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아."
선하가 긴급호출을 받고 찾아갔을 때 닉 맥플러리의 연구실에서 나오던 것은 천 란씽(陳 藍星)이었다. 특재과에서 선하보다 키가 큰 남자는 그 하나 뿐이었으니 헷갈릴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처음 만났을 땐 격투가를 연상시키는 외모며 단단한 체격에 위압감을 느낀 것도 사실이지만, 그가 내민 로맨틱한 디자인의 손수건에 한 번, 그 손수건에 그가 손수 수를 놨다는 것을 깨달은 이래 한 번 더 인상이 바뀌었다―사실, 부서의 로고면 모를까 선하의 이름이 수놓여있는 시제품 같은 것은 없었겠지 생각한다.
"감기는 안 걸렸어요?"
물에 빠진 생쥐ㅡ라기엔 조금, 이변급으로 컸지만ㅡ꼴이 되어 빌딩 안을 헤매던 모습을 본 것이 생각나, 안녕하세요 대신 그렇게 안부를 묻는다.
"응. 괜찮아."
"다행이네요."
알 수 있는 것은 하늘의 안부뿐이라, 선하가 하늘의 일을 엿보는 것만으로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선하로서는 이례적으로 쏟아지는 소나기라 생각해 호의로 귀띔한 것이었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도 모든 사람이 우산을 준비하지는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저도 모르는 사이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았지만, 쓴웃음을 짓는 것으로 금세 기분을 씻어낸다.
적어도,
오늘 밤은 맑을 예정이라고 알고 있다. 적어도 오늘은, 비를 맞을 사람도 없겠지.
"막고 있었어. 들어가."
란씽이 말하며 문에서 비켜섰다.
"고마워요."
가볍게 목례를 건네며, 그를 지나친다.
Emergency!
2
"채 군, 채 군! 어쩜 이리 보기 어려운지. 도통 오는 일이 없길래 불렀다네."
"...안녕하세요."
다른 건 몰라도 이변학(異變學)이라는 갈래가 생긴다면, 이변학의 아버지란 칭호에 제일 가까운 것은 아마 이 노인일 것이다. 선하는 자리에서 돌아나와 제 쪽으로 종종 다가오는 그를 피해 한 걸음 물러섰다. 그 때는 이미 한 손이 그의 살찐 양 손에 꽉 잡혀버린 뒤였다. 그대로 악수하는 것은 학계의 일인자를 만나는 연구자로서 실례일 것이 분명해, 선하도 그의 손을 양 손으로 맞잡고 흔들었다. 노인 특유의 높고 다정한 체온이 선하의 차가운 손끝에도 얼핏 묻어왔다.
"교수님."
세인트(Saint)……아니 프로페서(Professor), 닉 맥플러리.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그 손이 선하를 소파에 끌어앉힌다.
"자 앉으라구. 커피? 녹차? 일단은 코코아도 있네만."
"……아?"
세주 씨에게는 긴급호출이라고 들어서, 게임 도중에 뛰어나왔는데…….
하고 생각했지만, 선하는 불만을 삼킨다. 상대는 만만하게도 투명인간――아니, 이든의 염동력 쪽이었고, 선하의 패는 클럽 에이스(A♣)로 시작하는 플러시(flush)였으니 호출에 불려나간 것을 오히려 기뻐할 것이다.
"...전 코코아로."
본의 아니게 아주 긴급한 티타임을 가져야 할 모양이다.
"그래서, 요즘은 좀 어떤가?"
"프린지(fringe) 데이터를 계속 보강하는 중입니다. 아직 놀라실 만한 소득은 없지만 이번 신입의 정보수집능력이 탁월하다고 들었어요. 일임하게 되면 좀 더 신뢰도 낮은 케이스들도 추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역시 코딩을 할 수 있는 분이 있었으면 하는데,"
"이변 DB의 얘기인가? 프로그래머 문제라면, 윤 군 말로는 자네가 잘 커버하고 있다고,"
"……교수님, 기억하실 거라고 믿지만 저는"
"허허허! 스페셜리티가 아니란 건 알고 있다네. 그리고 그 안부를 물은 게 아니잖나."
어쩌다가 이렇게 유능한 인재가 되었는지, 하고 자조적인 자찬(自讚)을 리플레이하기도 전에 화제가 돌려진다.
"...그럼?"
밀크 코코아가 가득 담긴 머그잔은 굉장히 따뜻했지만, 온도차 때문에 오히려 손가락이 차갑게 얼어있던 기분이 들었다.
"당연히, 군의 일기예지(Weather Foresight) 건이지. 모르고 있었나?"
이번에 새로 충원된 요원들은 특수능력 때문에 기용된 민간인이 월등히 많다. 아마 전문가와 상담할 기회는 많지 않았을 테다. 그네들의 특수능력을 점검할 겸, 이참에 특수능력 보유자들과 차례차례 면담을 갖던 중이었다. 유일하게 선하가 일정을 잡지 않고 있고, 얼굴을 못 본 지도 꽤 됐단 생각에 한 군에게 호출을 부탁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아, 그랬나요."
선하는, 잊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을 짓느라 조금 고생을 했다.
"제가 번거롭게 해 드렸네요. 죄송합니다."
세주의 공지사항을 듣기도 했고, 듣지 못했더라도 휴게실에 자세한 면담 스케쥴이 붙어있기 때문에 모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스스로의 특수능력에 대해서는 충분히 잘 알기 때문에, 일부러 방문하지 않은 것이다. 일은 해도 줄어들지 않는 것이라 어쨌건 바쁜 척은 할 수 있었다. 그는 아무런 반박 없이 속아주었다.
"페널티에 대해 쓰여있지 않던데. 없다고 생각하나?"
"그런 것 같은데요……제 능력은 너무 소소해서, 페널티를 받는 게 억울하지 않나 싶어요."
"내일의 날씨라. 랭크는 B-로군. 이 랭크면 흔한 일이지."
"네."
"과학이 많이 발전했어! 아마 백 년 전이었으면 신관이 됐을 텐데, 아쉽구먼."
"...하하하."
그 뒤는 조금 더 무난한 문답이 이어졌다. 대부분은 안부인사와 요즈음의 시사 이슈―라고 해도, 말세보다 충격적인 소식은 없다―에 대한 견해를 묻는 것이었지만 자신의 능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제일 좋아하는 날씨와 가장 싫어하는 날씨, 날씨와 비롯돼 기억나는 사건이 있는지 같은 질문도 섞여있었다. 선하는 그의 어절 사이사이에 엿보이는 진의로부터 최대한 거리를 벌려 대답했고, 밀크 코코아는 생각보다 맛이 진해서 적당히 식고 나니 어려움 없이 바닥을 비울 수 있었다.
그리고 예의를 차릴 만큼은 앉아있었다 싶어 머그잔을 내려놓을 즈음, 마지막 질문이 돌아왔다.
"채 군."
"네."
"요즘, 해피한가?"
"……."
선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해피(Happy)라는 단어의 의미를 몰라서가 아니라, 그 단어가 너무 이질적으로 들렸기 때문에.
"...아뇨."
풀리려던 긴장을 가다듬고 그렇게 대답한다.
"하지만 언-해피한 것도 아니에요, 교수님."
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 질문에만은 솔직한 대답을 돌려드리기로 했다.
사실, 누군가가 비를 맞는 정도로 일일이 슬퍼했다간 진(瞋)에서 영영 헤어나올 수 없으리라.
"아, 신 씨."
가까스로 긴급호출에서 풀려났을 땐 이미 해가 진 뒤였다.
솔직하게 답한 것의 상이었을지, 선하는 손아귀가 미어지도록 많은 사탕을 받았다. 선하는 캐러멜도 사탕도 싫어하는 사람이었지만, 애정표현으로 생각하라며 쥐여주는 것을 쓰레기통에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대신 반대쪽에서 걸어오는 신에게 손을 흔들기 위해, 지금 막 가운 주머니에 과감하게 털어넣은 참이다. 몇 개의 자그마한 사탕이 소리없이 튀어나와 복도에 떨어졌지만, 이미 주머니는 위험 수위를 넘긴 상태라 도로 주워들 의욕까지는 없었다.
"박사, 어디 가는 길?"
이번에도 안녕하세요는 아니구나. 하지만 지금 서 있는 복도는 이대로 쭉 걸어가면 비서실까지 이어지니, 그런 질문을 받을 법도 했다.
"닉 교수님 방에……지금은 돌아가는 길이네요. 면담 주간이라던데, 다녀오셨나요?"
"……? 아니. 필요한가?"
(……이 산타 할아버지가.)
사탕 따위 칩으로 써서 죄다 잃어버리면 될까 생각한다.
In Community SPEDIS : Event 2
요즘 글 많이 쓰는듯
진(瞋)은 불교에서 나오는 육번뇌 중에 하나인데 사실 여기 붙이기 미묘한 것 같다.
뭔가 불편해서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라고 해석을 붙이면 되려나...
진(瞋)은 불교에서 나오는 육번뇌 중에 하나인데 사실 여기 붙이기 미묘한 것 같다.
뭔가 불편해서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라고 해석을 붙이면 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