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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의 애매한 서화/One Song One Tale

MOT - 서울은 흐림




 지민은 침대 끝에 걸터앉아 한쪽 무릎을 안고 있었다. 요즘 일교차가 심해, 하면서 이따금 깃을 여미던 가디건은 그녀의 어깨에 조금 컸다. 가느다란 털실로 짜인 소매 밑으로 이따금 손가락 끝이 보였다가 보이지 않았다가, 귀찮아, 하고 손등을 덮던 소매를 바짝 걷어올리면 그때야 하얀 손목이 드러나곤 했다. 손목에 걸린 팔찌가 챠랑거릴 때마다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창 너머로 들어오는 한봄의 햇볕을 고스란히 받으며, 지민은 나른한 듯 눈을 감은 채 고개를 꾸벅거렸다. 팔찌와 같은 장식이 붙은 귀걸이도, 귀걸이 밑으로 수수히 떨어지는 머리카락도, 열기없는 뺨도, 가디건에 일어난 보풀도 바람 속에 햇빛 속에 하얗게 빛났다. 민들레 꽃씨처럼, 봄처럼.

 으응……, 왜?

 지민의 목소리가 물었다. 틀림없이 졸고 있는 줄 알았는데, 잠결에 기율의 시선을 느낀 모양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살짝 치열을 드러내며 미소짓는다. 덩달아 웃으며 고개를 저었더니 지민은 그래? 하고는 도로 눈을 감았다. 동그란 머리가 기우뚱하는가 싶더니 세운 무릎에 완전히 기대버린다. 이제 그녀는 훨씬 작아보인다. 기율은 잠시 그녀를 바라본다.

 언제부턴가 지민은 심심하다고 투정을 부리지 않았다.

 졸리면 자, 깨워줄테니까.
 음, 졸린 걸까?
 졸고 있길래.

 그래서, 언제까지 내버려둬도 좋은지 거의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랬어?
 그런 줄 알았는데.

 으음­­---하고, 지민은 잠시 신음을 흘렸다.

 봄이라 그럴지도.

 예전부터 기율은 그녀의 말이 많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조금 더 많이 말하더라도 분명 모든 말을 들어줬을 것이다.
 그녀의 모호한 대답에도 이따금 기율이 돌아보게 되고 하던 일을 멈추게 되는 것은, 그녀가 너무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녀를 내버려두는 것이 불안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기율은 몸을 일으켜 침대로 걸음을 옮겼다. 지민의 옆에 걸터앉았다. 기율의 무게만큼 지민의 어깨가 기우뚱, 흔들렸다. 바쁜 거 아니었어? 자고 있지 않은 지민이 작게 속삭였다. 조금 쉬고 싶어서. 피곤하지 않은 기율이 조용히 대답했다. 그리고 지민의 뺨으로 손을 뻗는다.

 ……응?

 사실 기율은 뺨을 쓸어주려고 했다. 그런데, 어쩐지 뺨에 닿기 전에 손이 멈췄다.
 아주 조금, 숨이 막힌다. 그러느라 잠시 방 안이 조용해졌다.

 지민은 잠시 기다려줬다.

 왜?
 ……아니.

 민들레 꽃씨 같다는 비유는 좋지 않았던 것 같다. 금방이라도 그녀가 부서질 것 같았던 것이다.
 물론 그런 기분이 들었던 건 아주 찰나였다.

 기율이 손을 내려놓으며 대답하자, 지민이 후후 웃음을 흘렸다. 끌어안고 있던 무릎을 내려놓으며, 그녀가 말했다. 만져도 되는데. 아니 팔을 뻗은 것이 먼저였다. 서늘한 손가락이 뺨에 닿았다. 눈이 마주쳤다. 까맣고 말간 눈이었다. 이렇게, 만지려는 거 아니었어? 그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지민이 물었다.
 대답 대신 기율은 거뒀던 팔을 다시 뻗었다. 뺨이 아니라 지민의 어깨로. 그녀는 몸에 힘을 거의 빼고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품 안에 끌어넣을 수 있었다. 이제 지민은 아주 평범한 사람으로 느껴진다. 만져도 부서지거나 흩어지지 않는, 견고한 소재의. 사람.

 율아. 품 안에서 지민이 속삭였다.

 새삼스레 체온을 확인한다.
 몇 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미지근한 입술이었다.

 미지근한 뺨이었다.

 가디건에서는 햇빛 냄새가 났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지민의 품 안이었다.

 지민은 내내 조용했다. 그저 졸리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말을 아끼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그녀의 말대로 봄이라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가끔 기율은 그녀를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거기에는 이유가 없었다. 적어도 기율이 아는 이유는 없었다.

 지민아.
 응.

 말을 걸면 그녀는 언제나 대답해주었다. 입을 맞추면 턱을 들어주었고, 팔을 감으면 끌어안아주었다. 살아있다고, 잃어버리지 않았다고, 기율이 원하는 만큼 확인시켜주었다. 기율은 가끔 그런 것이 필요했고 그보다 더 지민이 필요했다, 지민이 기율을 필요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가 이따금 품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려 하거나, 비 오는 밤에 우산을 빌려주지 않으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응, 율아.

 귓가에 속삭인 말에 지민이 웃었다.
 지민은 봄처럼 웃었다. 하지만 기율에게 감긴 팔은 조금도 흩어지지 않았다.

 나도 그래.

 속삭임이 돌아왔다.





봄에 쓰다가 묵혀뒀던 글이라 봄글입니다. 원고하다가 도피용으로 풀어봄.
보시다시피 모험이 목표였던 지라 무리수가 좀 돋는듯... 문제시 그냥 팬픽션으로 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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