뱃속을 함부로 상상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정은 자연의 순리에는 필멸必滅이 빠질 수 없음을 때가 되면 지는 꽃을 통해, 바둑판 위의 냉정한 규칙들을 통해 배워왔다. 그 날에 그가 쓰러진 그대로 사석死石이 되었다면, 그에 대해 알 일 없이 부하들에게 시신을 수습하도록 했을 것이다.

지금의 정이라면 그렇게 둘 수 없었을 일이다.


"글쎄……."


정은 나직하게 답하며 도로 눈을 감았다. 몸을 가볍게 뒤척이려는 순간 한 손을 붙잡혔다. 정이 어디에 가지 않았는지 손을 뻗어 확인한 것 같았다. 기분 탓이었을 것이나, 정은 그 손가락이 정의 손목에서 맥이 뛰는 자리를 찾으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이 새로이 알게 될 설의 잠버릇이나 습관인지는 몰라도, 정은 그것으로 그가 안심한다면 내버려두기로 했다. 이만 자자, 속삭였다.


내일부터는 또 긴 하루를 보낼 것이다.






7.


설의 당락當落만은 마지막까지 정의 걱정거리였다.

신분과 지위를 막론하고 18세 이상의 신체 건강한 혜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지원할 수 있는 곳이라곤 하였으나 그 ‘건강’이 정의 마음에 걸렸다. 의원이 왕진을 멈추고도 한참 동안, 정은 설이 너무 마르거나 쇠약해 보이지 않을까 갖은 것을 구해 먹였다. 설은 이만하면 됐다고 했지만,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풍기는 백숙 앞에서 사양을 하지는 않았다. 정은 설이 서툴러 하는 입단 신청 절차들을 조금 거들었을 뿐이다. 왕궁의 심사를 거쳐 화종의 단원으로 발탁된 것은 설 본인만의 힘이었다. 잘 됐다. 정은 진심으로 기쁨을 전했다.


"정아."


불러 세우는 목소리에 잠시 돌아보면, 설은 발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망설임이 무안했는지 슬쩍 웃어버리고 마는 그를 향해 잠시 웃어 보인 정은, 응원의 말 대신 설을 가볍게 등졌다. 이제 가야 한다고도, 꼭 가지 않아도 괜찮다고도, 정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설이 준비되었음을 알고 있기에 정은 다시 발걸음을 떼었다.


"같이 가."


듣기 좋은 울림이 귓가에 따라들었다.

정은 어쩌면 설과 대척점을 이루는 정반대의 삶에서부터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두 사람은 우연히 마주쳐 접점을 가졌으며, 지금은 같은 뜻을 가지고 한 조직에 몸을 담게 되었다. 각자 원하는 것을 찾게 될지는 아직 내다 볼 수 없었으나, 계속 동행할 것이다. 실제로 겪기 전까지는 감히 상상할 수 없을 기연奇緣에 정은 새삼, 감상적인 기분이 들었다.


"필요한 일 있으면 언제든 불러주기야."

"알았어. 일없어도 부르고 찾아가고 할 테니까."

"아하하, 그럼."


부디, 어느 때의 어느 곳에서든.

네가 필요로 할 때에, 내가 그 자리에 있을 수 있기를.  ■








后事 [hòushì] 

1. [명사] 뒷일.

2. [명사] 죽은 뒤의 일. 사후의 뒤처리.


190207

설줍로그라고 부르며 작업했던 설이 관록.

<사흘 밤의 죽음(#)>에서 이어지는 로그라 감안하여 제목을 붙였다.

생사 대신 사활이라고 워딩한 것은 그쪽이 바둑에서 기인한 말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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