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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의 애매한 서화

白夜




 1.


 깨어났을 때 선하는 선하가 모르는 곳에 누워있었다.

 시야가 흐렸고, 안경을 어디에 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안경을 벗은 게 언젠지 기억나지 않는다. 날씨를 짐작하지 못하겠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낯선 장소에 있는 듯 했다. 오늘이 며칠인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이상하게도 그 상황이 그리 불안하지 않았다. 오히려 평온하게까지 느껴졌다. 여긴 대체 어디일까. (천국일 수도 있겠다고, 선하는 잠깐 착각에 빠졌다. 그런 곳에서까지 안경이 필요하지는 않을 텐데.) 그래서, 안경은 어디에 있을까.

 사각사각, 귀를 기울이자 과일 껍질을 깎는 소리가 들렸다. 시선이 느껴졌다.


 "여긴 병원이에요."

 묻기도 전에, 사과를 깎던 여자가 먼저 대답했다.


 "……."

 뭔가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좀 어때요?"

 머리가 아프고 졸리다고 대답했다.


 "어떻게 된 건지 기억나요?"

 굉장히 정제된 질문이었다. 선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

 "집에 왔더니 당신이 거실에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었어요. 머리를 다쳤길래 구급차를 불렀고, 바로 이송돼서 수술. 그게 금요일 밤 일이고, 지금은 월요일이네요."

 "……."

 "질문 있어요?"


 그녀의 설명은 브리핑처럼 사무적이고 간결했다. 일단 고맙다고만 대답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던진 물건이 유리로 된 램프였다는 것을 기억한다. 피하면 더 무겁고 커다란 것을 던질 것이 분명해 알아서 빗나가길 바랐는데, 아마 서로 운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선하는 말없이 다시 눈을 감았다.

 안경은 아마 새로 맞춰야 할 것이다.


 "맞아, 수사국 사람이 다녀갔어요. 퇴원하면 과일 고맙다고 인사하는 거 잊지 마요."


 턱, 하고 사과에 칼집을 넣는 소리가 들렸다.




 2.


 선하가 기억하는 평온은 그렇게 까마득한 곳에 있지 않았다. 눈이 내렸던 대학원생 기숙사나, 동료들과 카드 게임을 하던 심야의 연구실, 발열하는 스마트폰, 건물 옥상에서 바라본 밤하늘, 에너지 드링크, 손톱만한 달, 종이 비행기, 소나기 때문에 눅눅하게 도착한 배달 음식, 토끼 모양의 슬리퍼, 핀볼 머신의 점수 기록판, 더위에 녹은 아이스크림 조각 같은 곳에 그냥 스며있었다.

 그리고 언젠가의 한가했던 휴게실, 오후에,


 소파를 차지한 누군가가 졸고 있었고,

 나비가 날고,

 (그랬던 적은 한 번밖에 없지만.)


 파란 금붕어가 짹짹 노래를 하던.

 (그것들도 다음 날 아침에는 사라져있었다.)


 잠든 동료가 깨지 않도록 소리를 죽인 채, 

 사소한 이변이 손 안에 찾아들어도 조용히 흘려넘길 수 있었던…….


 어쩐지 꿈결같았던 오후를 기억한다.

 늘 그런 날만 있었으면 좋을 텐데 하고, 떠올리면 조금 입 안이 달아지는 순간이 있었다고.




 3.


 일대에 오로라aurora가 관측되리란 건 어제부터 알고 있었다.

 사람이 다칠만한 일은 아니었다. 태양에서 방출된 전자나 양성자가 지구의 자기장에 이끌려 대기로 진입할 때, 공기 분자와 부딪히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펭귄이나 백곰이 사는 극지방에선 쉽게 볼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그런 과학적 상식을 무시하고 일어나기 때문에 이변이라 불릴 테지만.

 그런 이변이 길바닥의 흙먼지처럼 흔하고 당연해진 세계다.

 규칙과 진리가 중요하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은 과학자로서도 스트레스였다. 불변의 진리를 추구하는 일이 훨씬 어려워지고, 어려워진 것에 비해 훨씬 무익해졌다는 것을 안다. 변덕스럽고 제멋대로인 세상에서 뭔가의 변인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변의 발생 패턴을 찾겠노라 들썩였던 학자들도 곧 잠잠해졌다. 선하 역시 학자로서의 길을 내려놓은 지 오래지만, 사람이 다치지 않으면 됐지, 라고 생각하게 된 스스로가 이따금 부끄럽게 느껴졌다.


 어떤 광경이 펼쳐져있을지 알았기에 선하는 블라인드를 일찍이 닫아두었다.


 내일의 날씨를 알지 못하는 곳에는 오래 머물 수 없게 되었다. 그럴수록 아는 곳의 이상현상을 예지할 때의 스트레스도 극심해졌다. 이변이 잦아진 것과 격심해진 것 중 어느 쪽이 더 문제인진 모르겠다. 이변을 머리 위에 두고 살아야 하는 하루가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인지도 모른다. 선하는 선하의 세계를 점점 좁혔다. 도어락이 달린 자료실에 틀어박히면 대부분은 선하를 내버려두었다. 아주 힘이 들 때는, 서고의 오래된―너무 낡았고, 이미 내용은 디지털화되어 아무도 찾지 않는―스크랩북을 몇 권씩 쌓아올려 낮은 벽을 세웠다. 그 벽 사이에 몸을 구기고 앉아, 선하는 날이 밝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날이 밝으면, 창 밖의 아름다운 이변도 태양광에 가려 사라질 것이다.


 아. 날이 밝으면.


 패스트푸드점에 가서 모닝 ○머핀 세트를 사 와야지.

 ―저 이변과 함께, 녹아 없어지고 싶다.


 이런 기분이 드는 건 순전히 특수능력의 페널티 탓이다. 그걸 알고 있기에, 선하는 기분에 무작정 휩싸이는 대신 선하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나비.

 나비…….

 맑았던 하늘. 푸른 나비. 지저귀던 금붕어. 창문을 통해 떨어지던 햇볕.

 그리고 파란 꽃.


 울컥 눈물이 터졌다. 청승맞게도, 선하가 그리워하는 것들은 전부 오래 전에 없어졌다. 선하의 것이었던 적도 없다. 손 끝에나 잠시 스치고 갔을 것들에 왜 이렇게 서러운 기분이 들까.

 어느 순간엔가 몸을 떨며 흐느끼고 있었다.




 4.


 고요를 깨는 소리가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무언가가 뜯겨나가는 소리였다.

 누군가가 서고에 들어왔다. 패스워드를 아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덜컥 놀라서 급히 안경을 집어 쓰다가, 쌓아놓은 책더미를 와르르 넘어뜨리고 말았다. 랩에 침입자가 있다는 위급한 사실보다도, 이것들을 다시 정리해야 할 텐데, 귀찮겠다……고, 조금 무기력한 생각이 앞섰다.

 어차피 여긴 쓰레기통이야. 중요한 것은 없어. 왜 하필 여기에 들어온 걸까.

 선하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사이 발소리는 망설임없이 다가왔다.


 "선하."


 등 뒤에 란씽이 있었다.

 건조하고 가라앉은 공기 속에서 그의 숨소리만이 뜬금없이 가빴다.


 가슴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다른 사람이 아닌 것은 다행이었으나, 이런 꼴을 보이고 싶은 사람도 아니었다. 황급히 돌아앉아 눈가를 눌렀다. 오래 울다 졸기를 반복하던 탓에 눈꺼풀 안쪽이 따끔거렸다. 잠긴 목소리를 짜내 인사를 하고, 또 뭔가 말했을 텐데, 횡설수설하며 아무 말이나 늘어놓자니 어지러운 주변도 눈에 들어왔다. 급하게 쏟아진 자료들을 그러모았다. 마음이 급한 탓인지 잘 되지 않았다. 란씽은 이미 그 모든 광경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아주 이상하고 우스꽝스럽게 보였을 것이다. 스스로가 비참하게 느껴져 결국 그만두었다. 그리고 곧, 선하의 모든 수선이 중요하지 않아졌다.


 "나는 히어로가 아니야."

 참담한 말이 들려왔다.


 저도 모르게 돌아보면 그 손에는 부서진 문고리가 들려있다. 그렇구나. 책으로 만든 가벽만큼이나 간단하게 뜯겼을 것이다. 선하가 문고리를 바라보자 란씽이 그것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가뜩이나 가난한 랩의 기물을 망가뜨리면 어떻게 하냐고 책망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아,

 눈이 마주친 순간 바로 알았다.

 란씽은 선하를 만나러 왔다. 박사 학위가 없더라도 그 정도는 알 수 있다.


 "선하."

 "……."

 "좋아해."


 그는 겨우 한 걸음 떨어진 곳에 있었다. 커다란 바위처럼, 산처럼, 그 자리에서 흔들림없이 선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하는 그제야 란씽이 늘 그 자리에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심지어 하늘색 수실로 된 나비가 천 속에서 날아오른 날에도 그랬다. 안경을 썼는데도 눈 앞이 형편없이 흐려졌다. 하지만 그는 안경이 필요없을 만큼 가까이에 있었다. 어쩌면 선하는 그에게 입을 맞출 수도 있었다.

 란씽이 무언가 더 말하려 했다면, 참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아냐.

 다만 머릿 속에서 누군가가 선하를 잡아당겼다.


 안 돼.

 혹시나 선하가 듣지 못했을까, 한 번 더 힘주어 말한다.


 선하는 고개를 떨궜다.




 5.


 오로라 때문이다.

 긴 시간 앓아온 병에 대해서라면 잘 알았다. 멘토나 의사 앞에서는 한 번도 인정한 적 없지만, 가혹한 날씨를 앞두고 선하는 아주 약해졌다. 물에 젖은 휴지나 넝마 조각처럼 너덜거렸다. 익숙해진 감각이었지만, 그렇다고 선하에게 아가미가 생긴 것은 아니었다. 선하는 자주 숨이 막히곤 했다.


 그러니까, 사실 그런 날엔 그 누가 찾아와 무슨 말을 해도 감격했을 것이다. 가짜 증거를 보여줘도 믿었을 것이고, 거짓말로 설득하더라도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어떤 죄를 고하더라도 선하는 모두 용서했을 것이다. 선하의 뇌는 물에 잠겨 녹기 직전이었다. 아무리 생각하려 해도, 몸을 가누기도 버거운 날에 다른 것을 생각할 수는 없었다. 선하는 그의 타이밍이 너무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나가 아닌 란씽이었고, 란씽은 선하에게 아무 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너무 지쳤어.

 힘들어.

 이제 없어지고 싶어.

 늘 그런 생각만 하고 있어. 매일, 그런 생각만 하게 돼. 란씽. 나는, 당신이 아는 나는 위선자야. 가식덩어리야. 이변이야. 진짜 나는 여기에 없다는데, 나는 그 세계의 멀쩡한 나인 척 하고 있어. 나는 너무 무서워. 이 세계는 폐기될 불량품이고, 우린 잘못 태어난 돌연변이야. 괴물이야. 실패작이야. 우린 버려진 지 오래야. 나는 그게 너무 억울한데. 화가 나고, 진절머리가 나는데.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역겨워서 견딜 수가 없는데. 당신이 죽어가는 건 절대 당신의 죄 때문이 아닌데.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고 했어. 이런 곳에 숨어서, 틀어박혀서, 전부 끝나기만 기다리고 있었어.

 당신이 뭘 그렇게 잘못했다는 건지, 나는 모르겠어…….


 "……."


 물론 선하는 그에게 무슨 말이라도 할 수 있었다. 떠오르는 말이라면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함부로 소리내 지껄이는 순간 정말로 그런 말과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되어버릴 것만 같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둘 만큼 선하가 약해진 것은 아니었다. 이 기분은 말도 안 되는 오로라 때문이고, 지구가 찬란히도 망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매일 그 사실을 잊을 수 없도록 일깨워주는 친절한 특수능력 때문이다. 선하는 으득 소리가 날 때까지 이를 악물었다.


 란씽을 위한 선하의 노력은 거기까지였다.


 끊임없이 변하고 무엇 하나 정확하지 않은 세상이기에, 갈수록 변하지 않는 것을 사랑하게 된다.

 그의 옷깃을 움켜쥐고 선하가 오열했던 건, 꼭 오로라 때문만은 아니었다.




 6.


 선하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새벽은 이미 꿈처럼 녹아있었다.

 딱딱한 바닥에서 잔 탓인지 한쪽 팔이 욱신거렸다. 눈이 끔찍하게 부어있었다. 목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정신만은 오랜만에 명료했다. 여기가 어디고, 오늘이 무슨 요일이고, 어떻게 또 하루 물 속에서 살아남았는지, 선하는 큰 고민없이 알 수 있었다, 물론 내일의 날씨가 어떤지까지도.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침 안경도 손이 닿는 곳에 놓여있었다.


 한 손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커다랗고 딱딱한 것이 선하의 오른손을 누르듯 덮고 있었다.


 "……."


 돌아보면 란씽이 곁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숨도 쉬고 있다. 그 사실에 조금 안심한다.

 붙잡혀있는 손가락을 조심조심 움직여 손바닥을 천천히 쓸어본다. 손금을 따라 덧그려봐도 별 반응이 없다. 힘껏 손톱 자국이라도 내지 않는 이상, 선하가 만졌다는 사실도 느끼지 못할지 모르겠다.

 (그건 역시 좀 슬픈데, 선하는 생각했다.)

 란씽이 했던 말들을 곱씹어본다. 전부 기억하는진 자신이 없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참아왔다니 대단히 어른스러운 사람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늘 그랬는데, 선하는 여태껏 제 앞가림도 못하고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아이처럼 울기만 했던 것이 떠올라 새삼 민망해진다.


 서른이나 되었는데, 아직도 어른이 아닌 걸까.

 어른이 되면, 제 안의 아픔이나 상처보다 다른 사람을 걱정할 여유도 생기는 걸까.


 선하가 갖고 싶었던 평범하고 안온한 어른의 삶은 일찍이 한 번 실패로 끝났다. 덕분에 선하는 예전보다 훨씬 처참하고 형편없는 인간이 되었다. 선하가 어떻든 세계는 똑같이 병든 채고, 사람은 죽어나갈 것이다. 하지만 란씽이 그런 제 곁에 있어주겠다면, 선하도 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엉엉 우는 란씽을 끌어안고 제 와이셔츠를 손수건으로 쓰게 할―것―이―다―.


 (는 물론 농담이지만,)


 란씽에게 위안이 필요한 순간에는 선하가 곁에서 힘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즈음의 날씨에 부디 별 일이 없기를 바란다.)




 선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블라인드를 젖혔다. 평소보다 조금 늦은 아침이었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양, 창 밖의 하늘은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뻔뻔하기도 하지. 선하는 몇 시간 뒤에 내릴 비에 대해서도 알았지만, 비구름 때문이란 것을 알았기에 크게 신경쓰이지 않았다. 뒤를 돌아본다. 그나저나 저 이는 오늘 아침 운동을 거르겠구나, 같은 한가한 생각을 했다.


 "란씽, 자요? 이제 출근해도 될 것 같은데."


 아, 어쩜.

 목이 잠긴 탓에, 이름을 빼곤 거의 소리가 되지 않았다.





 


님드라 저 고록받음. 나의 기분은 이 짤로 생략하기로... ...
제목은 고록에 오로라가 나왔길래 그냥 같은 지역에서 볼 수 있는 백야... 그래요 관련없지만 난 몰라((역정))
2님 올해 들어서 이게 제일 빠르게 쓴 글 같다... ... 난 몰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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