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가윤이, 앞으로,”
옆에 앉아있던 가윤이 슥 몸을 일으켜 몇 걸음 앞으로 나섰다. 반 아이들의 장난스러운 환호에 가윤도 가볍게 화답한다. 그것도 그럴 것이 첫 체육 수행평가 종목이 배구였다. 어느 고등학교에 갔더라도 언젠가 한 번은 하게 될 종목이겠지만 어쩐지 배구 명가라는 학교의 평판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체육 교사가 공을 만지며 수행평가 채점 방식에 대해 설명하는 동안, 배구부는 만점이겠다~ 하고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윤과는 면식이 있어보이고, 역시 체육 선생님이 배구부 고문이려나. 수리는 잘 몰랐다.
이어지는 설명에 귀를 기울이며, 수리는 가만히 가윤을 올려다보았다. 자주색 체육복이 그에게 조금 짧아보인다고 생각했다.
거리에 대하여
遠いことについて
❖
[대단한 디그입니다! 재차 JC에 기회~ 아, 살렸습니다!]
수능이 끝남과 동시에 일상은 완전히 재구성되었다. 물론, 달라질 것이란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하루가 길고 무료할 수 있는지 수리는 처음 알았다. 무엇을 해야 좋을지 난감했던 시기를 거쳐, 수리가 새로이 재미 붙인 것 중 하나는 배구였다.
[○○○, □□□! 네. 이번엔 가볍게 넘겼는데요!]
[이번 5세트, 명품 랠리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큰 기조가 되는 규칙 정도는 알고 있었다. 물론 체육 이론시간에 조금 배운 정도라지만, 가뜩이나 모교는 배구부가 유명해서 말이지. 한 번은 학생회 SNS에서 대회를 앞두고 배구부 응원 캠페인을 벌인 일도 있었다……그러고 보면 그 때, 우승했었지. 조회대에 올라 우승기를 받는 배구부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기억이 있다. 기억하기론 작년에도. 우승이 당연할 리는 없겠지만, 명성이 따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 학교에서 3년을 보내보니 수리도, 축구나 농구보다는 배구에 관심이 간다고 할까.
일찍 집에 돌아와 무료했던 어느 날, 수리는 TV 채널을 돌리다가 처음 배구 프로리그의 경기가 오후마다 방송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새로운 루틴이 필요하던 차였고, 바닥에 공이 팡팡 튀는 소리가 리드미컬했고, 공이 바쁘게 오갈 때는 어쩐지 수리도 호흡을 잊고 관전하게 되었다.
눈이 가는 팀이야, 자연스럽게 생겼다. 모두가 짐작하시겠지만,
[정가윤!]
[내리꽂습니다! JC 아테나가 한 점 더 달아납니다. 10:8!]
[랠리를 끝낸 것은 정가윤이었습니다!]
아무래도 JC 아테나.
마지막 세트, 긴 공방이었던 만큼 더 커다란 환호성이 터져나온다. TV에서는 이제 득점 장면을 저배속으로 리플레이하고 있다. 민트 아이스크림 색의 유니폼을 입은 가윤이 느리게 날아올랐다.
[라인 안쪽에 깨끗하게 떨어졌습니다!]
[정말 긴 랠리였죠~ 양 팀 선수들 모두 좋은 경기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가윤 선수, 정말 JC에 단비와 같은 존재네요.]
[네, JC, 지난 시즌에만 해도 용병 부상으로 애를 먹었는데 말이죠.]
오늘도 잘 하네.
리플레이가 끝나고 다시 경기장 실황이 중계된다. 가벼운 득점 세레모니라도 보여줄 줄 알았는데 가윤은 넘어졌던 모양이다. 바닥을 짚고 서둘러 일어나며 웃는 모습이 잡혔다. TV 화면을 통해 보는 가윤은 키가 큰 사람들 사이에 있어선지 학교에서만큼 커 보이지 않는다. 그의 동료들에게 섞여있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문득, 수리도 위화감을 느꼈다.
[아! 정가윤 선수, 아까 착지하면서 부상을 입은 모양입니다.]
[큰 부상이 아니면 좋겠는데요…….]
[발등? 발목? 부위에 찜질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네요.]
[감독의 표정이 어두운데요. 아무래도 이번 경기에 다시 들어오긴 어려울 것 같아 보입니다. ……. 이제 ◯◯◯ 선수의 서브입니다.]
심하게 다친 걸까.
설마, 금방 일어났는데.
어찌됐든 아직 승패는 정해지지 않았다. TV에서는 계속 경기가 진행되고 있다. 한참 화면 구석구석을 살펴도 가윤은 더 이상 보이지 않고, 벤치를 비춰줄 틈도 나지 않는 것 같다. 머리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수리는 저도 모르게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수첩 모양의 주소록 아이콘을 누른 뒤 ‘ㅈ’을 치자마자 ‘장’, ‘전’을 지나 ‘정’……. 가장 위에, 가윤의 이름이 놓여있다. 물론 번호는 알고 있다, 번호는. 하지만 그렇다한들 뭘 할 수 있을까. 지금은 어차피 전화를 받지도 메시지를 읽지도 못할 것이다. 핸드폰을 쥔 엄지손가락이 액정 위를 맥없이 헤맸다. 수리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흥미진진한 경기 양상이었는데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수리는 결국 TV를 뒤로 하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주변을 더듬어 핸드폰을 도로 찾아든다. 역시 메시지라도 한 통 보내둘까. 아니, 메시지를 보내놓는다 한들 무슨 말을 하면 좋단 말인가. 경기 봤다고? 다친 곳은 괜찮으냐고? 계속 경기에 나가도 되는 거냐고? 수리가 무슨 말을 보내더라도 가윤을 웃게 하거나 속상하게 할 것 같았다. 가윤의 팀은 핸드폰 사용에 꽤 엄격하다고 들었으니, 어느 쪽이든 때가 늦어 필요없는 질문이 되고 말 것이다.
가윤과는, 고등학교 생활의 시작을 함께 한 사이다. 함께 생활한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은데도, 내심 그 친구와 끝까지 함께 하리란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한 교실을 쓸 때에도 각자 동아리로 바빠 마주칠 수 있는 시간이 적었다. 다음 해엔 반이 떨어졌고, 가윤은 갈수록 교실에 오는 일이 적어졌다. 당연하지만, 배구부 에이스의 프로 팀 입단 소식은 가윤이 말해주기 전부터 들려왔다. 그가 마지막으로 등교했던 날에는 손을 잡고 축하해, 응원할게. 고마워, 나도 응원할게, 그런 인사를 주고받았지만,
인사가 짧았던 이유는 그것이 작별이 아니라고 생각해서였다.
영영 헤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그렇게 믿었으니까.
불과 몇 걸음 앞에서 서브 시범을 보이던 가윤의 모습을 기억한다. 그 때에 이미, 가윤에게는 가윤이 몸담은 교실 밖의 세계가 있음을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학교를 대표하여 모를 깃발을 쟁취해 온 때에도 수리는 그 몇 걸음 옆에 서 있었다. 전교생의 앞에 배구부 주장인 가윤의 이름을 호명하는 역할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목소리도 닿지 않는 곳까지 떨어져 있다. 도울 수 있는 일도 하나 없었다. 수리는 철저히 부외자이고, 당장 가윤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결코 갑작스럽게 일어난 변화가 아니다. 이미 그렇게 된 지 오래였으나, 수리가 지금껏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다.
하필 이런 때에, 이런 일로 알게 되다니.
어떤 기분이 눈가에 밀려들었다. 수리는 한 손을 들어 눈 위를 지그시 눌렀다. TV에서는 배구공에 닿은 선수들의 이름을 외치는 캐스터의 목소리가 응원에 섞여 흘러나오고 있다. 아직 졸업까지는 한 달 남짓이 남았다.
헤어지는 기분 같은 건
이렇게 일찍부터 느끼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180304
리퀘로 친구 경기 집관. 주사위 3개짜리 로그라 공을 들였는데 어땠을지...
부제는 이전 관록과 세트로 멀어지는 것에 대하여~적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