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든의 말대로 식빵의 가장 밑부분부터 검은 먹물처럼 곰팡이가 점점이 번져있었다. 가장 위쪽 식빵에는 아주 작은 얼룩뿐이었고 먹었던 것에도 특별히 맛의 차이가 없었지만, 일단은 남은 것을 전부 폐기처분했다.
단순히 식빵을 버린 것뿐인데, 피로가 밀려왔다.
"걱정 말아요."
말은 그렇게 했음에도, 사실은 걱정할 것 투성이였다.
상식적인 작동원리를 가진 상식적인 통신 장비가 어째서 먹통이 되었는지, 이유에 대해 논문을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들이 비상식적인 공간 속에 삼켜졌기 때문이라고 이해하면 누구라도 그런가 하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적어도 비상식적인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만은 선하도 뼈가 저리도록 잘 알고 있었을 텐데, 미리 대처하지 못했으니 죄송합니다라는 말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선하의 체력은 본래 24시간 이상 깨어있는 것 정도로 바닥나는 것이 아니었으나, 평소의 처리량을 뛰어넘는 정보량―물론 후반부에는 녹수가 거들어주었다―과 포트럭 파티에서 흘려마신 약간의 알코올, 그리고 그 '죄송함'과 동료들의 실종에서 비롯된 불안으로 뇌는 녹아웃 상태였다…….
그래도 아직 사고할 힘은 남아있을 때였다.
적어도 지금 더 이상 깨어있어 봤자 할 수 있는 것이 없고, 조금이라도 자두지 않으면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오후에 온전한 정신이 아닐 것이란 판단 하에 택한 수면이었다. 분명히 후발대에게 전달할 것은 전부, 랩 요원들이 알아야 할 자료도 전부, 각자에게 넘겨준 뒤였을 것이다……. 그 뒤에 그들에게 소득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랩 안에 어떤 이변이 일어났다가 기화(氣化)하듯 녹아 없어졌는지, 선하가 상세히 들은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
2.
후발대가 선발대와 실종자들의 신병을 확보했다고 했다.
녹수가 전하고 시온이 해독하는 책 안의 내용에 랩의 모두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동안 선하는 멀거니 스크린에 떠 있는 이미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왜 6은, 7을 두려워할까요. 왜 6은 7을 무서워하지? 6이 7에게 벌벌 떠는 이유는? 시온이 각기 다른 책들에게서 한 문장을 적어낼 때마다 랩은 조용해져서, 결국엔 그녀가 종이에 펜을 사각거리는 소리밖에 남지 않았다. 초점이 빗나가거나 흔들린 듯한 사진 속에는 투명한 장막에 가로막힌 양 공중에 펼쳐져 있는 책이 액체를 흘리고 있는 격동적인 모습이 담겨있다. 위험한 곳이려나, 하지만 그네들이 걱정되지 않는 건 통신이 되는 상태고, 답을 적기만 하면 무언가가 해결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시온이 다섯 번째 책의 질문을 받아적었다. 6이랑 7……왜죠오, 하고 세스가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왜일까?
꿈 없이 혼곤한 잠 속에서 헤매던 도중에, 억지로 뒷덜미를 잡혀 끌려나왔었다. 의문을 제기할 틈도 없이 이루어진 외출과 쇼핑에 휘말렸다. 모두가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에, 선하도 사정을 듣지 못한 채 비몽사몽 물건을 구매했다. 슬라이스 햄과 치즈, 형광등, A4용지, 최근에 뜨거운 물을 잘못 부어 찌그러진 플라스틱 물통……. 점점 필요한 게 뭐였는지 알 수 없게 되면서 나중에는 손발이 멈춰버렸다. 더 물건을 긁어모을 돈도 물건이 담긴 쇼핑백을 들 손도 없을 때였다. 부서 내의 필드 요원 절반과 캐서린이 부재중인 상황에서 나머지 인력들이 이런 단순작업으로 하염없이 시간을 낭비한 이유에 대해 선하는 생각하고 있었다.
여섯 명의 아이들이 굶고 있었을 것이다……하지만 그것은 둘째고, 연락이 두절된 요원들이 돌아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선발대가 이공간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자료는 충분했다는 얘기가 될 텐데…….
6, 7, 8, 9…….
서고의 요원들과는 달리, 선하에게는 명쾌한 답 대신 두통만이 돌아왔다. 안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사실을 자연히 돈오(頓悟)할 수는 없는 것이다.
머잖아 마지막 실종자를 발견했으며 모두 무사하다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누구의 것인진 알 수 없었지만, 반가운 목소리였던 것은 분명했다.
탄성 소리와 안도의 한숨 소리가 랩 안에 일시에 퍼졌다가 사라졌다. 글쎄……결과가 좋다면 아무래도 좋은 것일까?
……. …….
그 때 개미가 기는 듯한 잡음이 귀를 간지럽혔다. 미묘한 위화감에 선하가 의아할 때, 익숙한 목소리가 목께에서 사각거렸다.
……불……다시 들어왔……요!
통신 이제……나? 선하! 듣고 있어?
선하는 목에 아직껏 걸고 있던 헤드셋을 만져보았다. 멍청히도 그걸 하루 종일 몸에 붙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제대로 클립을 끼우지도 못한 채 그것을 귀에 갖다 대고, 선하는 급하게 대답한다. ―네, 들려요.
웃음소리 같은 것이 태평히도 파고들었다.
선-하, 우리 돌아왔어!
캐서린 브라이트의, 아침에 들었던 것처럼 밝은 목소리였다.
……기다렸잖아요.
어서 와요.
어깨에 들어있던 긴장을 한 줌 늘어뜨리며, 결국 선하도 미소하고 말았다.
3.
몇 시간이나 지난 거지? 어……해가 지려고 하는데요. 여덟 시간? 아홉 시간? 그 정도네요. 특별히 시간 흐름이 다르던가 한 건 아니었나요? 그런 건 아니었어. 언니이, 배고파아……. BSPD와 부모들에게 연락을 취해뒀다고 하네요. 아이들 귀가에 대한 건 그쪽으로 돌리고 슬슬 쉬시는 게 어떨까요. 아저씨, 뭘 돌리는 거에요? ……돌아왔으니까, 집에 가야지. 어……아. 그렇구나. 그리고요? 음... 네? 아. 네. 그리고 니나버는 병원으로 갔어. 더 알아둬야 할 사항은? 아. 없는 것 같네요. 랩에 있던 식빵에 곰팡이가 피었던 것 정도……? 니나버면 분홍머리 닉씨인가요? 그 쪽은 제가 세주 씨한테 알려둘게요. ...음? 저기요, 부모님께서 오시나요? 돌아가는 길은 알고 있는데요. 집에서 그렇게 멀지도 않고요……. 그래도, 부모님과 엇갈리지 않는 편이 좋겠지. 경찰서까지 데려다주지. ……. ……. 어머나, 웬디……우리 웬디! 으아앙...! 엄마아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어라……토미, 너도 우는 거니?
4.
그 뒤로는 파업이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외근을 마치고 돌아온 이든이 이제 땡땡이는 다 쳤느냐며 랩 요원들을 흩어버리는 바람에, 선하는 그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양 손바닥을 펴보이며 나름의 항복 태세를 취했다. 싫어요. 자야겠어요. 보란 듯이 헤드셋도 벗어버렸다. 이제 끔찍한 교통사고라도 나지 않는 한 그들은 두 시간에서 세 시간 사이에 돌아올 것이다. 이든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는가 싶더니 고개를 젓고는 그의 자리로 돌아가버렸다……오늘 해가 뜨는 것도 봤던 것 같은데, 지금은 해가 지고 있었다. 아주 길고, 긴 하루였다.
이든 씨는 퇴근 안 해요?
공무원답게 정시 출근 정시 퇴근을 지키곤 하는 남자인 것이 떠올라 가볍게 안부를 물어보았다.
남이사. 가서 잠이나 푸지게 주무시죠?
…….
신경질적일 때가 있어서 그렇지,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란 건 알고 있다.
웃어넘기다가 말고, 선하는 문득 컴퓨터 옆에 조용히 앉아있는 녹수를 본다. 다이브를 오래 하고 있었던 것으로 안다. 아마 당분간은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괜찮아요?
녹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덧붙이려는 듯―혹은 뭔가 물으려는 듯―주섬주섬 메모장을 꺼내는 손가락 끝이 어쩐지 발갰다. 그에게도 이번 사건은 첫 이변이나 다름없다. 마음이 쓰였지만 일단은 고개를 저었다. 무척 미안한 일이었다. 나중에 얘기해도 될까요? 미안해요. 자고 일어나면 꼭 이야기해요, 차라도 한 잔 하면서……. 청각에는 문제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괜스레 더 크고 정확하게 발음하게 된다, 미안해요, 하고. 하지만 당장 잠들지 않으면 어딘가 망가질 것 같았다.
5.
선하의 의지로 눈이 다시 뜨였을 때에, 랩에는 이든과 세스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아무래도 여자와 아이―라기엔 미묘하지만, 녹수는 아직 미성년자였다―들은 전부 쉬러 간 모양이었다. 이든은 작은 드라이버로 기계를 분해하면서 도넛을 먹으면서 기계의 내부를 카메라로 촬영하고 있었고, 세스는 그 옆에서 랩의 일상적인 이변을 진기처럼 구경하며 도넛 먹기와 이면지 접기를 동시에 하고 있었다. 과연 유능한 인재들이랄지. 손가락으로 눈꺼풀을 몇 번 눌러 잠을 덜어낸 뒤, 선하는 간이침대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몇 시간이나 지난 거지……하고 이공간에서 나온 이가 물었던 것이 생각난다. 몇 시간이나 잤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해본다.
헤헤, 선하 씨.
이든과는 달리 손이 두 개뿐이라, 세스는 도넛을 다 먹은 뒤에야 소리를 낼 수 있었다.
이윽고 도넛이 몇 개 남아있는 박스가 선하 쪽으로 조금 움직였지만, 입 안이 버석거려 차마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말라 비틀어진 토스트 이후로 먹은 것이 없었다. 선하는 랩의 냉장고로 걸어가 생수를 꺼냈다. 목구멍이 얼얼할 정도로 시린 냉수와, 죽은 듯 자느라 듣지 못한 내일의 날씨가 선하의 두개골 안쪽을 거세게 두드린다.
내일의 하늘은 별 일이 없을 예정이다.
너무 늦게 일어났나봐요. 랩이 한산해졌네요.
히히, 이제 열두 시에요. 더 자도 될 거 같은데에.
아하…….
평소보다 오랜 시간 잔 것 같다……. 피로가 미처 다 희석되지 못한 점이 놀라울 뿐이다.
이따금 이렇게 휘몰아치는 날이 있으니, 평소엔 조금 빈둥거려둬도 괜찮은 거 아닐까 홀로 합리화를 해보기도 한다.
선하는 이 곳의 누군가가 겪는 페널티처럼, 꿈 속을 무서워하지는 않는 것이다. 당장 할 일이 없다면 얼마든지 그 속으로 다시 뛰어들 준비도 되어있었다.
참, 그 사이 별 일은 없었어요?
두려운 것은 언제나 깨어있는 오늘의 무지(無知) 뿐이다.
6.
한 시간 반 뒤에, 신에게서 선발대 위주로 작성된 보고서를 받았다.
선하는 잠시나마 두 번이나 자고 왔지만, 그 사이에 저 워커홀릭이 잠은 커녕 잠시 눈이라도 감았을지 의문이다.
특수재난-이변 데이터베이스는 선하가 이 부서에서 쌓은 공적 중에 가장 쓸모있는 것 중 하나였다. 그 DB의 DBA(DataBase Administrator), 그러니까 선하는 선하가 관여한 사건이든 아니든, 부서가 새로운 이변을 접했다면 그에 관련된 정보를 확인해둬야 했다. 러블리한 케이크와 리본이 묶인 곰인형으로 가득했다는 방, 깜깜한 어둠 속에서 카툰 캐릭터들이 난폭하게 달려들었다는 방―옷장 속 같다는 누군가의 감상에 대해서도 기록되어 있었다―, 해도 달도 없는 보랏빛 밤 위에 하늘처럼 펼쳐져 있더라는, 새하얗고 거대한 미로……. 선하는 새로운 키워드를 만들어 보고서에서 추출할 수 있는 특징적인 사항들을 적어넣었다. 차후에 유사한 사건이 발생하거든 도움이 될지도, 물론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움이 되지 않는 기록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아야한다는 점에서 필요성이 있으리라. 무엇보다, 기록의 관리는 선하의 일이었다.
첫 번째 이공간: 러블리한 테디베어 & 케이크
두 번째 이공간: 괴수들이 숨어 있던 옷장
세 번째 이공간_
그 즈음에서, 이공간이란 표현을 지우고 스테이지라는 단어를 써보기로 마음을 바꾼다. 개개의 이공간이라기보단, 한 공간 안의 층과 층이라는 인상이 강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소한 명명(命名)의 권한이 선하에게 있을 때에는, 권한에 따르는 책임에 앞서 소소한 쾌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Stage 3_
느리게 깜빡이는 커서를 올려다보다가, 선하는 다시 키보드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Stage 3: 별의 미로_
신의 감상을 참고한 네이밍이었다.
하늘색 풀이라니, 샘플을 가져와줬으면 지금쯤 현미경 앞에 있었을 텐데 하는 일차적인 아쉬움은 들었다. 나머지 스테이지에 대해서도 특징을 정리하고 스테이지명을 조금 더 간결하게 다듬은 다음, 일단은 기록을 마무리해 데이터베이스에 업데이트한다. 당분간은 이 건에 대해 집중해 관련 자료를 붙여나가는 것이 선하의 일이 될 것 같다…….
……그러니 지금은 포커 게임이라도 한 판 할까, 하고 선하는 랩탑으로 잠시 한눈을 팔았다.
7.
선발대 전원의 안부를 확인한 것은 다음 날이었다.
아침에는 캐서린과 식사 약속을 잡아두었고, 점심식사 전에는 란씽과 리안이 다미를 데리고 함께 안부인사를 온 것이었다.
"어서 와요. 아, 다미 씨도 왔네요. 다들 잘 잤어요?"
어제 통신을 통해 했던 인사를 다시 건네자, 다미가 꾸벅 묵례를 했다. 선하는 막연히 그가 녹수의 또래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어제, 바로 집에 갔어."
"네, 아마 들러줬어도 못 봤을 거에요. 복귀한단 얘기 듣자마자 쓰러져 잤거든요."
"저도. 아이들이 전부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었어요. 덕분에 피곤했는데도 기분이 좋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세 분한텐 어제 일이 첫 사건이죠? 시작이 좋네요."
도란도란.
이든이 잠시 자리를 비웠기에, 랩에는 약간의 담소에 대해 잔소리 할 사람도 없었다.
반가운 손님들이었지만, 대접할 것이 많지 않아 선하는 커피를 내리고 어젯밤에 남은 도넛 박스를 살펴보았다……수가 부족하다. 신이 두 개쯤 먹는 모습을 봤던 것 같은데 이후로도 사람들이 오며가며 많이들 집어먹은 모양이었다. 도넛은 더 없네요. 휴게실에는 조금 남아있었어요. 아뇨, 다른 걸 찾아볼게요. ...식빵은, 괜찮아. 아, 지난 번에 하나 먹고 갔었죠? 아마 곰팡이가 핀 건 그 뒤일 거에요, 걱정하지 마요. ……곰팡이요? 어쨌든, 곧 식사 때잖아요. 대접하지 않으셔도 괜찮을 거 같아요. 하긴, 간식을 먹으면 밥맛이 없어지니까요. 그 즈음 쭉 말수가 없던 다미가 빵, 좋아하십니까? 하고 짤막하게 물었다. 제게 물은 것인가 잠시 고민한 선하는, 너무 단 것은 싫다고 말하는 대신으로 끼니가 되는 거라면 좋다고 대답했다.
"……그나저나 놀랐어요, 아이를 울렸다면서요?"
화제를 살짝 돌려보기로 한다. 란씽을 보며 묻자, 그가 미미하게 기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좋은 시작.
그렇다면 끝도 좋을까,
하지만 끝이란 것이 있기는 할까…….
……거기까진 알 수 없지만,
일단은, 매끄러운 꼬리의 쉼표가 하나.
In Community SPEDIS : After Case 2
뭐... 미션 끝나고 개인 에필로그를 자진해서들 쓰는 커뮤가 다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