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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의 애매한 서화

불계不計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모든 것에 앞서, 손위 누이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경.

가문의 자랑, 나라의 보배. 한경.






불계不計

2




 


문무겸전文武兼全, 다재다능多才多能. 묘년재격妙年才格, 불세지재不世之才. 마른 입에 담기엔 민망스러울 정도로 관용되어 온 수사들마저 자기 옷처럼 어울린다. 팔방에 능통하여 학문과 지식, 문장과 그림, 악기와 무예, 전술과 지략, 어느 것 하나에도 빠지는 것이 없는 재원才媛. 타고나기를 천재로 태어나 약점이라곤 필멸必滅뿐인 양, 그는 고사古史, 아니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속의 빼어난 영걸英傑처럼 굴었다. 정은 그가 태어나자마자 두 발로 걸으며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쳤다 해도 믿었을 것이다ㅡ한 해 뒤에 태어난 입장이므로 정말 그랬더라도 목격할 수 없겠지만.


재미없는 농담을 하고 말았다. 아무리 경이라도 나서부터 걸음걸음 연꽃을 피우거나 물 위를 걸을 수는 없겠지. 그러나,

생애 최초의 기억에서부터 경은 정의 앞에 있었다. 다시 말하면 언제나.

정의 앞에.


누구보다 가까운 사람이 언제나 자신보다 우월優越하다면,

영영 그 등을 따라잡을 수 없는 상대라면.


당신도 일찍이 자신을 객관客觀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하는 수밖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정은 돌을 거두었다.


"내가 이겼구나."


항복을 선언한다는 뜻으로 경이 지은 집 안에 죽은 돌死石을 올려놓자,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우아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걸린다. 어린 시절에 비해 훌쩍 키가 자란 정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는 대신 턱 끝을 살며시 들어 올리며 짓는, 그것은 경이 정을 칭찬할 때의 습관이었다.

제때에 지는 것도 미덕이었으므로.


"너와 둘 때면 매번 감탄하게 되는구나. 재미있었어."

"누님의 기량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매번 말해서 지겹겠지만, 입에 발린 말이 아니란다. 상대해줘서 고맙다."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누님."


정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이내 경도 그렇게 하였다.


이른 저녁 식사를 마치고 시작한 대국도 어느덧 끝자락이었다. 열중하는 사이 해가 완전히 떨어져 등잔이 필요해졌다. 정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더라도 스무 수, 오래 걸려도 서른 수 안에 두 집 차이를 좁힐 수 없게 될 것이다. 정에게는 정이 읽은 수를 경이 알지 못할 리 없다는 믿음이 있다. 하느님께 갖는 신앙 같은 것과는 다르지만, 오랜 경험, 정확히는 패배의 경험으로 학습하여 알게 된 것이다. 경을 상대로 '혹시'라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혹시, 만약의 기회가 있을지 모른다 한들 그가 실수하기를 기대하며 마지막까지 기다릴 성정도 아니었다. 남매는 미련없이 판을 정리하고 첫수부터 복기復碁를 시작하였다.


조금 무모했을까 싶었던 수에 대해 칭찬을 받기도, 정 나름 묘수라고 생각했던 수에 여기에 둘 것 같았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대부분의 수는 서로가 예상한 최선의 것들이었기에 복기는 썩 단조로웠다.


"너답지 않은 결정을 했더구나."


거침없이 자기 몫의 백돌을 내려놓던 경이 문득,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까."


저다운 게 뭡니까, 하고 대들 필요도 없었다. 정은 어려서부터 늘 얌전한 아이였고 말썽을 부리는 일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너다운 일일지도 모르겠구나."


단 한 번 저지른 파격破格을 빼면.


그 한 번.

학문과 무예가 똑같이 귀중한 재주라곤 하나, 태胎에서부터 스며있는 가문의 오랜 관습과 취향은 학문과 지식을 닦아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것에 기울어 있다. 누구처럼 팔방미인으로 태어나진 못하였으나 물론 정에게도 경과 같은 어머니의 피가 흐르고 있다. 정이 신체의 단련이나 호신護身이 아니라 자신의 업業으로 삼기 위해 검을 들었을 때, 등과登科하여 나라의 군사가 되었을 때, 그것은 물론 기쁜 성취였으나 모두의 예상 밖의 일이었을 것은 자명하였다.

정은 여러 대답을 준비하였으나, 경은 정에게 지금까지 한 번도 이유를 묻지 않았다.


"내가 무武에 뜻이 없어서지. 네가 군에 적을 두게 된 것은."


다정한 누이는, 인품마저 훌륭하여 정이 깊은 누이는, 동생이 무관으로 입관入官한 이래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말을 꺼냈다. 지금까지 말을 아껴온 것은, 그가 너무나 다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에서야 입에 올리는 것도, 동생을 걱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정은 긍정의 대답 대신 희미하게 미소微笑하였다. 그 미소를 경이 보았는지는 모른다. 어차피 그의 말을 듣고 있다는 신호 외에는 아무런 쓸모도 값도 없었으니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었다. 말의 안쪽까지 넘겨다보는 그를 속일 마음은 들지도 않는다.


"정아. 네가 잘 알겠지만,"


경은 가볍게 입술을 다물었다 떼며 말을 이었다.


"꼭 어딘가에서 제일이 될 필요는 없단다."


제일第一이 될 필요는 없지.

그것은 그의 말대로 정이 가장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죠.

당신은 모든 것을 가장 잘 해내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죠.


"하하하."


하지만 정은 잔잔한 웃음을 터뜨렸을 뿐이다, 정은 경이 아니었으므로.

정도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어떤 것에 누구보다도 뛰어나 정상에 서는 일을, 치세治世의 군자가, 난세亂世의 영웅이 되는 일을. 그럴듯한 꿈과 허황된 이상을 나누어보기도, 그 중 보다 현실적인 것을 현실과 맞대어보기도, 간격을 좁혀보며 좌절하기도, 득실과 이해를 따져보며 고민에 빠지기도 하였다. 부강한 국가에서 부족함 없이 자란 청년이라면 당연히 그런 청춘을 보내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말한 것처럼,

정은 경이 아니기에.


무엇에도 최고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은, 어쩌면 태어나서부터 알아버렸기에.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기 위해 성과 열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제 때에 잘 질 수 있도록.


그렇게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고 납득하기까지, 얼마나 수많은 밤을 지새워야 했는지.


"저도 곧 이립而立입니다. 모험을 다녀보아도 좋을 나이가 아니겠습니까?"


그렇기에,

열 아홉에 준비하여 품었던 대답을 지금에서야 내어놓는다.


"반대하지 않는다. 네가 어련히 고민하였겠지."


정을 아껴주었던 상관도 그런 말을 하였다. 나이와 책임이 늘어난 만큼 모험을 꾀하는 일도 어린 시절만큼 간단하지가 않다. 살뜰히 모셔온 상관과 부하들을 두고 자리를 비우는 일에 대해 경솔히 결정할 수 있는 입장도 못 되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정은 늘 경으로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경이 언제나 그의 앞에 있었으므로. 

하지만 정이라고 평생 그의 등만 바라보고 좇으며 살 수는 없었다.


"가문에 누를 끼치지는 않겠습니다."


정은 혓바닥 위에 올라온 말을 두고 조금 고민하다가, 고민하지 않은 척 덧붙였다.


"물론, 누님께도요."


경은 가볍게 웃었다.


"내게?"


또, 그의 턱 끝이 손가락 한 마디만큼 들린다.

사실 정은, 경의 그 미소가 정을 내려다보고 싶을 때의 습관이기도 하단 것을 알고 있다.


"이 정도론 폐가 될 수도 없다. 마음 편히 다녀오렴."


정이 경에게 그러하듯, 경에게도 정과 지내고 겪으며 생긴 믿음이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지만, 정은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너무 꼼꼼히 헤아리지 않으려고 한다. 사연모를 검은 연기가 혜에 난세를 가져오게 될지, 그래서 영웅이 필요하게 될 것인지까지는. 화종和種에서의 임무는, 나아가 이 기이한 사건들이 얼마나 길거나 짧을지는 정체를 모르기에 헤아릴 수도 없다. 정이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났을 때 몸 담았던 부대로 돌아가게 될지 어떨지, 어떤 명예를 얻거나, 잘못과 책임을 지게 될지. 그런 앞날은 바둑판 위의 일이 아니기에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것까지 따지고 사려서는 영원히 지금의 자리에 안주하게 될 것이다. 그저 새로운 조직에서의 새로운 일과 사람과, 낯선 생활이, 정의 인생에 어떤 기점起點,

기로起路가,

나아가 또 다른 변화의 계기契機가 될 수도 있다고, 작게 기대하였다.


"감사합니다. 누님."


그것으로, 복기를 마친다.  ■








불계(不計) [명사] 

1. 옳고 그른 것이나 이롭고 해로운 것 따위의 사정을 가려 따지지 아니함. 

2. <운동> 바둑에서, 승부가 뚜렷하게 나타나서 집의 수를 세지 않는 일. 


190104

신청미션~ 자체 첼린지로 받은 키워드는 [실수], [밤]

이 로그에 대해서는 좋은 감상을 많이 들려주셔서 감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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