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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의 애매한 서화

졸업 즈음에




 학생회실에 들어서자 퀴퀴한 카펫 냄새에 시트러스 계열의 향기가 뒤섞여 정적인 이취가 났다. 수리는 가볍게 숨을 들이마시며 회실 안을 천천히 둘러본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 외에는, 마침 아무도 없었다.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대해도, 시간의 흐름은 공간을 마모시킨다. 이 방의 모든 물건은 이 방을 거쳐 간 사람들의 수만큼 낡고 닳았다. 쉽게 가려지지 않는 세월의 냄새가 공기 중에 가라앉아있다. 애석하지만 어떤 노력을 해도 상큼하고 신선한 과일 향기만 맡을 수는 없었다. 그런 곳이지만, 한때는 수리의 성이었다.

 후임에게 물려준 회장석 대신 소파의 가장 너덜너덜한 자리에 앉아, 수리는 태블릿 PC로 메일함을 확인했다. 어젯밤에 그 후임으로부터, 송사 원고 보내드립니다―란 제목의 메일을 한 통 받은 덕분이다. 


 송사 원고 보내드립니다.


 선배. 송사 원고 A안입니다.

 작년에 하신 거 참고해서 써 봤는데 이 정도면 괜찮을까요?

 혹시 이상한 부분 있으면 알려주세요. 참고해서 보완할게요.

 방송실에도 같은 내용 보내두려고 합니다.

 그럼 답사 준비 힘내세요.


 (107회 졸업식) 송사 원고_A_v2.hwp (57.2 KB) [다운로드]


 이 원고. 그러니까 후배가 재학생을 대표하여 낭독할 환송의 말에 졸업생 대표로서 답하는 것이, 한때 회장석에 앉았던 수리가 그 이력 때문에 하게 될 마지막 일이 될 것이다. 무난하게 해낼 것이다. 간단하다고까지 말할 순 없지만, 이런 종류의 일에 수리는 꽤 익숙한 편이었다.

 시선을 견디는 일.

 시선과 마주하는 일.

 그중 누구에게 감정되고 있을지라도, 어깨를 바르게 펴고 허리에 힘을 넣은 채 평정을 지키는 일.

 천여 명의 학생들을 대표하여, 엄숙하게 발성하는 일.

 애초 누군가는 물려받아야 하는 일이었고 수리가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선거에 출마했다. 그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아서,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해내고 싶어서, 모든 것을 조금 더 열심히 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남들의 이목을 남들보다 조금 더 신경 쓰느라 쌓아올린 것들로, 수리의 일면을 더 보기 좋게 만들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시험과 평가가 일단락된 지금 회상해보자면,

 음,

 그랬다는 걸 아무도 알 수 없을 만큼은 요령이 좋아서 다행이었을까.




 “선배는 좋겠다. 뭐든 잘해서.”

 날이 풀린 월요일 아침, 자판기 앞에서 만난 후배가 투덜거리듯 말했던 적이 있다. 후배 앞에서 응, 주말은 쓰레기처럼 보냈어―너무 좋았어! 라고 말할 수 없어 집에서 쉬었노라 답했을 뿐이지만, 큰 시험을 수개월 앞둔 입장에서 걱정거리가 줄어든 졸업반 선배의 여가는,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부러운 것일 것이다. 이제는 쓰이지 않는 소속 반의 이름과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아가씨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말았다.

 “아하하,”

 귀여워~라고 말해버리면 실례일까.

 그렇지만 이렇게나 귀여운데, 자기가 귀엽다는 사실 정도는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잘 알고 있겠지.

 아마 수리도 수리를 충분히 파악하고 있다. 고등학교의 울타리 안이니까, 요령이 좋은 것만으로 뭐든 ‘우수’할 수 있었다. 아마, 학교 바깥에는 수리와 달리 어떤 일을 사랑하고 재능이 있어서 그 일을 ‘우수’ 이상으로 잘 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이미 학교 밖에서 활약하고 있는 가윤만 보아도 쉬이 짐작할 수 있다. 아마 그렇겠지. 아마란 말을 너무 많이 썼을까? 하지만 아직 수리도 그 너머로 나가본 것은 아니니까 아마, 라는 말을 붙여두고 싶다. 그러니까,

 아마, 시간이 흐를수록 수리는 점점 더 평범해질 것이다.

 평범해지는 일.

 그것도 수리가 잘 할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른다.

 “너도 잘 할 수 있단다.”

 하지만 당장은 후배에게 듣기 좋은 말만 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동백의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고 싶은 마음을 강하게 눌러 참으며 수리는 말했다. 아침에 공들여 양 갈래로 틀어 올렸을 머리카락을 괜히 흐트러뜨리고 싶지 않았다.




 어떤 냄새가 날지 알면서도 수리는 굳이 문을 열자마자 숨을 깊이 들이마신다. 들어서면서 수리는, 한 눈에도 다 들어오는 그 방의 정경을 굳이 여러 차례 나누어 눈에 담는다. 스크래치가 많이 나 거의 까맣게 보이는 화이트보드, ㄷ자 모양으로 배치된 회의 테이블, 한쪽 벽을 채운 서류 캐비닛. 구석에 쌓여있는 접이식 의자. 축제 때 쓰느라 뽑았던 현수막들. 구형 OS를 쓰는 데스크톱 PC 한 대와 자주 종이를 씹는 레이저 프린터. 맞은편에는 선반이 딸린 싱크대와 4인 소파가 하나.

 새 디퓨저를 꺼냈구나, 아침에 누군가가 차를 마시고 설거지를 했네. 온수가 안 나오는데 종이컵을 안 쓰다니, 겨울인가보다. 찬장에 남아있던 쿠키를 같이 먹었을지도. 지혜가 나중에 알고 화내지 않으면 좋을 텐데. 천천히 시간을 들여 바라보다 보면 그런 것들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3년간 사랑했던 공간이므로,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 알 수 있다.





180211

신미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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