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캐서린, 뭐 해요?"
물론, 캐서린이 그녀의 연구와 딱히 관련 없어 보이는 사진을 보고 있다고 해서 문제 될 일은 없었다. 같은 연구를 하는 동료의 모니터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것은 대부분의 연구실에 깔려 있는 매너였고, 더군다나 선하는 랩에서 제일 빈둥거리는 요원 중 하나인 게 분명했으니, 다른 사람을 나무랄 입장은 못 되지……물론 그럴 의도로 물은 것도 아니었다.
"아, 차를 장만할까 해서."
"루이보스 말고, 바퀴 달린 차 말이죠?"
정말 자동차였다니. 확인차 다시 물었지만 잘못 본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캐서린이 운전을 할 수 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기억 속의 여자 동료들이라면 신상 구두나 한정판 화장품, 보이그룹의 새로운 화보, 그것도 아니면 응원하는 야구팀의 투수 사진 같은 것에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어느 쪽도 아닌 의외의……다시 말해 한 자동차의 사진이 모니터에 가득 차 있길래, 무슨 일일까 호기심이 생긴 참이었다.
"응! 선하도 볼래?"
선하는 대답 대신 슬리퍼를 슥슥 끌며 캐서린의 데스크까지 다가갔다. 그녀가 백스페이스 키를 누르자 상세 사진 대신 자동차들의 섬네일과 함께 매물 리스트 페이지가 펼쳐졌다. 스크롤 바가 한없이 길어지는 것에 세상에 차가 이렇게 많나 하고 감탄하다가, 정렬 기준이 제각각인 것을 깨닫고 눈을 가늘게 떴다. 자세히 보니 한 브랜드의 카탈로그가 아니었다.
"이거 중고차 매물이네요."
"아, 응! 멀리 탈 것도 아니고, 요 앞 출퇴근하는 정도니까."
"요 앞……직원 아파트였죠?"
"응."
캐서린은 생기있게 눈을 빛내며 세스와의 내기에 대해 설명했다. 자료서고에 있던 증거품 중 하나로 코인 게임을 했는데 대가로 카풀을 해주게 됐다는. '자가용이 생기면'이란 거네요? 일이 그렇게 많았으면 부르지 그랬어요? 거들어줄 수 있었는데. 선하, 그때 자고 있던걸. 또요? 채 선하씨 이거 안 되겠네. 이러다 잘리는 거 아닌가? 으햐! 세스랑 약속한 것도 있지만, 사실 차를 구할까는 생각하고 있던 건이야. 그렇구나. 운전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응응. 자가용이 없는 줄은 몰랐어요. 아. 그런가? 나 걸어 다니는데. 직원 아파트는 가까우니까 그런 줄 알았죠. 지구를 위한 B-M-W라고 하잖아요? 아. 비-엠-더블유라면…….
Bus-Metro-Walk.
캐서린의 말대로 직원 아파트와 본부 빌딩은 지하철을 이용할 수 없을만큼 가깝고, 버스로도 몇 정거장 되지 않는데다 정류장에서부터 본부까지 걷는 시간도 있어 효율이 떨어지는 편이다. 그렇다면 남는 건 도보-Walk-밖에 없게 된다, 굳이 환경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맞아! 잘 알고 있는데?"
"그럼요. 저도 거기 사니까요."
"응?"
…….
"……어, 어어?"
2.
"그렇게 놀랄 일이었어요?"
그래서, B, M, Walk.
선하에게는 모처럼의 외출이었다. 일단은 집으로 가는 것인데 외출하는 기분이 든다니, 너무 애사심이 넘치는 것은 아닌가 반성해볼 일이다. 토끼 슬리퍼 같은 것을 신고 나왔다간 그대로 눈토끼가 아닌 먼지토끼가 될 것 같았기에, 신발은 운동화―운동화 끈을 매고 있는 선하를 보고 시온이 토끼눈을 했다는 건 모른 척하기로 하자―를 신어봤다.
"한 번도 같이 퇴근한 적 없잖아! 꿈에도 몰랐는걸."
"으음, 시간대가 달라서 그런 거 아닐까?"
"요즘은 아침에 출근하는데……다시 저녁반으로 돌아가 볼까?"
덕분에 타박 타박 고무 슬리퍼로 바닥을 때리는 일은 없다. 털 슬리퍼가 벗겨지지 않도록 발바닥에 힘을 주며 직직 끌고 다닐 필요도 없었다. 그래도 오늘은 같이 퇴근하네요. 하고 오늘의 동행에게 말을 건네보면, 운동화의 에어만큼 낮아진 캐서린의 눈이 가늘어지는 모양이 내려다보였다. 후후후, 웃음소리가 들렸다.
새삼, 산책을 싫어했던 적은 없다는 걸 깨닫는다.
"선하는 어때? W 쪽이었어?"
"음?"
"출퇴근 말이야, 차는 안 타고 있다면서?"
"글쎄, 맞춰볼래요?"
말은 그럴듯하니 있어 보이게 했었지만, 사실 그렇게 환경보호며 에너지 절약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못 됐다. 출퇴근을 규칙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마지막으로 퇴근했을 때는 택시를 탔을 것 같다. 아니, 어딜 가더라도 택시를 타니 분명 택시였겠지.
"도보는 아니라는 거지?"
"네. 아무래도, 슬리퍼니까요."
"그럼 버스?"
"아닌데?"
걸을 체력이 없었던 건 아니다. 가는 길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짐이 많거나 날씨가 궂었던 것도 아니다. 걷는 데 걸리는 시간만큼을 돈으로 구매하겠다는 게 그럴싸한 이유 없이 택시를 타는 사람들의 핑계일 것이다. 그 핑계를 대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늦잠을 좋아하거나, 걷는 것을 싫어하거나, 바깥 공기를 싫어한다는 것 같다.
어느 쪽도 아닌 핑계를 대자면, 언제부턴가 천장이 없는 곳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아니, 언제부터 좋아하지 않게 되었는지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럴 거면 차는 뭐하러 산 거야?"
택시에 대해 실토하자, 캐서린이 웃음을 터뜨리며 되물었다.
3.
"아, 저기 보이는 왜건이에요."
무슨 말이냐면, 사실 선하에게는 자가용이 있다.
버스 지하철 도보, 해서 B-M-W라는 말장난이 나오게 된 그 B사의 20XX년식 미니 쿠퍼 클럽맨. 일단은 네 명밖에 타지 못하니 대중교통 축에는 낄 수 없는 형편이고, 두 다리 대신 바퀴도 두 쌍이 잘 달려 있다. 몇 년 전에 구매했고, 가솔린이 들어가고, 연비는 이렇다는 모양이고, 이 정도 탄 것 같고, 색상은 보시다시피---
"선하……. 차가 먼지색이잖아."
---이대로 골동품이 되어도 좋을 기세였다.
"세차장에 들러야겠네요."
"정비소부터 가야겠다. 얼마나 안 탄 거야?"
"글쎄……여기 주차할 때는 몰고 왔지만요."
"그게 언젠데?"
"처음 이사 왔을 때?"
"그거 몇 년이나 방치했다는 말 아니야, 선배님?"
"하하하. 몇 년까지는 아닐 걸요."
모처럼 산책을 한 보람은 있었다. 오랫동안 단순한 소지품에 불과했던 차 키가 오랜만에 문을 열고 시동을 걸고, 제 역할을 한다. 와이퍼를 작동시키자 차창에 쌓여있던 먼지가 부채꼴 모양으로 닦여나갔다. 바로 캐서린에게 키를 넘겨줄 수도 있었지만 그녀의 말대로, 차에게 미안할 만큼은 오래 방치한 자가용이다. 정비소까지는 선하가 운전하기로 했다.
"……차 한 대쯤 있어서 나쁠 거 없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저도."
박사 학위를 받은 대학에서는 박사후연구원부터 주차 공간을 내줬다. 선하가 이름 앞에 닥터(Ph.D.)를 붙이게 된 기념으로 처음 '지른' 물건이 차가 된 결정적인 이유였다. 모쪼록 제 이름이 붙어있는 주차 공간을 비워두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고, 물론 조금은 들떠 있었고, 아마 캠퍼스 밖으로 나가 일자리와 집을 구해 출퇴근을 하게 되면 자가용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도 있었다고……말이다.
이 차를 구매할 때의 선하가 캠퍼스 바깥 세상에 대해 어떤 기대를 하고 있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마 그 기대에 부응하고 있진 못하겠지(뭐, 이 차 조수석에 금발의 미녀를 앉힐 일이 있을 거라곤 기대도 하지 않았을 테니).
딱히 대학에서와 사정이 달라지는 건 아니더란 게, 바깥 사람이 된 선하의 감상이었다.
"그래도 굴려줄 사람이 생겨서 다행이네요."
차가 지하에서 차답지 못한 시간을 보낸 것만은 하늘의 탓을 해도 어쩔 수 없지 싶지만,
또 덕분에 오늘은 모처럼의 산책이 있었다. 그걸로 좋지 않나 생각한다.
선하가 한가하게 말하자 캐서린이 그런데, 하고 물었다. 네. 정말 내가 타도 괜찮은 거야? 응. 그러라고 같이 퇴근한 건데요? 부담갖지 말아요. 어디까지나 렌트고. 응. 어디 박아버리지만 않으면 뭐……아, 가끔 저도 태워주기예요? 응? 응응. 그래야지.
부드럽게 핸들을 돌려, 지하주차장을 빠져나간다. 그 사이 해가 지기 시작했는지, 하늘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아, 해 지네요."
옅게 먼지가 앉은 유리 너머, 부채꼴 모양의 하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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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키히키한 일상록. 몇 줄 늘어나지도 않았는데 반 달이나 붙잡고 있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