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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의 애매한 서화

What's next?




 1.

 약 30초.
 내역 없는 영수증을 펼쳐 만든 홀(Hole)은 선하가 타임 워치를 들고 사라지는 시간을 재길 반복하던 때의 기록과 큰 오차를 보이지 않고 사라졌다. 벽. 아마 이번에도 30초. 꼭 그만큼의 시간 동안, 이 벽 너머에 이세계가 있었다. 지금은 다시 평범한 벽이 되어버렸다. 다섯의 성인 남녀를 삼킨 흔적은커녕 못 자국 하나 남아있지 않은 휴게실의 벽 한 조각을, 선하는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선하, 커피 내려 갈까?"

 캐서린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그녀는 사용한 영수증을 루스가 서명한 서류에 스테플링하고 있었다. 홀(Hole)의 오픈과 진입에 대한 사항은 전부 이런 식으로 기록되어 철해졌다. 이런 기록이 그 이변적인 공간을 얼마나 통제할 수 있을지에 대해 선하는 자신이 없었지만, 모쪼록 선하는 선하가 발붙이고 살아가는 이 세계조차 잘 알지 못했고, 

 "아, 그래요. 이제 일하러 갈까요."

 이세계의 일에 정신을 팔고 있기엔, 이 세계에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2.

 "커피 가져왔어!"
 "다녀왔습니다, 놓친 거 있나요?"

 이번 건도 그런 저런 이 세계의 일 중 한 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린 데이 그레이스 병원. 그린 데이 시티의 사망자 통계를 검토하던 중 이상 통계가 발견된 그린 데이 시티 소재의 병원인데, 관련해 제출해둔 이변 의심 보고서 덕분에 요원들 일부가 차출되었다는 말이다. 잠시 휴게실에 다녀온 사이 그들은 그린 데이 시티에 도착해서, 그린 데이(GD) 스테이트라는 이름의 잡지사―실제로 있는 곳인진 모르겠다―의 취재단이라는 설정으로 위장 잠입에 들어갔다고 했다. 그린 그린.

 "언더 커버라, 누구 아이디어려나요."

 내가 그린 기린 그림은 잘 그린 기린 그림이고, 네가 그린 기린 그림은 잘 못 그린 기린 그림이고…….

 "사실 중앙수사국 요원이라고 하면 그, 옷차림부터 생각나지 않나요? 멋있는 정장 입고 찾아가서, 신분증을 짠 보여주면서……CBI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질문드릴 것이 있는데 시간 괜찮으십니까? 뭐 그런."
 "스카웃 왔을 때?"
 "맞아요. 세주 씨처럼 말이죠?"
 "루스 씨도요!"
 "……."
 "처음엔 저, 무슨 드라마에 나오는 사람 같다고 생각했는데요."
 "……수사국 요원이 수사드라마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 조금 이상하지 않아요?"

 휴게실에서 집어온 디저트 케이크와 함께 잠시 커피 타임이 이어진다. 쇼콜라 케이크는 향이 진하면서 달지 않아 풍미가 있었지만, 조금 말라 있어서 다들 뜨거운 아메리카노로 입 안에서 적시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선하는 세 입만에 케이크를 없애고, 둥글게 말린 종이컵의 끄트머리를 앞니로 잘근거리며 말했다.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이에 물린 종이컵도 함께 끄덕끄덕거렸다.

 "……정황 파악을 하는 목적이라곤 하지만, 케이스가 된다면 병원 측의 반발이 있을 테니까요. 수사국도 수사국이지만 이변 전담 부서인 것은 밝히지 않는 편이 좋겠죠."
 "하긴, 수사국에 퇴마나 외계인 전담 부서가 있다는 소문도 도는 마당에."
 "앗, 없나요? 외계인 전담 부서?"

 환자가 죽지 않는 병원이라니.



 3.

 세스가 딴 딴딴딴딴 딴……딴! 하고 오래된 미스터리 드라마의 오프닝을 흥얼거리는 뒤로, 녹수가 멍하니 고개를 돌려 멀티스크린을 올려다본다(그러고 보면 그 드라마, 녹수의 나이보다 오래된 것 같다). 랩의 모두가 각자 업무에서 손을 떼고 티타임을 갖는 동안에도, 랩의 오랜 자산인 특수재난-이변 데이터베이스는 부지런히 할 일을 수행하고 있었다. 취재단, 아니 현장 요원들의 업데이트가 없는 지금 시점에서 그 병원의 경이로운 성과가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었기에, 선하는 [불사], [회복], [치유], [부활] 등 단순히 사람이 죽지 않을 만한 이유로 떠오르는 일부 키워드들을 조합해두고 나갔던 참이다.
 스크린에는 성서(聖書)급의 고전에 나오는 일화부터 전래 동화책에 나올 법한 전승, 누렇게 변색된 신문기사의 스캔이나 인터넷 어딘가에 떠도는 찌라시까지, 다양한 출처와 형태의 케이스―얼핏 보기엔, 종교에 관한 케이스가 많은 것 같다―들이 추출되어 정확도 순으로 차곡차곡 정렬되고 있다. 지금 맨 위에 떠올라 있는 것은 한 남자의 동그란 증명사진이 첨부된 사건 자료였다.

 "앗, 저 얼굴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구면인 줄은 몰랐으나 선하도 뉴스로 그 기사를 본 기억이 있다. 수 년 전 뉴스에서 다루었던 사이비종교의 교주였다. 휠체어에 탄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거나 지팡이를 짚은 장님의 시력을 '회복'시켜 주거나, 불치병에 걸린 환자를 '치유'하는 등의 '기적'을 일으키며 교주로 추앙받았고, 신자들에게 신앙심을 증명하라며 많은 돈과 여자를 뜯어냈다나.
 그 경우는 그저 짜고 친 연극이었기에 환자들을 포함한 일당 전원이 사기 혐의로 검거되었지만.

 "……데미안 씨, 거하게 한 탕 벌 수 있었을지도."
 "우와. 멋있을 것 같아요. 교주 데미안 씨."
 "특수능력은 쓰기 나름이니까요."

 멀리 갈 것도 없이, 바로 이 부서의 필드 요원 중에 그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특수능력 보유자가 있다. 선하는 데미안의 안개(Healing)로 요원들의 크고 작은 부상들이 완치되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보고 들었다. 덕분에 SDMD에서 파견 요원들의 부상률은 굉장히 낮게 기록된다. 하지만 그것이 이변의 일종이냐면 쉽게 대답할 수 없다. 그런 식―이라고 말해도 될까?―의 특수능력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병원에 있어 사망률이 감소한 것이라면 이번 케이스는 케이스로 취급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누군가가 데미안 씨와 유사한 특수능력을 쓰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와아... 그렇다 치면 어떻게 되는 거죠? 스카웃?"
 "......SDMD가 모든 특수능력 보유자를 스카웃하고 있는 건 아니에요."
 "하긴 그렇죠. 그럼……."

 "……우리 요원들만 봐도 크고 작은 페널티를 감당하면서 특수능력을 사용하고 있으니까, 특수능력을 사용하고 있는 사람을 찾아낸다면 조사는 해야 할 거에요. 랭크를 측정한 적은 있는지 페널티가 뭔지 정확히 알고 있는지 같은 걸 확인하고……아니라면 수사국에 데려와서 교수님과 상담하는 게 좋을 테고요."

 어쨌든 이번 건이 케이스가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은 있다. 누군가가 특수능력을 쓰고 있건 다른 누군가의 차트 관리를 소홀히 해 일어난 오류건 간에 말이다. 선하는 너덜너덜해진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자리로 돌아가, 데이터베이스가 띄워놓은 검색 결과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수천 년 전 어떤 왕이 평생을 찾아 헤맸다는 불로초―죽을 때까지 찾지 못한 모양이다―, 죽어도 잿더미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불사조, 저승의 명부를 조작해 삼천갑자를 살았다는 남자의 민담, 곧 죽을 사람을 알아볼 수 있다는 이유로 화형당한 여자, 이름과 사망일시, 사인을 수기로 적으면 그대로 실현되는 노트, 저승사자를 속여 부잣집 규수를 살리고 결혼했다는 의원의 이야기, 사신의 사랑을 받아 목숨을 구했다는 소녀의 로맨스 소설, 시체들을 좀비로 부릴 수 있었다는 검은 눈의 마녀, 악마와의 계약, 거래를 통한 수명 연장, 탄생한 별자리에 따른 수호성의 가호, 신의 은총, 물이 술로, 살이 빵으로 변하고, 은총이 어쩌고, 십자가가 어쩌고…….

 잔뜩 검색된 성경 구절들을 흘려 넘기고 있을 때, 저 그런데……하고 녹수가 말을 꺼냈다.
 
 그래서 이변으로 판정되면, 그 땐 어떻게 되나요?



 4. 

 킷섬입니다. 통화 가능하십니까?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어요. 취재는 어땠나요?
 병원은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있었습니다.
 정상적이라면?
 시체가 일어나거나 한 사람에게 치유나 은총을 받는 듯한 정황은 없고, 환자들이 기적적으로 완치되는 것도 아닙니다. 환자들은 진단을 통해 수술을 받거나 약물 투여, 물리 치료 등 정석적인 처치를 통해 호전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난치병 환자들의 경우 상태가 안정적일 뿐, 계속 병을 앓고 있습니다.

 ...흠, 가설 몇 개가 없어지네요. 병원은 제 할 일을 잘하고 있었을 뿐이라는 건가요.
 의학적 지식은 없지만, 분명 기적이라고 불릴 만한 수술도 있었습니다. 사전의료의향서에도 수개월 전에 서명한 중환자가 계속 연명 중인 경우도 있었고요. 환자 이름을 몇 명 메모해뒀는데 필요하십니까?

 보내주시면 우리 식으로 검토해볼게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던가요?
 대개는 표정이 밝습니다. 환자들은 행복해 보였고, 의료진도 자신감에 차 있습니다.
 하긴, 환자들은 대부분 자기 몸 상태만 알 테고……위화감을 느끼는 사람은 적을지도 모르겠네요. 
 ……장기 입원자의 가족 중엔 불어나는 병원비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신의 기적이 아니겠느냐고 말하는 의사가 있었는데, 그가 각별히 여기는 환자가 난치병 환자라고 하더군요.
 아, 저런.

 그를 포함해 석연찮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의사가 두 명 있었습니다. 둘에 관해서는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건 랩에 부탁드리면 되는 겁니까?

 하하, 이름만 불러주세요.



 5. 

 "누구였어, 선하?"
 "GGH 쪽의 업데이트예요."
 "아니, 언더 커버를 하자고 한 사람 말이야."
 "그건 못 물어봤는데……."



 6.

 "그래서 뭐라던가요?"

 전화기에 가까이 있던 선하가 클린트와 통화를 마치고, 전해 들은 내용을 정리해 이런저런 사례들을 걷어내는 작업을 시작했다. 성서에 쓰인 일들은 간략히 한 항목으로 정리하고, 전래되어 온 일화에 대해서는 공통점을 찾아 묶어놓는다. 몇 시간째 데이터베이스를 돌린 결과인데도 몇 줄 남지 않았고, 그 중 어느 쪽도 병원의 실적을 설명해줄 수 있을만한 사례는 없다. 문제 정의부터 잘못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약하면, 데미안 씨나 사이비 교주 같은 사람은 없었던 모양이네요."
 "사실 그런 능력을 보유한 사람이 있다면 먼저 소문이 났을 거에요. 그리고 군대에 차출되겠죠."
 "시온 씨, 갑자기 무서운 이야기를……."
 "나라면 의사는 안 됐을 것 같아. 의대의 전공 지식 같은 거, 시시할 것 같고."
 "……."
 "녹수 씨. 봐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요. 여기 메모의 이름들을 조금……."
 "금방 다녀올게요, 선배."

 사람들이 한 마디씩 말하고 한 박자씩 움직인다. 선하에겐 새로운 키워드가 필요했다. 생각에 잠긴다.
 본래 병원은 사람을 살리고 병을 고치는 곳이다. 그 자체는 의료 기술과 의료진의 힘이므로, 이변으로 보일 일은 아니다. 하지만 병원은 병들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니 아무도 죽지 않을 수는 없다…….

 "선하 씨. 좀 어때요?"
 녹수가 환자들의 이름과 관련 자료를 수집하러 간 동안, 가까운 자리의 세스가 의자를 끌고 다가왔다.

 "정리는 하고 있지만, 병원에서 환자가 낫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나 싶어요. 지금 걸려나오는 케이스들은 병원에서도 할 수 없는 수준의 일이거나 초월적인 존재가 있거나 해서."
 "음……하긴 그래요. 수술을 성공한 게 이변은 아니잖아요?"
 "그렇죠……."
 "……."

 이 병원의 문제라.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새 키워드를 찾아볼까요……."

 [실적], [성과]에 대한 키워드를 넣어 자료를 교차 검색한다. [성공] 혹은 [승리] 중 하나가 포함된다는 조건을 붙여본다. 너무 많은 기사들이 쏟아져나온다. [완벽], [최선], [철저] 등의 단어들을 붙여 수를 줄여나간다. [실수]나 [패배]란 단어가 언급되는 데이터를 우선시해보기로 한다. 10년간 한 번도 전국대회 우승 자리를 넘긴 적 없다는 어느 중학교 남자테니스부의 이야기나, 몇 십 년간 패소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검사의 엄격한 흑백사진과 인터뷰 기사 따위가 스쳐 지나간다. 흥미로운 것이 좀 더 나와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검색 범위를 조정해 대기하는데,

 "앗,"
 "선하 씨,"

 두 사람이 동시에 선하를 불렀다. 선하도 뒤를 돌아보는 대신 고개를 들어 멀티스크린을 올려다보았다. 거기에는 한 의료 잡지의 최근 호 기사가 실려있다. 흰 의사 가운을 입은 채 환하게 웃고 있는 의사와 악수 중인 한 환자의 사진이 잡지의 한 페이지를 가득 차지하고 있었다.

 「그린 데이 그레이스의 천재 외과의, 닥터 로렌스 셰퍼드를 만나다」

 그 의사의 이름은 선하가 방금 녹수에게 전해준 이름 중 하나였다.

 "……이야, 직구에 당했는데요."
 "……."

 그린 데이 시티 소재의 그린 데이 그레이스 병원은 그린 데이 시립대학의 메디컬 스쿨과……(중략)……병원이기도 하며, 최근 진보적인 고난이도 이식 수술을 수 차례 연속으로 '성공'하는 등, 놀라운 '성과'를 보이면서 의료계는 물론 의학계의 주목 또한 받고 있다……(중략)……그린 데이 그레이스 병원은 정확한 진단과 신속한 처치, '철저'한 환자 관리로 하여금 '완벽'에 가까운 커리어를 유지하며 다른 종합병원들의 병원 순위를 부쩍 압박하고 있다. 특히 8개 지역의 병원이 수술불가 판정을 내린 뇌종양을 갖고 있던 미스 롤랑을 위한 닥터 로렌스 셰퍼드의 도전적인 수술은……(중략)……전문의 외 많은 의료진들 모두 '실수'없이 제 역할을 다함으로써 근 몇 년간 의료사고로 말미암은 소송이 전무했다고 한다…….

 「그린 데이 그레이스는 할 수 있는 '최선'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을 뿐, '완벽'이란 말은 과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믿고 찾아와주셨으면 할 뿐입니다.」

 …….
 흘려읽기를 마친 선하가 잠시 랩 안을 둘러보았다. 스크린에 떠 있는 기사에 시선을 뺏겨, 랩 안의 모두가 잠시 조용해져 있다. 각자 각자의 할 일로 돌아가 있던 사람들의 손을 좋은 때에 멈춰주었다고 생각하며, 선하는 데이터베이스에 내렸던 검색 명령을 조기종료했다. 스스로도 어이없는 수확에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이변……일까요?"
 물었다.




In Community SPEDIS : Case 5
마감일을 넘기는 바람에 테마도 기조도 뭣도 없이 우겨쓰는데 바빴다
가능하면 이딴 글은 두 번 다시 쓰고 싶지 않아.. (mm ) 길조심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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