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린 데이 시티.
대강의실을 나서자, 여름 특유의 바삭한 공기가 선하의 셔츠 속까지 파고든다. 에어컨이 쌩쌩 돌아가던 실내에 있던 터라, 바깥의 더위에 오히려 몸이 시렸다. 선하는 잠시 마른 공기에 숨을 말리고 있었다. 학생들은 대부분 선하보다 먼저 건물을 빠져나간 뒤라, 건물 앞은 한산했다. (강의를 다니기 전부터 느꼈지만, 그 학교는 늘 인구 밀도가 낮은 것이 특징적인 장점이었다.)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던 여학생 두 명이 선하를 힐끔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선하 쪽에서 먼저 인사를 했다. 잘 가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멀어지자 정말로 조용해졌다. 캠퍼스에는 쾌청하다 못해 반짝거리는 여름 하늘이 펼쳐져 있다. 쨍, 혼자 눈이 부셨다.
이제 돌아가면…….
선하는 주차장까지 천천히 걸어가며, 머릿 속으로 오후 일정에 대해 생각한다.
학기는 이것으로 끝났지만 랩에도 방학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당연히 할 일이 있다. 랩에서는 계속 조작이변 사례 데이터를 검토하고 있고, 개인적으로는 올해 상반기의 실적보고도 준비해야 한다. 그래도 주말에는 루스가 올 테니 시간 여유를 조금 내고……. 셋째 주에는 기말 페이퍼 채점도 해야 하니 이번 주의 할 일은 이번 주 중에 끝내는 편이……그런데 이번 주는 토요일까지일까 일요일까지일까. 걷다가, 선하는 잠시 멈춰 선다.
꺼두었던 핸드폰의 전원을 켠다.
숫자 몇 자리를 눌러서 끌려나온 연락처 목록 중에, 원하는 이름을 찾아 화면을 몇 번 긁는다. 핸드폰을 귀에 대고 기다리자, 곧 단조로운 연결음이 흘러나왔다.
뚜르르, 뚜, 뚜…….
2.
기말고사 주간을 한 주 앞둔 금요일이었다. 선하는 모처럼 수강생 전원의 출석을 직접 부르면서 눈인사를 했다. 수강생들과 그리 친밀하게 지내는 강사는 아니었지만, 안 그래도 시험 준비로 바쁠 학생들을 더 괴롭힐 마음은 없다. 기말고사를 페이퍼로 대체해, 한 주 일찍 강의를 마칠 작정이었다. 외출을 싫어하는 선하에겐 한 주 나갈 일이 줄어서, 시험주간을 앞둔 학생들에겐 다른 과목 시험 공부를 할 여유가 생겨서 좋은 일이었다. 달리 말하면 그 날이 이번 봄학기의 마지막 출강이 되는 셈이었다.
선하는 마지막 사례 발표―한 화훼단지의 노란 꽃이 전부 병아리로 변해버린 이변이었다. 선하는 발표가 계속 되는 내내 흥미로운 듯한 표정을 짓기 위해 노력했다―에 간단히 코멘트한 뒤 다시 강단으로 올라갔다. 한 학기 동안 수고했다, 기말주간인데 좋은 결과들 거두길 바란다, 페이퍼는 며칠까지 자연과학관 생물학과 사무실에, 성적 정정 문의는……, 그런 이야기를 하며 강의를 마무리할 시간이었다.
"교수님, 선데이 모닝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마지막으로 질문이 있느냐고 물은 것이 잘못이었을까. (모두 집에 가고 싶은 시간이다. 정말 추가 질문이 들어오는 일은 적기 때문에, 선하는 조금 당황했다.) 선하는 불쑥 질문해온 여학생의 얼굴과 출석부를 대조했다. 랩에 가서 이름을 돌려봐야겠다고 생각한다. 아마 관련 인물이라면 선하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저희 팀의 입장은 기자회견문에 쓰인 대로입니다. 같은 소속인 이상, 강단에서 그 이상 발언하기는 어려울 것 같네요."
그레이프 브릿지의 붕괴 사건은 크게 보도되었으며, 책임이 있는 조직을 소탕한 공적은 CBI에 돌아갔다. 루스가 한 기자회견 역시 제법 이슈가 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선하는 회견문만 읽어보았다. 루스의 취향은 아니었으리라 생각한다.) 웅성거리는 강의실을 보아하니 수강생 모두가 그 때의 기자회견이나, 선하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에 대해 상기한 것 같았다. 선하가 노코멘트를 선언하자, 다른 곳에서 손 하나가 더 올라왔다.
"그럼 이 세계가 기자회견대로 안전한 곳이란 뜻인가요?"
"……."
큼, 선하는 작게 목을 가다듬는다.
3.
당장 특별하게 로맨틱하고 감성적인 계기가 생긴 것은 아니다. 선하는 어느 날처럼 우울에 잠겨있지도 않았고, 하늘은 여름 날씨에 어울리게 맑았고, 귓가에 들리는 소음으로 보아 란씽은 아마 현장에서 전화를 받은 모양이다. 하지만 예전부터 해야 했던 일인데, 미뤄뒀던 것이 하나 떠올랐다. 떠오르자, 당장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말하지 않고는 한 걸음도 더 걸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화를 걸었다. 그 뿐이다.
"란씽."
란씽이 대답하기도 전에 선하는 다그쳐 물었다.
어쩐지 숨이 가빠졌다.
"예전에 했던 말 기억해요?"
4.
"지난 학기에도 비슷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만,
세상은 이변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위험한 곳이라는 걸 여러분 세대는 잘 모를지도 모르겠어요."
화제될 기자회견이 있었던 건 이번 학기 정도.
하지만 선하는 지난 학기에도, 지지난 학기에도 비슷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어떤 학기엔 메일로, 문자 메시지로, 어떤 학기엔 학기 첫 날, 이번엔 마침 종강일인 참이다. 그러니까 이런 이변, 저런 이변, 그런 이변이 일어나고 일어나고 일어나는 건 정말로 이 세계가 끝나가고 있기 때문인지에 대해.
글쎄, 어떨까.
글쎄, 어떨까.
"이런 이변……혹은 이변으로 추정되는 현상들이 말세의 징조라든가, 당장 100일 뒤에 지구가 멸망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설령 그런 뜻이라고 해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비관만 하고 있어서는 곤란하겠죠. 그랬다간 100일 후가 아니라 내일 모레 굶어 죽게 될 테니까요."
물론 선하도 그 답을 모른다.
하지만 선하가 하늘이 무너져내리지 않을까 겁에 질린 채 산 지도 벌써 8년이나 흘렀다.
강의실에 옅은 웃음이 터진 사이, 또 다른 자리에서 손이 올라왔다.
"그럼 우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좋은 질문에 선하는 미소 지었다.
아직 젊고, 앞으로의 생애에 대해 진심으로 고민하기 시작했을 나이의 청춘들이니, 그 무엇보다도 그것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전 여러분이 뭐든 해도 좋다고 생각해요."
선하도 겨우 몇 년 더 산 선배일 뿐이지만,
그래서 조금 쑥스럽지만, 어쩐지 그 질문에 답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변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무엇이든 하세요.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남으면, 그걸로 충분해요."
종말의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은 그 날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오늘 하루는 오늘의 일을 하면서, 평범하고 완전한 세계의 일상으로 채워지기를 바라면 된다. 평온한 날이기를, 바라면 된다. 이변이 있는 세계라고 해서, 그런 하루를 가질 수 없는 것은 아니니까.
(물론 페이퍼 제출은 미루지 말아주길 바란다고, 마이크를 끄기 전에 당부를 덧붙였다.)
5.
"어떤 거?"
그러게. 란씽과는 꽤 긴 시간을 같이 지냈다.
수다스러운 사람들이 아님에도, 그 시간 동안 적지 않은 말을 주고 받았다고 생각한다.
"히어로 같은 거 안 했으면 좋겠다고 했던……."
"……."
"그랬더니 당신은 히어로가 아니라고 했었죠."
"응, 그랬지."
사실 란씽과의 대화는 언제나 충분했다. 한 번도 모자란 적은 없다.
"별로 상관없다는 거, 말하지 않았던 것 같아서요."
딱 한 마디, 그 말만 하지 않았을 뿐이다.
"좋아해요.
히어로든 아니든 그건 상관없어요. 그것보다,"
눈을 감는다.
눈을 감는 것만으로도 선하는 이미 아는 것을 되새겨볼 수 있다.
내일은 분명히 있다.
내일 올려다 볼 하늘이 안녕함을 근거로, 오늘이 이 세계의 마지막 날이 아님을 안다.
그것을 선하는 이미 알고 있지만,
"당신이 내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렇다고 해서 오늘도 할 수 있는 것을 내일로 미룰 필요는 없었다.
사랑하는 것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기만도, 이 세상은 충분히 바쁜 곳이었다.
이 역시 이변과는 전혀 상관없는, 스테이지 공통의 문제다.
in Community SPEDIS : Season 2 End.
채 박사 개인엔딩 겸 시즌 마무리 겸 이거저거 다용도 로그...인 걸로
뭔가 난장판인 것 같지만 원고가 너무 턱 밑에 닥쳐있어서 나중에 수정해야겠음...
뭔가 난장판인 것 같지만 원고가 너무 턱 밑에 닥쳐있어서 나중에 수정해야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