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슬리퍼를 선물받고 나서야 5년째 같은 슬리퍼를 신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선하는 곧 그 슬리퍼를 선물받았던 시즌이 다가온다는 사실도 체감하고 있었지만, 깊게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세상에 없는 전前 상사에 대해 추억하기에 선하는 그녀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그녀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슬리퍼를 받은 적이 있었다는 것뿐. 겨울마다 신어온 그 슬리퍼는 한 번 세탁기에서 나올 때마다 조금씩 해지고 바래갔다.
그녀의 유지遺志를 잇고 있는 부서라곤 하지만, 사실은 루스가 치프로 재임한 기간이 훨씬 길다.
이제 이 부서엔 하이디 진에 대해 기억하는 사람도 몇 남지 않았다.
선하가 발 밑을 내려다보지 못한 사이, 새로운 상황은 이미 낡은 일상으로 변모해있었다.
또 새 신발에 적응해야 할 때였다.
슬리퍼 속에서 발가락을 몇 번 움직여보면서 잠시 손을 쉬는 동안, 랩에 새로운 기척이 있었다. 바닥을 박차듯 디디며 의자를 빙글 돌리자, 눈 앞에 밀크 블론드의 여성 요원이 타블렛 PC를 안고 서 있었다. 호박색 눈. 입을 틀어막은 검은 재갈. 선하는 금방 그녀의 이름을 떠올렸다.
"아담스 군, 좋은 오후네요."
미스 니나 아담스.
[안녕하세요.]
그녀는 들고 있던 PC를 조작해 메시지를 띄웠다. 선하는 그녀가 마침표를 찍기 기다렸다가 메시지 창에서 눈을 뗐다. 인사를 돌려받고 나서야, 강의 중에 하는 교수 흉내를 내고 있단 사실을 깨닫고 홀로 무안해졌다. 호칭은 나중에라도 바꿔놓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랩에는 몇 년동안 신입이 없었다. 맥플러리 교수가 랩을 떠나면서 대부분의 요원들이 함께 사직한 탓이었다. 세상에는 많은 대학과 연구기관이 있었고, 랩은 정치적인 이유로 가난해졌다―루스는 물론 악인이 아니지만, 정치나 처세에는 소질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곧 달리아를 비롯한 설비들을 유지하는 데에만 대부분의 예산이 들었다. 함께 일하던 마지막 요원이 루스에게 피격될 뻔하면서, 선하 혼자 랩을 지켜야했던 시절도 있다.
(그리고 그 때 이혼도 했지. 중요하지 않은 일이니 넘어가자.)
오랜만의 신입맞이인만큼 감회는 깊었다. 환영회를 생략한다는 공지는 이미 들었지만, 랩 요원들의 서류는 그 공지보다 앞서 읽어두었다.
"주말인데 들렸네요?"
[네, 주셨던 매뉴얼 중에 잠깐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깜빡깜빡.
잠시 지켜보고 있자니, 커서가 잠깐 멈췄다가 새로운 문장이 입력되었다.
[여러 가지라서 길어질 것 같은데... 조금 기다리셔야 할 것 같아요. 죄송해요.]
"아, 아뇨. 천천히 써줘도 괜찮아요. 필담 익숙하니까."
괜찮다는 뉘앙스로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의사소통에 대해서는 나중에 몇 가지 약속이라도 정해두는 편이 좋겠지만, 필담 자체에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할 생각이었다.
선하는 한 때 능력을 사용하면 일정 시간동안 말을 하지 못하는 특수능력 보유자와 일한 적이 있었다. 그런 페널티에도 불구하고, 그 특수능력을 업무에 활용하기 위해 영입한 요원이었기에 쓰도록 둘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 부서에는 그런 처지의 요원이 생각보다 많았다. 어떤 페널티는 생명을 위험하게 하고, 어떤 페널티는 영혼을 지치게 하며, 보통은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망가뜨린다.
사직서나 휴직계를 낸 사람 중에, 단순히 업무량이나 루스에게 질려버린 사람만 있던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미 말한 것 같지만, 랩에 신입이 들어온 것은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 이 요원들이 얼마나 랩에 오래 있어줄지도 사실 알지 못한다. 선하는 신입들의 서류를 읽으면서 특수능력 보유자인지, 그 특수능력이 업무에 쓰여야 하는지 유심히 확인했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어 다행이란 생각도 했다.
어떨까.
자세히는 모르더라도, 손수 재갈을 입에 물만큼은 그 댓가가 괴로운 것이라는 의미일테니 말이다.
"그나저나, 그럼 달리아를 보러 온 거예요? 안 그래도 전공자의 감상이 궁금했는데……."
반가운 마음에 묻자, 타이핑을 하고 있던 니나가 잠깐 눈을 들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실무 경력이 길긴 하지만 정보관리시스템에 대한 이론이나 전공지식에 해박하냐면 그건 또 다른 문제다. 그녀에게 달리아에 관한 의견을 들어보는 것은 선하에게도 유익한 시간이 될 것이다. ……. 선하는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씹고 있던 빨대를 쓰레기통에 버려둬야겠단 생각에 책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책상 위에는 빨대 외에도 빈 종이컵, 막 뜯은 포장지며 포장 비닐 같은 것들이 흩어져 평소보다 너저분했다.
새 슬리퍼……를 선물받았다.
선물을 건네주던 아드리안이 '신입들하고 식사라도 하세요,' 하고 덧붙이듯 권했던 말이 함께 떠올랐다.
니나에게서 몇 줄 정도의 질문사항을 확인한 선하가, 잠시 고민한 끝에 물었다.
"괜찮으면 여기서 점심 같이 할래요? 간단히 먹을 거라도 배달시키고 얘기해도 될 것 같은데……."
대답을 입력하는 대신 니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하도 고민하고 물은 것이긴 했지만, 그녀의 입에는 지금도 재갈이 물려 있다. 다른 사람과의 식사가 부담될 수 있겠단 생각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부디 그녀에게 그럴듯한, 어렵지 않은 제안으로 들렸으면, 생각하며 선하는 최대한 상냥하게 웃어보이려 노력했다. 혼자 먹기 뭐해서 그래요.
"먹는 동안은 대화하지 않는 걸로. 결제는 부서 법인 카드로. 어때요?"
분명, 그녀에게 이 랩은 새 슬리퍼 같은 장소일 것이다. 어쩌면 그녀에게는 거의 첫 번째 신발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좋은 신발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잠시라도 편안한 신발이 될 수 있기를 바라보는 것이다.
In Commynity SPEDIS: Season 2 Event 1
선하로 미스 아담스와 식사. 작년 12월에 쓴 글인데 이제사 백업을 하고 있는 슬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