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은주(恩主)
손가락이 길고 손톱의 형태도 좋다. 표정관리를 잘 하는 편. 뭔가에 집중하면 입술이 살며시 벌어진다.
항시 평온하고 정연한 어조. 호칭과 어미는 상대가 원하는 대로 맞춘다. 물론 글에 조금 더 강한 타입.
2009년 ○○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당선작인 '바깥'으로 등단.
2011년 S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컴퓨터활용능력 2급, 국어능력인증시험 1급 자격증 취득. 2종 보통 운전면허증 소지.
소지 자가용은 H차의 4도어 세단, 검은색. 물려받은 차로 운전을 즐기지는 않는다.
시집 <소년기>(2009), <구름의 역사>(2012), 산문집 <수다스러운 겨울>(2010) 출간.
로맨스 소설 <그녀와 3분 요리>, <겨울나기>, <4월의 발렌타인> 연재 및 출간.
꼭 하나 이상의 글을 쓰고 있고, 높은 확률로 출간된다. 순수문학/장르문학 가리지 않고 꾸준하게 활동하는 중. 순문 쪽의 필명은 본명 그대로 한은주, 온라인/장르 쪽에서 사용하는 닉네임은 은주.
열 아홉부터 재경의 아파트에서 동거, 지난 겨울 그가 사망하면서 아파트와 보험금을 상속받았다.
술고래 여럿 잡는 주당. 폐끼치지 않으려다 주량도 늘어난 타입. 담배는 적게 피운다.
무교. 신의 존재는 믿는다.
행복함.
- 안녕함(120810)
은주의 가족은 좋은 사람들이었다.
은주야.
그렇게 부르던 목소리는 언제나 상냥했다. 손은 늘 따뜻했고, 미소는 한결같이 부드러웠다.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길, 미소할 때면 가늘어지던 눈, 아침이면 넥타이로 목을 죄이던, 다시 손가락, 그러면서 일어났니, 다녀올게, 하던 한결같은 목소리. 설거지를 마친 뒤의 희미한 물 냄새, 잘 마른 침대 시트에서 나던 햇빛 냄새. 은주야, 나직하고 부드러운 부름, 따뜻한 눈, 상냥한, 아주 상냥한 손, 목소리, 따스한 미소. 다녀올게, 하던 변함없는 인사……. 아니, ‘사람들’이었던 기억은 없다. 재경은 여러 사람이었던 적이 없으니, 그렇게 말했다면 거짓말을 한 것이다.
늘, 언제나, 한결같았다는 말도, 실은 거짓말이다.
그러나 고인(故人)의 행적은 자주 미화되곤 하는 것이다.
안녕함
P. Cup
“조교님 저 와써요.”
거침, 없음.
이번 방학부터 과사 근로를 하고 있는 학생이 이어폰을 집어 빼면서 사무실로 들어왔다. 말머리마다 조교님 조교님 불러주고는 있지만, 사실 학번 차가 많이 나지 않아서 선배나 오빠라고 부르고 싶은 걸 참고 있는 듯 했다. 어서 와. 욥. 둔탁한 나무 소리와 함께 그녀의 크로스백이 책상 위로 내던져진다. 그 여파로 커피 믹스 스틱이 몇 개쯤 꽂혀있는 머그컵이 빙글 흔들리고, 너저분하게 흩어져있던 펜 몇 자루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진다. 으아, 하고 그녀가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간다. 겨우 1개월 남짓 쓴 자리일 텐데, 반년이 넘게 일하고 있는 은주의 자리보다 훨씬 짐(그리고 쓰레기)이 많다. 오죽하면 과사에 들린 그녀의 동기들이 하나같이 혀를 차곤 했을까. 그녀에 대한 은주의 평가는 좋은 편이었지만, 저만큼 단기간에 책상을 난잡하게 어지를 수 있는 사람도 보기 드물 것이다.
툭, 그리고 탁탁, 운동화를 벗고 슬리퍼로 발을 옮기자마자 그녀는 은주 자리의 파티션에 팔을 걸쳤다. 은주의 오른쪽 어깨 위로, 수다의 폭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글자 그대로 거침없음.
조교님. 어제 여자 배구 봤어요? 응? 아니, 보려고 했는데 일찍 잠들었어. 졌다고 들었는데, 혹시 봤어요? 아아아, 네 전 중계 봤는데 진짜 난 몰라아. 연경언니는 왜 그렇게 잘해서 질 듯 이길 듯 계속 보게 보게 보게! 만들던지. 저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연경언니한테 시집가야 쓰겠어. 언니 넘 멋있어어. 저런, 연경 선수가 동의해줄지 모르겠네? 흥, 인터넷에 보면 그런 말 있잖아여 나를 강제로 선물한다고. 그나저나 동메달전은 일본이랑 붙든데 연경언니가 다 쳐발라주겠져? 팡팡, 팡! 그랬으면 좋겠네. 듣자니 축구도 준결승에서 지고 한일전이던데. 둘 다 좋은 결과 있었으면 좋겠다. 오빠, 아니 조교님은 축구 좋아하는구나. 그냥 아무거나 스포츠는 잘 보는 것 같아요. 축구는 그 중에서도 인기 종목이니까 볼 기회도 들을 기회도 많은 것 같고. 그럼 야구는? 야구도 보지, 프로야구. 그나저나 이번 올림픽은 준결승까지 진출한 경기가 많은 거 같네요. 근데 결승엘 못 가잖아여? 어째 만나는 건 어째 일본이고. 흠. 핸드볼은 스페인이던데. 아 핸드볼도 있었지. 쨌든, 우리나라 선수팀은 둘 중에 하나만 하면 되니까 그건 다행이에여. 응? 둘 중에 하나? 우승하거나, 일본한테 안 지거나! 아하, 그거 말 되는데?
그래서 응원하는 야구팀은 어딘데요? 트윈스? 베어스? 아님 히어로즈?
뚜르르르.
“네, 국문과 사무실입니다. 아아, 안녕하세요. 네. 교수님 오늘 학교 나오셨어요. 이번에 계절학기 하시거든요. 아직 연구실에 계실 텐데. 네. 네. 강의 시간이요? 어디 보자 강의 시간표가…….”
즐거운 대화였다.
뚜르르르.
“네, 국문과 사무실입니다. 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김, 아, 김 군. 11?” 뚜, 뚜, “잠시만요. 전화가 계속 오네요. 급해요?”
뚜르르르.
“네, 국어국문학과 사무실입니다. 아, 네 사모님. 무슨 일로 사무실로? 아, 교수님께서요.”
뚜르르르, 뚜르르르.
“요즘, 시는 계속 쓰고 있나?”
질문을 받았을 때, 은주는 책상 정리를 거드는 중이었다.
과 사무실의 전화를 맡기고 온 근로처럼 끔찍한 수준은 아니었고, 휴가를 다녀온 사이의 우편물을 가나다순으로 정렬하고, 학회지나 누군가의 신간 같은 책들의 포장을 뜯고, 책꽂이에 자리를 만들어 꽂으면 끝나는 간단한 일이었다. 은주는 잠시 눈을 들어 교수를 바라봤다가, 다시 칼날을 움직여 소포를 여는 데에 집중했다. 교수 연구실에는 그의 취향인 듯한 뉴에이지가 은은한 음량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은주에게 경음악이구나 이상의 조예는 없었다. 은주는 교수가 재촉하지 않을 즈음까지만 뜸을 들이며 그것을 잘라내고, 에어캡에 싸인 책을 꺼냈다. 얇은 시집이었다.
“네.”
거짓말은 아니었다.
무언가를 쓰고는 있다. 계속은 아니고, 시일 때도 있고 시가 아닐 때도 있었다. 한참 잘 써질 때가 아니어도 시인은 시를 적어내려야 한다는 게 그 교수의 지론이었으나, 은주는 한 번도 자신을 시인으로 소개해본 적이 없었으니 괜찮지 않을까 생각한다.
“전일제 일을 소개하는 바람에 사실 신경쓰였거든, 일에 치여서 할 일을 못 하는 건 아닌가 하고.”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군의 본업을 잊어서는 안 돼.”
본업(本業)이라는 건 대체 뭘까. 오랫동안 그것은 학생(學生)으로 좋았던 게 아닌가, 은주는 대꾸없이 생각했다.
다른 한편으론, 한 교수에게 당선 소식을 알렸더니 에이플을 줄 테니 강의는 출석하지 말라고 부탁받은 일을 떠올려보기도 한다. 많이 줄었다곤 하지만, 화려한 등단을 꿈꾸며 글을 준비하는 지망생들은 여전히 있었다. 학과의 입장에서는 등단에 성공한 이들의, 그리 성공적이지 않은 실상을 비밀로 하고 싶었을 것이다. 별 것 아니었다곤 말할 수 없지만, 신춘문예에 당선된 것만으론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단 것을 은주도 알고 있었다. ……확실히, 그네들에게 좋은 롤 모델이 되어줄 수는 없었으리라 생각해본다.
“본업, 이요.”
은주는 곱씹는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가, 말꼬리를 흐린 것을 들키지 않게 도와주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지금 직업을 묻는다면, 조교 일을 하고 있다고 대답하리란 생각엔 변함이 없다. 어쩐지 공모전보다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경우가 많은 후배들의 전화를 받고, 서류를 처리하고, 또 그런 후배들의 전화를 받고, 그네들이 받을 점수를 입력하기도 하고, 서류를 받고, 또 전화를 받으면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으로 가져본 일(業)이었다.
교수의 의중은 알겠지만, 잠깐의 아르바이트 정도로 여기는 것은 아니다.
“그래. 신간을 내면 좀 가지고 오고. 제자 책을 서점에서나 발견해야겠나?”
“하하, 네.”
그게 아니더라도, 이번엔 거짓말에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연재한 로맨스 소설을 갖다 드리긴 어려울 것 같아서 말이다.
“기대 감사합니다, 교수님.”
짧은, 하지만 꼬리가 긴 대화였다.
은주의 것이 아니었던 누군가의 신간은, 책장 대신 교수의 책상 위에 읽기 좋게 올려놓았다.
삑, 도미솔.
올해 들어, 은주는 여름을 부쩍 좋아하게 되었다. 유난히 매운 더위에 반한 것은 아니고, 해가 길기 때문이다. 덕분에 현관에 들어서며 손수 불을 켤 필요가 없는 것이다.
퇴근길에 편의점에서 맥주를 몇 캔 사들고 돌아와, 곧장 냉장고로 향한다. 요리에는 취미가 없었기에, 냉동실에는 떠먹는 아이스크림 한 통을 빼면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다. 은주는 사온 맥주캔들을 차곡차곡 집어넣고, 그 중 두 캔만 꺼내들고 문을 닫았다. 당장 마시지 않을 캔은 소파 옆에 내려놓고, 그 캔의 곁에 앉아 TV를 켠다. 막 1회말이 시작되고 있었다. 여름의 저녁 해와 TV의 흐릿한 불빛에 기대, 칙, 가볍게 풀탭을 당긴다. 차가운 탄산이 마른 목을 긁고 내려간다.
짧은 대화도, 긴 대화도, 조용한 대화도, 시끄러운 대화도 이 집 안에는 없다.
때때로 박진감있게 숨을 죽이거나 격앙된 음성을 터뜨리기도 하는 중계방송과, 캐스터와 해설위원 사이의 대화를 별 일 없이 엿듣는 은주만이 있을 뿐이다. 은주는 맥주를 한 모금 더 홀짝이며, 빈 뱃속에 차가운 변명들을 부어넣었다.
눈여겨보는 팀이 없진 않았지만, 특별히 응원하는 팀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연고지가 없으니 어쩔 수 없다.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도 비슷하다. 당연히 처음에는 돈벌이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글자로 된 비유로나마 말을 돌리고, 미화하면, 이 세상도 조금은 정을 붙일 구석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10대의 은주에게, 보이는 대로의 이 세상을 감사히 여길 여유는 없었다.
그래서 뭐,
아무 문제도 없다.
지금이라고 온 세상이 사랑스럽게 보이냐면, 그건 성인(聖人)이나 할 법한 거짓말이 되겠지만
적어도, 집 안에 없는 것이 그리워야 할 필요는 없었다.
바쁜 듯 바쁘지 않은 듯 하루하루는 평온하게만 흘러가 주었고, 은주는 분명히 지금을 좋아했다.
지금의, 하루의, 물기가 맺히기 시작한 맥주캔의 감촉과, 한 글자도 미화할 필요 없이 쉬는 것으로 족한 잠시를.
안녕(安寧).
행복하다고 말한대도, 이상하지 않다.
- 얼굴 없는 그대(120815~21)
- 조난(120819)
은주는 주욱 왜소한 아이였다가, 중학교 3학년 때 키가 훌쩍 컸다. 그 즈음부터 시설의 형광등 갈기를 도맡아하게 되었다. 여느 보육시설이 그렇듯 그리 풍족하진 못했지만, 동화책에서 나올 법한 학대와 홀대가 넘치는 곳도 아니었다. 은주는 늘 배를 곯지 않았고, 먹은 만큼 꼬박꼬박 자랐다……최선을 다해서, 자랐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른들의 눈에 거슬리지 않는 것과 학업, 그리고 또 다른 일을 동시에 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시설을 나오게 됐을 때 누군가가 요즘 애들은 빨리 크네, 하고 질렸다는 듯 혀를 찬 기억이 있다. 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진 은주는 그런가요, 하고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 웃기만 했었는데.
요즘 아이들은, …….
이번엔 은주가 속으로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遭難
P. Cup
몇 번인가, 서 있는 것만으로 지하철 자리를 양보받은 일이 있다. 평균 이상의 키와 20대 후반에 접어든 나이, 거기에 남자라고 하는, 날 때부터 가진 성별이 줘야할 약간의 위압감도 은주의 흐린 인상을 어떻게 해주진 못했다. 적어도 은주의 첫인상은 누구에게나 무해(無害)하다. 그 인상 속에 포장된 은주의 내용물 또한 누구에게 해를 가하거나, 폐를 끼치거나, 그 외의 나쁜 의도를 가진 일은 아마 없었다고 생각한다―아마도 그렇다는 이야기다. 누군가에겐 가해자가 되었을지도 모르고, 그 일은 잊어버렸을 테다―.
다시 말해 지금, 그렇지 않은 인상의 그렇지 않은 의도를 가진 무리들과의 조우는,
"하하."
서먹한 일이다.
한 아이가 말을 건 것이면, 잔돈 정도는 적선하는 느낌으로 건넸을지 모른다. 두 아이였다면 바로 경찰을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셋과 멀리서 망을 보는 아이 하나, 지리적 유리점도 없는 지금의 경우엔 어느 쪽도 할 수 없다. 잔돈을 내어주면 지갑을 원할 것이고, 경찰을 불러봤자 도착하기 전에 충돌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들은 이런 식의 탈선이 처음인지 잔뜩 긴장해있다. 자칫 잘못하단 무슨 큰 사고를 칠지 알 수 없는 나이로도 보인다.
그네들이 가난하고 고달프기에 이렇게 은주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폭력은 좋아하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한 은주는, 별 다른 항의 없이 지갑에 든 현금을 한꺼번에 꺼냈다. 지폐 뭉치에 아이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에 은주는 속으로 한 차례 더 혀를 찼다. 돌아다니다보면 어딘가에 ATM기가 있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을 하며…….
그 찰나,
"져-기요."
불쑥 여자의 목소리 하나가 이 조우의 현장에 끼어든다.
"아, 네."
……그 생각과 함께, 은주는 도로 지갑을 접으며 여자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무언가 프린트된 노란 티셔츠에 시원한 흰색 핫팬츠를 받쳐입은 아가씨였다. 발음이 조금 부정확하다 했더니 반쯤 녹은 아이스크림을 손에 들고 있다. 요상하게 생겼네, ○데 스○류바, 하는 그 아이스크림이 아닐까 추측해봤다.
"거기서 뭐 하고 계세요?"
예의바르고 공손한 목소리였지만, 아이들에 둘러싸여 앉아있는 자신을 넘겨다보는 눈에는 의심이 느껴진다. 넘겨다보았는지, 이 쪽의 분위기를 의심하고 있는지는 그저 피부에 닿는 낌새가 그렇더라는 것 뿐, 그녀의 눈초리는 선글라스에 가려져있다.
"아……."
은주는 괜히 그녀가 말려들어 곤란해지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제대로 대답을 마치는 대신 잠시 아이들―이제 와서 말하자면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긴 하지만, 어른이 아니긴 하니 아이라고 해두자―의 낌새를 살펴본다. 가장 긴장해있던 아이 하나가 도망치고 싶어진 듯 불안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자 가장 키가 큰 아이가 그 아이의 발을 꾹 밟는다. 제법, 꽁초라도 많이 비벼꺼본 발놀림이다. 이 흥깨진 약탈을 계속해보겠단 의지가 있는 모양이었다. 거기에는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그러느라 은주가 포위를 평화롭게 빠져나갈 틈이 한 발짝 벌어진 것까진 생각에 미치지 못했나보다.
"미안해요, 다들 기다리겠네요. 지금 갈게요."
말하면서 은주는 구부정하게 앉아있던 좌상에서 몸을 훌쩍 일으켰다. 갑자기 눈높이가 비슷해지자, 발을 밟느라 자세가 흐트러진 쪽이 흠칫 어깨를 틀어주었다. 집어넣었던 지갑에서 만 원 짜리 한 장을 꺼내 쥐어준 것은 그냥, 다음 피해자가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빨리 오세요."
팔짱을 낀 채 서 있던 여자가 가볍게 말을 맞춰주었다. 거리를 좁히고 보니, 아이스크림을 녹이던 입술이 유난히 붉었다.
- 심해어(120826)
우연(偶然)은 그 뜻 그대로 늘 예고없이 닥치기에, 약간의 피로가 따르게 마련이다. 어떤 사람인지,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지, 그래서 앞으로 저와 이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당시 당장에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지고 난 연(緣)이 많지 않았기에 그 긴장감에는 단련이 된 편이지만, 그런 은주라고 해도 그 다음이 좋았다. 그것보다는 그 다음의 다음이. 만남을 거듭할수록 경계가 낮아지고, 신경이 느슨해지고, 어깨에 들어간 힘이 빠져나간다. '아는 사람'이라고 안심하게 된다. 예기치 못하게 일상에 끼어든 사건 사고가 아닌, 하루의 일정을 한 칸 비워서 서로에게 자리를 내어 준다는 점이 그랬다. 은주에게는 그 자리가 피로감의 보상처럼도 느껴졌다. 근래에 ‘아는 사람’이 된 밀화와의 술자리도 그런 자리 중 하나였다.
그리고, 밀화가 취했다.
深海語
P. Cup
은주가 눈을 뜬 것은 새벽 무렵이었다. 나쁜 꿈을 꾸지도, 시끄러운 알람에 잠을 방해받은 것도 아니었으나 어쩐지 조금 괴롭다. 시간대 특유의 까슬한 추위 탓이었고, 약간의 숙취도 있는 것 같다. 은주는 밀려오는 두통에 작게 미간을 좁히며 주변을 더듬었다. 손끝에 안경이 툭 걸렸다, 슥 멀어졌다. 이제는 좋든 싫든 몸을 일으켜야 한다. 혹여 체중으로 누르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안경으로 추정되는 물체에 손을 뻗는다. 손가락이 닿자 다시 멀쩡한 안경이 된다. 귀에 걸쳐 쓰자 손가락으로 문질러 놓은 듯 했던 시계가 선명해졌다. 그리고 잠시 당황한다. 깨어난 곳은 은주의 집이 아니었다. 그 곳은 밀화의 집 거실이었다.
경위는 이렇다.
솜은 물에 젖으면 무거워지고, 사람은 술에 절으면 무거워진다. 은주는 고개를 못 가누는 밀화를 부축한 채 술집을 나와, 밀화가 부르는 주소대로 택시를 타고, 본의 아니게 집 안에 들어서게 됐다. 집을 둘러볼 새도 없이 은주는 물었다. 형. 침실이 어디에요. 그 즈음 밀화는 술투정을 시작했다. 은주 너, 가려고 그러는구나. 그렇죠. 가면 안 되는데? 형이 이렇게 취했잖아. 취한 사람을 버리고 가는 건 나쁜 일이야. 정의의 이름으로 용서하지 않을 거야 어쩌고저쩌고. 버리고 가는 건 아니에요, 형. 여기 형 집이거든요. 그래? 그래도 가면 안 돼. 취한 사람을 상대로 대화를 시도한 은주의 잘못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이 시간에 다시 택시를 타고 돌아가 빈 집에 들어서는 것은 은주도 달갑지 않았다. 할증이 풀리지 않은 택시비도, 깜깜한 집 안에 들어서 신발을 벗고, 불을 켜고, 빈 소파를 마주해야 하는 아주 어려운 일도. 갈 거야? 그 때 조용하던 밀화가 물었다. 은주는 조금 생각하다가 아니요, 하고 대답했다.
그 결과, 생전 처음 보는 TV의 브라운관 너머로 은주가 은주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표정이 제법 멍청했다.
이불 한 장 없이 거실 바닥에서 잤으니 몸이 아플만도 했다.
"……."
밀화는 소파에 뺨을 붙인 채 자고 있었다. 침실이 어디냐고 다시 한 번 물어볼걸 그랬다고, 조금 반성한다.
은주는 길게 기지개를 한 번 펴고―등에서 썩은 나무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밀화의 발치에 등을 붙이고 앉았다. 그제야 천천히 집 안을 둘러볼 수 있었다. 그리고 곧 왜 그 집을 은주의 아파트로 착각했는지 깨달았다.
단순히 잠에 취해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냄새 때문이었다.
혼자 살기에는 평수가 있는 집이었다. 단순히 넓기만 한 것이 아니라, 방문의 개수와 가구의 규모 따위에서 공동생활을 위한 동선이 짜여있는 공간이란 느낌을 받았다. 부엌의 의자 개수로 보아서는 넷, 아니 세 사람 정도가 함께 살았을 것 같다. 그럼에도 보이는 문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한 뼘씩 열려있다……. 집 안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지만, 공기 중에서는 눅눅한 먼지 냄새가 났다. 은주는 그 냄새를 잘 알았다. 치우는 빈도에 비해 집을 어지를 사람이 부족하기 때문에 나는 냄새였다.
……한 사람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그러나 이 집에 밀화는 혼자 살고 있는 것 같다, 막연히 짐작해본다.
그 비효율에 자연히 따르는 위화감은, 본의아니게 은주도 아는 감각이었던 것이다.
그 때, 은주의 눈에 사진 액자 하나가 들어왔다.
텔레비전 위나 소파 위에 걸어둔 화려한 액자는 아니었다. 소파 옆 협탁에 올려진 액자는, 하마터면 보지 못하고 넘어갈 뻔한 작은 크기였다. 교복을 입은 남학생과 한 부부가 학교 운동장을 배경으로 서 있다. 세 명이었구나, 은주는 생각한다. 머리색은 지금같지 않지만, 가운데에 꽃다발을 들고 있는 남학생은 밀화와 흡사해 보였다. 왠지 오랫동안 들여다보게 된다. 눈에 들어오기는 우연히 들어왔으나, 쉬이 눈에서 뗄 수 없었다.
"일어났어?"
불쑥, 잠에 잠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 형."
깼어요? 으엉. 밀화는 하품이라도 하듯 그렇게 대답하곤, 소파가 불편했는지 일어나서는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어젠 너무 많이 마셨어. 그 얘기 어젯 밤에도 많이 했어요, 형. ……. 처음 지하철에서 만났을 때에 비해, 그 다음 날 새벽 편의점에서 만났을 때에 비해, 그리고 어젯밤 술집에서 만났을 때에 비해 또 한 번의 ‘다음’만큼 친근해진 목소리였다. 그리고 밀화는,
"삼촌이랑 숙모. 가운데가 나야."
은주가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알았던 것 같았다. 다행히 무례하다고 생각하진 않아준 듯 했다.
졸업식 때 사진이야. 눈이 내릴 거라고 해서 강당에서 하는 줄 알았는데, 하늘만 흐렸지 눈이 내리진 않더라고. 식 끝나고 보니까 두 분이 꽃다발이랑 우산을 같이 사오셨더라. 안 그러셔도 됐는데, 삼촌이 졸업 축하한다면서 오늘은 먹고 싶은 걸로 외식을 하자고……그런데 당장 뭘 먹을까 생각이 잘 안 나지 뭐야. 그래서 뭘 먹을까 고민하고 서 있는데……어쩌고저쩌고. 밀화는 그 사진을 찍게 된 비화에 대해 조금 더 들려주었다. 말하는 내내 밀화는 밝은 표정이었지만, 사진을 좀 더 찍어둘 것을 그랬다 말하는 목소리는 애틋하게도 들렸다. 은주는 그 모두를 조용히 들었다. 왜 부모님이 아니라 두 분과 살았는지, 지금은 어디에 계신지―혹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같은 것을 구구절절히 묻거나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밀화가 아주 간결하게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너무 내 얘기만 했다."
하고 밀화가 멋쩍어하며, 은주는 어때? 하고 부모에 대해 물었다.
"……저요?"
은주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응."
"저는,"
가져본 적이 없는 것이라, 좋은 기억도 나쁜 기억도 없다.
고개를 숙이지는 않기로 한다.
"기억나는 게 없네요. 시설에서 자랐거든요."
말하기 전에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할 기회는 충분히 있었다. 부모님은 이러이러해서 돌아가셨다던가, 혹은 일찍 이혼을 하셨다는 둥 그럴듯한 사연을 이야기하는 편이 더 좋았을 것도 같다. 하다 못해 흔히 있는 가족 이야기에 대해 들은대로 주워섬기는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은주는 그렇게 하는 대신 유년기를 간결하게 요약해 말했다. 밀화가 은주에게 아무 것도 둘러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집에서 은주가 아는 냄새가 나기 때문인지도, 밀화가 은주처럼 빈 집에 남겨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 서로 숙취에 잠겨있는 탓인 것으로 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
밀화는 오래 말이 없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너 혼자……겠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말은 거의 물 밑에서 속삭이듯 했다.
집 안은 섬처럼 조용해졌다.
은주는 그 고요에 대해 알았다. 밀화밖에 살지 않는 집이고, 밀화는 은주가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고, 은주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은주가 입을 열 때까지 주욱, 이 집 안은 이렇게 조용할 것이다. 보통 말하기를 기다려줄 사람이 없다는 점만 빼면, 그런 집 안에는 익숙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빈 집은 늘 그랬다.
"그럼요?"
은주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밀화를 보았다. 그리고 빤히 되물었다.
그럼 혼자가 아니겠느냐고, 조금 따지는 꼴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혼자가 아닐 리는 없었다, 은주를 가족으로 여긴 유일한 사람마저 작년 겨울에 죽었으므로.
외롭지 않았던 적이 없어 외로움은 느껴본 적도 없는 양, 은주는 무던히 웃어보였다.
"……."
"이상한 대답을 해버렸네요. 저도 혼자서 지내고 있어요."
밀화는 무어라 말하려는 듯 했다. 하지만 은주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곤란하게 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혹 밀화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슬슬 환기가 필요할 때였다. 형, 저 욕실 좀 쓸게요. 어젠 씻지도 않고 잤네요. 괜히 발을 느리게 움직여 소음을 늘린다. ……응, 그 쪽 문이야. 외딴 섬 같던 집 안의 공기가 한 걸음 한 걸음 흐트러지고, 새벽을 대신해 아침의 공기가 흘러든다. 네. 은주는 욕실 옆의 장식장을 열 뻔 하긴 했지만, 곧 그 옆의 욕실로 들어갔다.
세면대 앞에 서서 물을 쓰기 시작할 즈음, 등 뒤에서 해장은 뭘로 할래? 하는 물음이 들려왔다.
손가락이 참 예쁘시네요, 이름 만큼이나요.
누가 왜 갖다 붙였는지도 모르는 이름이다. 하지만 은주는 선의로 건넨 칭찬은 칭찬으로 듣고 칭찬으로 돌려줄 줄 아는 사람이었다. 다음에 밥을 사고 싶다며, 핸드폰이 내밀어졌다. 좋죠, 저야. 은주는 거리낌 없이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가 입에 올렸던 그 손가락으로 액정 위를 더듬어 번호를 누르고, 그가 빗대 칭찬한 이름 세 글자와 연결한다. 누가 지었는지는 영영 알 수 없겠지만, 결국 그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것은 25년째 은주 자신이라는 싱거운 이야기다. 무언가 연락처를 저장하는 방침이 있을까 싶어, 이름과 연락처 한 칸만을 채운 등록 창을 띄워둔 채 핸드폰을 달복에게 넘긴다. 여기요. 그 즈음,
달복의 손가락 몇 개가 불쑥 은주의 손가락을 붙잡았다. 낚아채서 무엇을 어떻게 했다기보다는, 그저 형태를 더듬어 본 것 같았다.
"밥 두 번 살게요. 아니다, 세 번."
……그런가.
이름 쪽의 칭찬이 주(主)가 아니었나보다, 은주는 고개를 기울일 뿐이었다.
오인의 끝
P. Cup
"건배?"
은주가 달복을 처음 만난 것은 어떤 바에서였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라는 진부한 기대를 안고 바를 찾는 사람이 얼마나 남아있는진 알 수 없지만, 일단은 그런 일이 소설이나 드라마에서처럼 빈번히 일어나는 곳은 아니었을 것이다. 공용 화장실 문을 사이에 두고 있었던 두 사람 사이의 해프닝은 짧은 마침표로도 끝날 수 있었지만, 왠지, 감사하니 술은 제가, 실례했으니 다음에 밥을, 그러면 언제 또 뵐까요, 하며 그 때 그 때 꼬리를 늘이고 여러 개의 쉼표들로 늘어났다. 은주는 그런 달복이 기꺼웠다.
선이 굵고 큼직큼직한 이목구비에 늘 말끔히 밀려있는 스킨헤드. 키가 겅중 커서 멀리서 손을 들어보여도 알기 쉽고, 마주 보려면 눈을 조금 들어야 한다. 물론 은주는 그가 이국적인 외모를 가졌다는 생각도 했는데, 다소 토속적인 발음의 이름을 들은 뒤부터는 그냥 그런 사람이구나 하고 그 이상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그는 붙임성이 있는 한편 보기보다 세심한 사람이었고, 연하에게도 깍듯하게 예의를 지켜주었다. 보통 상대에게 맞춰주는 편이었던 은주로서는, 그가 자신에게 맞춰주고 있다는 기분이 싫을 리 없었다.
"매번 얻어먹는 것 같아요, 달복 씨."
빠르게 맥주 거품을 한 입 베어물고, 은주가 인사를 했다. 그는 밥을 살 때도 꼭 반주를 함께 주문했는데, 은주가 술자리를 좋아한단 인상을 받아서인지 그도 술을 좋아하는지는 몰랐다. 어느 쪽이든, 목만 축이는 수준이었으니 폐가 되진 않을 것 같다.
"괜찮아요, 얼마 전에 돈 들어왔거든요. 아직 남아 있어요."
"와……자주 들어오네요."
이 대화도 왠지 여러 차례 주고 받은 것 같지만.
은주는 그에게 실제로 돈이 자주 들어오고 있는지 어떤지는 몰랐으나, 달복이 인색하지 않은 성격이란 느낌만은 받고 있었다. 후배가 선배에게 밥을 사는 것도 드문 일이고, 달복과의 식사는 줄곧 편안하고 기분 좋은 자리였다. 그러다보니, 그의 지갑에만 기대는 뻔뻔한 일이 잦아진 것이다. 달복이 은주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신경을 써 준 덕분인 것을 은주도 모르지는 않았다.
"저도 고료 나오면 한 턱 내야겠어요."
연륜과 풍요에서 나오는 여유일 것이라, 막연히 생각한다. 그의 배려에 덩달아 은주의 마음도 조금 느슨해지는 감이 있었다.
"고료요?"
"네! 얼마 전에 서평 하나 써서 넘겼거든요."
거의 독후감이 됐지만, 뭐라고 안 하는 걸 보니 반품받진 않겠죠……. 은주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말하곤, 물을 마시듯 맥주잔을 비웠다. 달복이 바로 잔을 채워주길래 한 손으로 잔을 든 손을 받쳐 예의를 차린다. 달복의 잔도 채워줄까 하고 보니 잔에 아직 맥주가 반이 넘게 남아있다. 은주는 독촉하거나 첨잔하는 일 없이 천천히 기다릴 생각이었다. 허나 은주가 잔을 본 것을 눈치챈 듯, 달복이 부지런히 맥주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천천히 마시셔도 되는데. 아뇨,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니에요. 목이 조금 말라서요. 아하……. ……. 저 달복 씨, 술 편하게 받으셔도 되는데. 은주 씨도 두 손으로 받으면서요. 네? 그야, …….
음.
"학번이 어떻게 돼요?"
"……학번요?"
나이를 물은 것이란 걸 한 박자 늦게 깨달은 듯, 달복이 멋쩍어했다. 스물 세 살이에요, 하고 학번 대신 바로 나이를 알려주었다.
은주는 그의 대답에 놀라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이내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 대답 만으로, 은주는 달복에 대해 많은 것을 오해했단 사실을 깨달았다.
"그럼 제가 한 잔 드려야겠다. 달복 씨는 두 손으로 받는 걸로."
살갑게 말하면서, 은주는 맥주병을 공중에 들어올렸다.
테이블 위에 빈 맥주병이 하나 더 늘었다.
이력서 내지 명함을 주고받은 것은 아니니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 맞겠지만, 막연히 그런 사람이겠거니 생각하고 짐작해버린 것들의 대부분이 스물 세 살의 나이와는―그에게는 실례겠지만, 은주는 적어도 서너 살은 더 그가 연상일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맞지 않는 일들이었다. 은주는 그가 대학 대신 군대에 다녀왔다는 것도, 자취 내지 하숙 비슷한 것을 하고 있다는 것도, 술과 고기가 몇 점 더 오간 뒤부터는 여지까지 은주를 위해 다소 무리하고 있었다는 것도 눈치챘다. 은주는 그가 남은 고기를 혼자 굽도록 내버려둔 채 잠시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대체 뭘 믿고 있었던 걸까.
인상만을 가지고 사람을 멋대로 판단하는 것은 얼마나 실례인 일인가.
물론 은주가 인식하고 있었던 달복이 전부 사실과 다른 것은 아니었다. 달복은 스물 세 살이든 스물 아홉 살이든 여전히 은주에게 예의바른 사람이었고, 그와의 만남은 여전히 기꺼운 것이었으며, 그 자리가 편안한 것은 달복의 세심한 배려 덕분이었다. 은주 씨, 더 시키실래요? 아, 아뇨. 있는 것만 먹으면 될 것 같다. 달복 씨는요? 더 먹어요. 많이 먹고 쑥쑥 더 커야죠. 전 충분히 클 만큼 큰 것 같은데. 은주 씨는, 은주 씨도 작진 않지만, 마르신 거 같아서. 고기 한 번 사고 싶었어요. 아, 몇 개는 좀 탔네요. 탄 건 몸에 나쁘대요. ……. 인색하지 못하고 친절한 성격인 것도 변하진 않았다.
면목이 없는 것은, 두 세 살이나 어린 그에게 은주 쪽에서 연상의 여유를 보이지 못한 점이다.
별 생각없이 학번을 물은 것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무언가 그에게 또 무례한 실수를 한 것은 없었을까. 은주는 급하게 기억을 되감아봤다.
"은주 씨?"
일시 정지.
은주는 들고 있던 밥공기가 그 사이 빈 것을 깨달았다.
"아, 네."
"괜찮으세요?"
그가 은주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 지금은 눈에 잘 보였다. 그 모습에 연륜이나, 풍요나, 은주가 착각하고 있던 어떤 대단하고 여유로운 아우라같은 것은 없다. 달복에게 실망했다는 것이 아니다. 은주는 감히 누구를 측은히 여길 입장도 못 되었다. 그냥, 한 번 어떤 사람이라 잘못 믿어버린 뒤로는 그가 무엇을 해도 어떤 사람으로만 보일 수 있는 걸까, 은주 스스로의 안일함에게 당황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눈 앞의 달복은 은주의 손가락을 만졌던 언젠가처럼, 조금 부끄러워 하고 있는 청년에 불과했다. 뭔가에 잠시 눈이라도 멀어있던 게 아닐까, 은주는 생각했다. 정말 드물게도, 살아온 시간동안 '잘 한다'고 믿고 있던 일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낯이 뜨거워질 일이다.
뭐, 그가 그런 은주의 속까지 알 수는 없었겠지만,
괜찮다는 대답을 돌려주자 달복이 조금 웃어보이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계산하고 올게요. 천천히 나오세요."
까무잡잡하고 커다란 손이 두루말이 휴지 위에 놓여있던 계산서를 집어든다.
은주는 그 손을 잠시 눈에 담았다.
"저, 달복 씨."
이번엔 은주 쪽에서 달복의 손목을 붙잡았다.
"여긴 내가 살게요.
……그 다음 번도요."
쉼표의 꼬리를 하나 늘렸다.
혼자 한 실례는 은주 혼자밖에 알지 못하기에, 눈을 바로 뜨고 만회할 기회도 은주가 만들어야 할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오인(誤認)은 마치기로 한다.
"……웬 거야?"
"교수님이 가져가라고 하셔서요."
밀화가 찌개가 많아졌다며 식사에 초대했다. 사실 가정식을 1인분만 준비해 먹는 것만큼 맥빠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애초부터 일을 만들지 않고 은주처럼 저녁을 맥주로 때우느니, 사람을 초대하는 편이 훨씬 현명하고 건강에도 좋다. 심지어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기에, 은주는 순순히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빈 손으로 가는 대신 과일……이라도 가져가기로 정한 것이다. 정확히는, 오늘 떠맡게 된 열대과일이다. 교수의 병문안을 갔다가 얻어온 애매한 전리품이었다.
파인애플을? 하는 눈으로 밀화는 파인애플과 은주를 번갈아 보았다.
"파인애플을?"
네. 파인애플을.
오렌지의 시간
P. Cup
"하나,"
밀화가 도마와 식칼을 가져다주었다. 보통 과일을 깎는 칼은 과도라고 하지만 그것을 들이대기에는 파인애플의 위용이 너무 대단했다. 급식에 나오는 통조림이나 뷔페의 디저트 코너에 있는 생과일 밖에 먹어본 적이 없어, 어차피 은주도 혼자 있었다면 그것이 썩을 때까지 방치하다 버려야했을 것이다…….
"둘……."
애석한 점이 있다면 밀화도 파인애플을 어떻게 손질하는지 잘 모르더라는 것 정도.
어떻게 먹는지 아세요? 아니. 먹어는 보셨어요? 응, 숙모가 잘라줬던 거 같은데. 어떻게 자르는진 본 적 없으세요? 모르겠는데……껍질을 벗겨냈던가? 아님 자른 다음 껍질을 벗겨냈던가? 락앤락에 담아서 주셨던 것만……락앤락이 어디 있더라. 잠깐만. 식칼을 만져본 기억조차 희미한 은주였지만, 어쨌든 칼자루는 은주에게 넘어와 있다. 커다란 파인애플과 칼을 번갈아 보며 조금 고민하다가, 일단 반으로 잘라보자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셋."
푹.
무식하게 칼날을 꽂아넣었을 때, 은주는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제대로 잘못 박혔다.
단단한 과피가 기다렸단 듯이 칼날을 물고 놓아주질 않았다. 파인애플 자르는 방법 같은 거라도 검색해보고 올 걸 그랬나. 스스로의 안일함에 조금 반성하며, 은주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몇 번 흔들고 비틀어봤다. 자칫 힘이 잘못 들어갔다간 둘 중 하나가 망가질 것 같았다. 파인애플이야 아무래도 좋지만 식칼이 망가지면, 요리를 자주 하는 듯한 밀화에게 폐가 된다. 엉킨 실의 매듭 따위를 끊어내듯 간단히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떻게 하면 풀릴까…….
"주야 어때, 잘 돼 가……
……아니구나."
밀화가 투명한 밀폐용기의 물기를 털며 물어왔다가, 은주가 과일을 끌어안다시피 하고 있는 꼴을 보고 바로 자문에 자답한다. 힐끔 돌아보니 용기를 물에 씻어온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 손질되어 들어가야할 파인애플은 중앙에 칼이 하나 박혔다는 점을 빼면 처음 들고 왔을 때에 비해 별 진전이 없다. 극적인 진전을 가져올만한 도구―식칼 역시 지금은 사용 불가 상태다.
"일단 뽑아보자, 내가 해볼게."
"형이요? 괜찮겠어요?"
"……음,"
밀화는 자신이 없었는지 대답하기 전 잠시 간격을 뒀지만, 곧 가슴을 크게 펴며 대답했다. 내가 형이잖아? 형이 어떻게든 해줄게. ……. 은주는 별 말 없이 밀화를 올려다봤다가, 그래요,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밀화의 말이 굉장히 든든하게 들렸다는 것은 아니지만, 혼자보다는 둘이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럼 혹여 망가지는 것이 식칼 쪽이더라도 미안한 기분도 반으로 줄어들겠지. ……그럼 형이 잡아 주실래요? 칼은 제가 뽑을테니까. 물으며 파인애플을 내민다. 밀화가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마를 사이에 두고 두 남자가 마주보고 앉았다.
"……."
"……셋 셀게요."
하나,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 은주는 칼자루를 양 손으로 감싸쥐었다. 그 사이 오히려 더 깊이 박혀버린 바람에 한 손으로는 무리였다. 둘, 각도를 비스듬히 하면서, 천천히 손끝에 힘을 싣는다. 셋――콰직.
콰직, 소리와 함께 파인애플이 배를 드러냈다. 은주는 살짝 균형을 잃었다. 눈을 감기 직전, 안경에 과즙이 몇 방울 튀었다.
칼날이 묻힌 채 망설이던 자리로부터, 약간 으깨진 과육이 물기에 번들거리고 있었다. 밀화도 은주도 상황을 파악하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려, 거실은 조용했다. 밀화가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돼먹은 파인애플인지, 누가 끼얹기라도 한 듯 은주의 셔츠에 과육 파편과 과즙이 튀어 선명한 얼룩이 져 있다. 은주는 힐끔, 거실의 TV를 통해 피해상황을 확인했다. 어쩐지 이 TV를 통해 만나는 한 은주씨는 늘 어딘가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다.
……아, 하하.
누구에게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은주도 주저앉은 채 허망하게 웃었다. 뺨에 튄 과육을 긁어내 입 안에 넣었다. 엄지로 가볍게 입술을 문지르며, 맛을 더듬었다. 작은 조각이었지만, 괴이할 정도로 달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응, 여보세요?"
J가 다급히 대답한다. 가혹한 감정선에 시달리던 연재 내내 한 번도 울지 못했던 눈을 천천히 깜빡인다. 덤덤한 목소리에, 말라있던 눈가에 온화한 목소리가 비처럼 떨어지고, 감정의 웅덩이를 하나 만든다. 때늦은 봄비가 잊은 죄처럼 수면을 이따금 두드렸다. J는 핸드폰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준다. 손가락 끝이 천천히 아파왔다.
J, 나야. 잘 지냈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두 사람이 지켜온 2월만큼 평온했다.
"응? ……응."
대답하며, J는 잠시 핸드폰을 뺨에서 떼고 액정을 확인한다.
틀림없는 G의 번호였다. 그런데, 지금은 2월이 아니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지 않은지도 꽤 되었다. 거리에 화려하게 포장된 초콜릿 매대 같은 것도 나와있지 않다. J는 무릎까지 떨어지는 원피스 위에 얇은 봄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하지만 일순, 봄볕에서 엷은 추위를 느낀다.
그는 지금 반칙을 한 것이다.
"G는, 잘 지내?"
하지만 사실, 그와 그녀가 그런 규칙 따위를 정했던 적은 없다.
사월의 밸런타인
P. Cup
올해 봄부터 연재한 로맨스 소설이 18화를 끝으로 완결되었다. 민철로부터 온 축하 메일―이라고 해야하나, 어쨌든 완결 이후에 온 메일―에 답신하면서, 은주는 저녁 시간을 한 번 비워줄 수 있는지 물었다. 일전에 자과대에서 대접받은 점심에 대해 답례하고 싶기도 했고, 손을 바쁘게 하던 취미 하나를 마무리하는 자리를 만들고도 싶었던 것이다. 민철은 3일 뒤 오후 시간을 비워주었고, 은주는 그 자리에 얌전히 앉아, 그와 마주하고 있다.
"……그렇게 끝날 줄은 몰랐어."
호칭도, 어미도 한결 간결해진 민철이 감상을 말했다.
독자나 등장인물에게 가혹하게 구는 취미를 가진 작가는 아니었지만, 민철의 반응에는 ㅎㅎ, 하고 짓궂은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보면, 일전에 그가 결말에 대해 물었을 때엔 말을 조금 돌려서 했던 적이 있다.
"전 제대로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초콜릿을 먹게 되거나, 먹지 못하게 되거나."
물론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지만.
헤어졌지만 1년에 하루 데이트를 하는 J와 G의 이야기. J는 G에게 초콜릿을 선물한 적이 없다. 결말은, G가 초콜릿을 먹거나 먹지 못하게 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라 공약한 바 있다. 마지막 편의 마지막 장면에서, 통화를 마친 여주인공 J는 카페에 들어가 아주 진한 핫 초콜릿과 초코 브라우니를 주문한다. 4월의 봄볕이 드는 창가에 앉아, 여전히 한 번도 울어보지 못한 눈으로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며, 그것을 천천히 목 너머로 넘긴다. 그건 J가 평소의 밸런타인 데이를 보낼 때면 G를 생각하며 하던 일이었다.
쓴 맛에 입 안이 얼얼해지더라도, J는 서러워하지 않는다.
"……그렇긴 하지만,"
민철도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처음부터 그렇게 끝내려고 했어?
음…….
누군가가 그런 댓글을 달았었다. J랑 G는 서로 좋아하는데, 당연히 합치는 게 정답 아닌가. 하지만 인사(人事)에 정해진 정답 같은 것은 없을 것이다. 절대적인 진리도, 영원히 성립하는 공식도, 모든 학자들이 지지하는 정설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에는 함부로 대입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에는 보편적인 관계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어쩌면 은주가 그런 보편적인 관계를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가진 어머니, 누구에게나 있는 아버지, 형, 오빠, 동생, 평범한 여자친구, 보편적인 연인……. 하지만 그런 것 없이도 은주는 불행한 적이 없었다. 외로운 적이 없냐면 그건 거짓말이지만, 은주의 지인(知人)들은 때문에 전부, 은주를 어떤 보통명사로 취급하는 대신 한 은주 그 자체로 대해주고 있었다. 민철이 은주를 그저 어떤 작가로, 은주가 민철을 그저 어떤 독자로 여기지 않는 것도 그런 맥락의 일 중 하나였을 것이다.
아마 앞으로도, 그 이유로 은주가 불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요?"
다시 결합하지도, 영영 헤어지지도 않은 채 끝내자는 생각은 했어요. 은주가 덤덤하게 대답하자, 민철은 잠시 생각하다가 그래, 하고 대답했다. 그 나름으로 은주의 방식을 납득해준 듯 했다.
민철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고마운 지인이었다.
뭐, 끝……은 죽기 전까지는 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장 그 티타임을 마친 뒤에 J가 택시를 잡아 G를 만나러 가거나, 새로운 인연을 기대하며 바다 여행을 떠나더라도, 문득 풋풋했던 시절이 애틋해져 눈가가 조금 젖더라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것처럼.
글로 쓰이는 마지막 장면이 되었을 뿐, 새드 엔딩도, 해피 엔딩도 아직은 말할 때가 아닌 것이다.
"제가 너무 떠든 거 같네요."
은주는 빙그레 웃으면서, 점원에게 손을 들어 음료 리필을 부탁했다.
점원이 다가오면, 아마 마시던 에이드 잔을 내밀며 탄산 음료의 이름을 말할 것이고, 민철에게도 음료 리필이 필요한지를 물을 것이다. 그가 무어라 대답하든 그것을 새겨들은 점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사라졌다가, 음료가 채워진 잔을 하나나 두 개 들고 돌아올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나면 아마 둘은 조금 더 한담을 나누다가 헤어질 것이다. 가지고 있던 고민이나 기분에 명쾌한 정답이나 모양 좋은 이름표가 따라붙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꼭 일어나야 하는 것도 아니다……그리고 그 뒤의 일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라고는 아무도 정해두지 않았다.
"차기작은?"
"아뇨, 당분간은 쉴 것 같아요. 곧 신간이 나와서."
"아, 그렇겠네. 완결났으니까?"
"……아. 이번 것도 계약을 하긴 했지만……책을 만지는 건 좀 더 나중 일이 될 것 같고요."
은주는 드물게 조금 뜸을 들이다가, 가방에서 투명한 비닐로 포장한 책을 내밀었다.
그건 수 년 전의 데뷔작이 실린 첫 시집이었다. 그에게 은주의 이름으로 나온 책들을 바리바리 포장해 보냈던 날에도 보내지 않았던, 유일한 책이었다. 그리고 은주의 책 중에 가장 얇은 책이기도 했다. 애장판이 나올 만큼 길고 치밀했던 로맨스 소설처럼 읽을 이야기가 많지도, 이번 연재작처럼 의아한 듯 흔해빠진 마지막 화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한 글자 한 글자에 은주가 사랑하려 애쓴 세상이 박혀 있다.
"형, 늘 감사드린단 말 한 번만 더 할게요."
그리고, 그래서,
"저, 실은 시를 쓰거든요."
그래서 에어캡에 두르고 소포지로 포장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이건 구간인데, 마음에 드시면 신간은 혹시 사주시지 않을까 해서…….
ㅎㅎ, 하고 또 한 차례 웃음을 흘려본다.
어느 밤, 다리에 쥐가 난 적이 있었다.
혼곤한 꿈에서 강제로 끌려나왔다. 눈물이 핑 돌 정도의 아픔이었다. 쥐가 났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어떻게 발을 뒤틀었지만 혼자 힘으로는 악화만 될 뿐이었다. 한 번 시작된 통증은 그냥 지나가듯 멈추지 않는다. 아프지만, 병도 부상도 아니기에 구급차를 부를 수도 없다. 견디는 것밖에 수가 없었던 은주는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아직 잠에서 덜 깬 몸에 힘을 넣어 어렵사리 뒤척인다. 웅크리고 있던 몸을 바로 펴고 누웠다. 몸이 삐걱거릴 때마다 종아리의 수축된 근육이 은주를 찌르고 괴롭혔다. 겨우 천장을 보았다. 후우, 어렵게 숨을 뱉는다. 조립이 잘못된 마냥 당기는 다리보다도, 뱃속을 허하게 하는 무력감이 은주는 싫었다.
너무 하찮은 아픔,
홀로 누워있는, 너무나도 커다란 침대.
그 순간, 그 방 안 그 세계에 은주가 아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은주 하나밖에 없었다.
마침표의 온도
P. Cup
"형, 약도 먹고 자야죠."
그에게 실례일지 모르겠지만, 밀화는 그렇게 별로 믿음직한 사람이 아니었다. 어떤 점에서 미덥지 못한가 하면 특히 몸을 돌보지 않는 밤낮의 아르바이트 일정 따위가 그랬고, 또한 은주가 없으면 저녁을 쉽게 거르는 일 따위가 그랬다. 은주도 밀화의 집에 들르지 않는 날엔 제대로 식사하지 않고, 은주가 밤산책을 하면서 그가 있을 편의점에 들리는 날도 적지 않으니 더욱 알기 쉽다. 그의, 그를 배려하지 않는 일상이 은주의 상념을 방해할 만큼 걱정을 끼친다든가 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아프다는 메시지를 받았을 때 아픈 모양이구나 알아서 잘 처신하겠지---하고 넘어갈 수는 없었더라는 말이다.
거기에 딱히 논리적인 이유는 없다.
은주는 그저, 아플 때에 혼자 누워있는 것이 얼마나 외로운지 알고 있을 뿐이었다.
"형?"
식사를 마친 뒤 도로 식탁에 뺨을 붙이고 있던 밀화가 겨우 실눈을 뜨며 응, 대답했다. 졸려요, 형? 아니……. 그러면요. 어어, 그러면……. 그냥 움직이기 싫은 모양이라고 파악하기야 쉬웠지만, 며칠이고 이렇게 늘어져 있을 게 아니라면 약부터 먹이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은주는 밀화를 일으켜 앉히고 손바닥 위에 알약들을 1회 복용량만큼 까주었다. 컵 빌릴게요. 응, 건조대에……. ……. 밀화는 알약 몇 개를 물과 함께 삼키곤 가볍게 미간을 좁혔다가 폈다.
"으아……."
"수고하셨어요."
"……? 뭐가,"
글쎄, 무심코 한 말이었기에 은주도 어깨를 으쓱했다. 열심히 죽과 약을 먹어준 것에 수고한 것으로 치면 될까. 약 먹는 거요? 하고 되묻자 밀화가 실없긴, 하고 고개를 벽에 툭 기댄다. 그래도 식탁에 엎드리는 것보다는 꼴이 나은 것 같다. 아직 약효가 돌았을 리 없지만, 죽이 들어갔기 때문일까 한결 편안하게 보인다. 은주는 죽집 봉투에 들어있던 종이 냅킨으로 적당히 식탁을 닦아낸다.
그러는 모양을 보고 있던 밀화가 너는, 하고 중얼거리듯 말을 뱉었다.
"너는……애가 너무 착한 거 같아."
하하.
알고 계셨네요. 태연히 대꾸하면서, 은주는 냅킨을 동그랗게 구겨 쓰레기통 쪽으로 던졌다. 슛을 쏘는 폼 같은 것을 진지하게 잡지 않아도 훌륭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다. 종이뭉치는 쓰레기통의 벽을 살짝 건드리며 간단히 골인했다.
'착한 아이'가 되는 일만은, 어린 시절부터 오랜 특기였다.
"그런데요, 형."
"응?"
"이사 가시나봐요."
그리고 같은 이유로, 은주는 눈치가 빠른 아이였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터득한 재능이다.
사실 눈치를 볼 것도 없이, 밀화가 집 안의 먼지를 쓸어내고 잘 쓰지 않는 물건들을 종이 박스들에 정리해 넣었다는 것은 집을 조금만 둘러봐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바뀐 계절의 새벽 바람에, 무리하게 짐정리를 한 피로가 겹쳐서 온 몸살일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한다. 은주는 열이 오른 노트북에서 손가락을 잠시 떼며 말을 꺼냈다. 모쪼록 그럴지도 모르지---생각한 것은 빼고, 그렇겠구나---하고 알아버린 것까지만. 그래서 그 말의 어미에는 물음표 대신 온점이 하나 찍혔다.
"어,"
알았어? 밀화가 웃는 소리를 냈다.
밀화는 말문을 터주면 말이 많아지는 사람이었다. 이사 갈 마음이 들었다. 집을 내놓을 거다. 예전부터 생각했던 일인데 계속 미뤄뒀다. 이제는 홀로서기를 해야 할 것 같다. 모아온 돈도 있고, 새 집은 작아도 될 테니까, 집이 팔리면 아르바이트를 하나 그만둬야지. 멀리 여행을 가고 싶다. 사진을 많이 찍고 싶어. 제니한테도 좋은 렌즈를 하나……. 웃음소리 뒤로 그런 말들이 잠꼬대처럼 이어진다. 베개에 뺨을 붙이고 있는 데다 약기운이 돌기 시작하는 바람에, 말들의 절반 즈음은 밀화의 입 속에서 웅웅 돌기만 했다……그래도, 은주는 그 대부분을 무리 없이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랬지만, 은주는 노트북의 화면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나 또 너무 많이 말했지. 취한 거 같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주의 커서는 꼼짝하지 않고 그 자리에 깜빡이기만 했다.
"……."
깜빡, 깜빡.
"……주야?"
깜빡, 깜빡, 깜빡.
은주는 손가락이 닿아 있는 기본자리의 자판이 유난히 발열하고 있단 생각을 한다.
밀화가, 아니라고 대답해주길 기대했던 것 같다.
"형."
"...응?"
실망했어요, 라고는 말할 수 없다. 두고 가지 말라고 빌 수도 없다. 나랑 살래요? 라고도 물을 수 없다. 밀화를 잠깐 놀라게 할 뿐 달라질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주가 묻기 전에 밀화가 무언가 말해줬다면, 혹은 무언가 밀화에 대해, 은주에 대해 물어줬다면, 지금처럼 슬프지는 않았을 것 같다. 아니……차라리 오늘 은주를 부르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이 집의 공기에서 다른 맛이 나는 것을 깨달을 필요도 없었을 텐데, 생각한다. 그저 생각할 뿐이다. 덧없는 생각이었다.
생각들을 곱게 갈무리해 혓바닥 뒤로 삼킨다. 그 즈음에야, 숨 쉬는 것을 잊고 있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주야, 왜 그래……?"
눈을 돌려보면, 밀화는 반쯤 감긴 눈으로 은주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던 그에겐 노트북의 불빛이 밝았을 것이다.
잠시 심호흡을 한다.
먼지의 맛이 사라진 공기가 은주의 가슴 속까지 밀려들었다, 한숨에 섞여 흘러나왔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잠깐 시상이 떠올라서,"
"……? 그런 식으로 하는 거구나, 시 쓰는 거."
"하하……."
물음표가 달린 문장은 뱉을 수 없다.
그러니 은주는, 한껏 다듬어 동그란 온점만을 내려놓는다.
"네, 맞아요. 별다를 것도 아니죠."
조금 배가 고파졌다.
아침에 있었던 일이다.
나는 말야, 은주가 글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
품에 닿는 목소리는 잠꼬대도 못 될 만큼 작았지만, 그 말에는 유언처럼 쓸쓸한 음률이 있었다. 은주는 내가 시키면 뭐든지 하잖아. 뭐든지. 하지만 내가 시키지 않아도 은주가 하는 건 얼마 안 되더라. 숨쉬는 거, 이닦는 거, 학교 나가는 거, 그런 당연한 거 말고는 글 쓰는 거 하나 뿐이더라고. 알고 있었어? 은주는 아주 조용히 그 말들을 들었다. 은주야. 불러도 듣기만 했다.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무어라 대답하지도 않았다. 졸음에 취해 작게 미간만을 좁힌 채, 베개에 뺨을 묻었을 뿐이다. 하지만 눈꺼풀 너머의 남자는 은주의 유일한 가족이었다. 늘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를 만난 것은, 은주가 가졌던 유일한 기적이기도 했다.
명령이에요?
그러니, 그것보단 잘 말했어야 했다. 잠에 잠긴 목소리를 가다듬고 졸음에 감긴 눈을 바로 뜨고, 그가 은주를 존중하는 만큼 은주도 그에게 성의를 다해야 했다. 조금 더 제대로 된 대답을 해야 했다. 그리 묻는 대신, 차라리 제대로 화를 냈어야 했다. 은주에게 시가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설명해야 했다.
…….
아니, 부탁이었어.
남자는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다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그는 은주에게 명령을 하면 명령을 했지, 부탁을 하고 애걸할 사람이 아니었다. 은주는 그의 이례적인 반응에도 어쩐지 심드렁했다. 그럼 더 잘래요. 말하곤 몸을 게으르게 뒤척였다. 그의 빈 웃음소리가 들렸다. 왜냐고도 한 번 안 물어보는구나, 은주는 그런 애였지……. 들은 것은 그의 웃음소리였지만, 눈을 감고 있었기에 그가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는 지금도 모른다. 은주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이미 방에 없었던 것이다.
다시, 아침
P. Cup
내일 너 없이 눈뜨면 외로울 거야. 왠지 그럴 것 같아.
"……."
다시 아침. 계절은 세 번이나 바뀐 뒤였다.
그 때처럼 일부러 입을 다문 것은 아니었다. 무어라 말할 타이밍을 놓친 사이 밀화는 계속 말하고 있었다. 은주는 밀화가 억지로 말을 짜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은주는 딱히 제가 왜요, 라고 되묻지 않았지만 그는 얼기설기 말을 기워 열심히 이유를 붙여나간다. 한 마디 더. 아 이것도 더하고. 아, 이런 것도 말이 되려나 말이 되지 않으려나……. 충분하니 그만 해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엉성한 홈질 자국을 썩둑 잘라버릴까 싶어 조금 더 기다렸다. 밀화는 어쩔 줄 몰라하다가 곧 화제를 접고 도망치듯 나갔다. 은주는 닫힌 방문을 잠시 바라보다가 침대에 풀썩 누웠다. 거짓말처럼 다시 잠을 잤다. 그리고 그가 죽은 날 아침의 꿈을 꾸었다.
……는 건 거짓말이다. 그런 처참한 꿈을 꾸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은주는 눈을 바로 뜨고 은주의 것이 아닌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지금은 그저, 은주가 은주의 기억을 더듬어 지난 일을 떠올려본 것이었다. 그가 그 때 은주에게 명령했다면 은주는 착한 아이처럼 펜을 꺾었을까. 명령이거든 들어주겠느냐고 물었다면, 은주는 어떻게 대답했을까 같은 것을 말이다. 하지만 정말 어땠을까. 그가 은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부탁을 했다면…….
그랬다면 은주는…….
"주야."
……어째선지 다시 눈이 뜨였다. 이번엔 정말로 졸고 있었던 모양이다.
"잤어?"
침대 한 쪽에 밀화만큼의 체중이 실린다. 밥 다 됐는데……. 은주는 대답없이 고개를 밀화 쪽으로 돌렸다. 눈 앞이 핑하니 아찔했다. 어제 사온 약을 얻어 먹어야겠단 생각을 한다. 차가운 손이 다시 은주의 이마를 짚는다. 부엌일을 한 탓인지 그 손에는 물기가 남아 있었지만, 이번엔 손을 잡아 떼어내는 대신 가만히 고개를 젓는 시늉을 한다. 눈이 감겼다. 안 잤다는 거야, 안 괜찮다는 거야? 밀화의 목소리가 물었다. 아니, 젖은 손으론 열을 못 재지 않을까 해서……. 그러네,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손은 아직 떨어지지 않았다.
"형."
"응?"
……은주는, 망설였을까?
"아까 물어보신 거요."
"……응? 응."
그러니까, 같이 살지 않겠느냐는 말.
처음 들었을 때는 여자에게 그렇게 물었다면 달콤한 프로포즈가 됐을지도 모를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달콤하지 않았다고 해서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니었다. 밀화는 태연하게 굴려는 듯했지만, 학교 커뮤니티에 하우스메이트를 구하는 글을 올린 정도로 치부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그런 음이었다. 은주는 그런 것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은주에게는 은주의, 밀화에게는 밀화의 집이 있고, 머무를 곳 없이 길을 잃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외로우세요?"
다시, 은주는 망설였을까.
거기까지는 영영 알 수 없다. 남자는 명령도 부탁도 다시 하지 않았고, 그저 여느 때처럼 다녀올게, 하는 인사를 하며 침대를 떠났던 것이다. 다만 그 날은 평소의 그 말을 지키지 못했을 뿐이다. 은주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슬프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일이다.
"저는 아닌데."
그러니 그 사이 도로 혼자에 익숙해졌다는 말은 아니다.
어렵게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눈꺼풀 밑에 고여있던 열이 흘러내렸다. 눈 앞은 맑았고, 밀화는 아직 방 안에 남아 있다. 밀화가 무어라 말하기 전에 손목을 잡아 이마 위에서 떼어낸다. 손 안에서 엷은 긴장이 느껴졌다. 그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끌어안듯 얽고 천천히 깍지를 쥐어본다. 그러는 동안에도 국이 식고 있었겠지만, 밀화는 기다려주었다. 은주는 밀화가 당황한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눈가에 맺힌 물기를 훔칠 손은 없었다. 그러려면 밀화의 손을 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몇 번이나 손을 고쳐쥐며 손가락과 손가락이, 손바닥과 손바닥이 바짝 맞물리게 했다. 가볍게 힘을 넣었다. 은주는 밀화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이렇게 해도 외로우세요, 형?"
지하철 2호선, 시작도 끝도 없이 떠돌 수 있는 서울의 고리.
그 위를 흘러다니다 밀화를 만난 지는 한 달이 겨우 지났다. 그 날의 우연 없이는 여전히 모르는 사이였을 테고, 그 밤의 우연 없이는 여전히 서로에 대해 잘 몰랐을 사이였다. 지금도 은주는 밀화가 은주에 대해 많이 모르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런 은주에게 내어주려는 자리를 마다할 수 있을 만큼, 이 세상에 은주의 자리가 많지는 않다.
누군가의 옆자리를 가질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사랑스럽고, 애틋한 일이었다. 하지만 구주께서 내리신 기적 같은 것은 아니었다.
"나쁘지 않죠?"
허공에 가볍게 손을 흔들어본다. 밀화의 얼굴을 붙잡고 끄덕이게 할 수는 없었지만, 이어진 팔만은 꼭 그만큼 흔들렸다.
"형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은주는 외롭기 때문에 밀화의 침대에 누워있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남겨진 것이 서럽고 괴로웠다면, 은주를 혼자 내버려둔 이 세상이 너무도 찬란해서 밉고 밉기만 했더라면, 은주가 불행했다면, 그가 남기고 간 자리를 치워버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가 건네는 친절들에 다시 또 맹목했을 것이다. 모든 명령에, 모든 부탁에, 모든 제안에 망설임없이 그래요 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을 것이다. 실망시키지 않도록, 미움을 사지 않도록, 기적이라 믿은 것에 그렇게 했던 것처럼.
하지만 몇 개의 계절이 은주를 지나갔고, 은주는 이제 기적에만 매달릴 만큼 가진 것이 없지 않았다. 우연이 가져다주는 인연들에는 여전히 감사하고 있지만, 그 우연을 우연으로 넘길지 인연으로 만들지는 다른 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아닌, 은주가 결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은주는 은주의 결정 위에 살며 행복했다. 이미 혼자는 아니었다.
"아무 데도 가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저와 한 집에 살지 않아도 외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열에 잠겨있던 목소리를 가다듬고, 눈물에 흐려진 시야를 바로잡고, 오늘의 은주는 성의를 다해 밀화에게 속삭일 수 있었다. 그를 안심시키듯, 유한 미소를 보낸다.
아아, 행복했다. 눈가에 열병처럼 밀려드는 알알한 기분을 견뎌내는 동안에도, 미소를 짓느라 입술을 얇게 늘어뜨리는 동안에도, 은주는 불행하지 않았다. 아마, 지금보다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알고 있다.
"그랬으면 좋겠어요, 밀화 형."
혹 감기를 앓게 될는진 모르겠지만, 내일 아침은 오늘 아침보다 조금 더 행복할 것이다.
아마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