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려."
한 걸음 빨리 달아난 마르그리드가 치열을 드러내며 미소지었다.
방금 복용한 환각제 덕분에 고글 너머의 시계는 슬로 모션처럼 느리고 시끄럽게 흘러가고 있다. 그녀는 여느 때처럼 흐트러짐 없이 정연한 얼굴로 서 있었지만, 그 눈빛에는 무심한 전의가 불처럼 번들거린다.
영상 주제에 그런 것까지 구현할 수 있어도 좋은 걸까, 로쏘는 선수를 뺏긴 와중에도 시시한 감상이 들었다.
"무서운 여자."
"말했잖아? 놀이로 끝나진 않을 거라고."
항의해보았으나, 마르그리드는 그런 어리광을 귀담아 들어주는 여자가 아니었다.
농담이지만, 분명 좋은 어머니는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어깨 근처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던 구형의 비행체가 우아하게 떠오르며 수상한 빔을 방출한다. 손에 들고 있던 인젝션 건이 공중에서 폭파되었다. 로쏘가 조금만 더 늦었다면, 로쏘의 손까지 빛―그녀는 그것을 달빛이라고 부르곤 했다. 말도 안 되는 비유가 아닌가―에 스타일리시하게 녹아버렸을 수도 있다.
뒷목이 오싹오싹한 기분에, 목을 울려 웃음을 터뜨린다.
어차피 로쏘가 한 발 빨랐다면 그녀의 발 밑을 이 손으로 뒤틀어 잘라버렸을 것이다. 아마 얌전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겠지만, 설령 드론 째로 두 동강이 났대도 그녀는 로쏘를 원망하지 않았으리라.
그런 '놀이'인 것이다.
"큭큭, 아프다고? 마르그리드."
한 손을 어깨 위로 들어 가볍게 흔들어보인다. 물론 안개―라고 로쏘가 부르는 연막―의 발생 스위치를 다른 손에 숨긴 채긴 했지만, 무장해제되었음을 로쏘 나름대로 어필해본 것이었다. 방독면을 쓸 타이밍을 잴 필요가 있었다. 다쳤어? 멀리에서, 아니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에서, 마르그리드가 후후후 웃는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우웅 우웅 기괴한 울림이 되어 로쏘의 귀를 때렸다. 키이잉, 쾅! 일순 발 밑이 무너진다.
세계가, 빠른 속도로 허물어진다.
"……로쏘,"
아니, 로쏘 쪽이 공중으로 떠오른 것이었다.
그녀가 소환한 괴생물의 입―으로 추정되는 부분―에 한 팔을 물린 채, 로쏘는 공중에 형편없이 매달려있다. 균형을 잃은 사이 떨어뜨린 스위치를 발견한 마르그리드가 로쏘를 잠시 올려다보곤, 히죽 웃었다. 그런 구두를 신으니까 비틀거리는 거잖아. 일단 구두 때문에 비틀거린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반박은 하지 않았다.
"재미있었어?"
그녀가 물었다. 한 점의 걱정 시름도, 초조함도 없는 맑은 목소리였다.
묻는다 해도, 작은 체구의 로쏘는 대답할 틈 없이 튕겨져 나가는 중이었다. 무참히 벽에 부딪친다. 쿵. 다행히 머리가 박살나진 않았다. 불유쾌한 기계음이 끼긱거리더니 다시 로쏘를 잡아 챈다. 쿵. 여러모로 자극 과잉이었다. 방어 수단도 공격 수단도 빼앗긴 채, 로쏘는 괴생물이 꿈틀거리는 대로 마음껏 휘청거렸다. 이래서 약물에 기대는 전투는 방어전에 약하다고 미리안이 이야기했었는데─―,
――쿠웅.
무너진 것만 같던 세계 위로, 이번에는 로쏘가 미끄러지듯 추락한다.
입 안이 터진 것 같다. 로쏘는 쇠맛이 나는 입안을 혀끝으로 더듬어 보며, 마르그리드가 다가오는 것을 멀거니 지켜보았다.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경쾌한 걸음이었다. 문제의 스위치는 멀지 않은 곳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로쏘는 그녀가 한 번 더 '달빛'을 쏘지 않을까 각오를 해 두고 있었지만, 드론은 평온히 둥실거리며 떠 있을 뿐이었다. 그 대신, 그녀는 그것을 구두 끝으로 또각, 밟았다.
그것으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가방에서부터, 쨍한 보랏빛의 '안개'가 분사되기 시작했다.
숨을 한 입 들이마신 순간, 시계가 크게 흔들린다.
또각, 또각, 또각, 마르그리드가 보랏빛 안개를 타고 넘어 로쏘의 코 앞에까지 다가왔다. 지켜야할 것 하나 없는 영상에게, 이미 손패가 드러난 로쏘의 혼돈은 간지러운 무대 장치였을지도 모르겠다. 올려다보이는 그녀는 안개 탓에 발목 언저리부터 일렁거리는 듯도, 그저 박자에 맞춰 흐느적거리는 구두 두 짝처럼도 보인다. 구두는 멈춰섰다가, 피걸레가 된 로쏘의 배를 밟고 그 위에 올라탔다. 로쏘는 무심코 그녀의 드러난 허리에 손을 댔지만, 손가락만 꿈틀거렸을 뿐 실제로 팔을 감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한 쪽 어깨가 빠진 모양이었다.
"응? 로쏘."
"……음? 아하."
아하, 그녀는 재미있었냐는 질문의 대답을 재촉하고 있는 것이었다.
로쏘가 대답 대신 피식 웃어버리자, 마르그리드도 눈을 가늘게 뜨고 후후, 웃었다. 그녀가 고글을 꿰뚫고 로쏘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는 것만 같았다. 그만큼 가까운 거리였기에, 그녀의 눈이 어떻게 가늘어지고 휘어져 호를 그렸는지 로쏘도 똑똑히 지켜볼 수 있었다. 느리고 시끄럽고, 머릿 속이 윙윙 울리는 슬로 모션으로. 그녀가 정말로 살아있었다면 웃을 때 뱉은 숨이 뺨에 닿았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딱 세 단어를 말했다.
"있지.
나는,
아직인데."
지금 든 생각은 약물의 탓일까, 안개의 탓일까,
그것도 아니면 그녀가 어느 새 로쏘의 고글 밑으로 몹쓸 환영이라도 밀어넣었기 때문일까.
로쏘는 그녀가 즐거워하고 있단 착각을 했다.
니쿠님 리퀘로 쓰다가 세시가 다 되어가길래 대충 수습
퍼퓸의 레이저 빔을 들으면서 썼다예요
퍼퓸의 레이저 빔을 들으면서 썼다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