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씨 아니야? 오랜만이에요."
수목드라마 치고는 이례적으로, 어느 새 팝체인 메신저의 4시즌이 피날레를 맞았다. 다음 시즌에 새로운 연애라인이 생길 거라는 미리니름에 대해서는 연기자들보다도 네티즌이 빨랐지만, 그게 하루나 라인의 지민과 오엠알 라인의 기율이 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을지는 잘 모르겠다. 작가 말로는 처음 등장인물들을 짤 때부터 지민과 기율은 헤어진 연인 사이였다는 설정이라는데. G는 기율에게 어딘가 속사정이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캐릭터가 생일 다음 날마다 약속을 비우는 이유가 그녀일 거라곤 여지껏 생각하지 못했다.
"네……. 오랜만이네요, 선배님."
오랜만이지. J와는 연극 무대에서 호흡을 맞춰본 적이 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친근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그 때만 해도 G는 거의 신인이었어서, 선배인 J의 상대역이 된 것에 바짝 얼어있었던 기억이 있다. 공연이 끝났을 즈음엔 조금 친해졌을지도 모르지만……그건 어디까지나 J가 스크린으로 주 무대를 옮기기 전의 일로, G가 커리어를 쌓고 메이저한 연극배우로 성장하는 사이 그녀는 국내 최정상급으로 손꼽히는 여배우가 되었다. 녹차색 드레스를 입고 여우주연상의 수상소감을 말하던 J의 모습은, G도 우연히 본 일이 있다.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TV를 통해.
그만큼의 거리가 있다.
"왜 그래요? 처음 보는 사이처럼. 괜찮으니까, 편하게 해주세요."
조금 지나치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나 싶을 때, J가 유쾌하게 웃었다.
메이크업 담당이 다가와 그녀의 얼굴에 가볍게 화장을 덧칠하고 지나간다. 아무래도 G가 무언가 말을 걸어야할 차례다.
"그, 알고 있었어요? 기율이랑 지민이가, 그런 사이인거."
"응?"
J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후후, 하고 미소지었다. 영락없이 지후를 향해 웃는 지민이 같았다. 흔히 H대 위주의 하루나 라인과 I대 위주의 오엠알 라인으로 갈라져서 촬영을 하는 터라, J는 지민이라는 캐릭터를 TV를 통해서밖에 만날 수 없었던 거다. 눈 앞에 그녀가 그대로 있는 듯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다가도, 지민이가 J고 J가 지민이니까 당연한 일인가 싶어진다.
"당연히, 까진 아니어도 이번 시즌 하면서는 율이겠네 했어요."
율이, 라고 이미 J는 지민이 과거에 쓰던 애칭을 쓰고 있다. 이번 화 대본에서나 드러난 호칭인데 이미 그 편이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그래요?"
"늘 그리운 듯한 표정을 주문받았고. 자기 얘기 많이 하는 캐릭터는 아니지만……가끔 얘기하고 있었잖아요?"
지하철에서 운명적으로 만났던 EX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1시즌부터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하루나 라인인 지후는 지유의 동생 역이기도 하고, 기율과는 사제 관계기도 했기에 관심있게 모니터하고 있었던 거다. 다만 대부분의 시청자들이 그 남자를 지나가는 엑스트라 정도로 생각했던 것처럼, G도 그 남자가 기율……그러니까 자신의 캐릭터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다.
"키가 크고, 머리 색이 옅고……다른 건 모르겠지만, 그 정도 생각했을 때 율이면 어떨까 생각했었거든요."
"아하."
"키 큰 남자 많은 드라마긴 하지만."
지민이 말하며 웃었다.
아니, J가 웃으며 말했다. 지민으로써 캐릭터 연구를 하던 끝에 추리한 것이 맞아들어간 모양이었다. G도 듣고보니 캐릭터의 키가 드라마 내 최장신인 점이나, 옅은 갈색으로 주문받은 머리색 같은 것을 생각하면 기율일 수도 있겠지 싶어진다.
"그리고, 율이는 생일 다음 날마다 늘 약속을 비우잖아요?"
J도 G의 캐릭터를 모니터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주의깊게 시청하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설정을 말하며 눈을 찡긋했다. 지민의 생일은 초기 캐릭터 프로필에서나 겨우 언급된 것이 전부였어서, G도 이번 화 대본을 통해서야 지민의 생일이 언젠지 찾아볼 기회가 있었던 거다. 활용되지 않고 있던 생일이라지만 배역을 맡은 배우니까. 어쩌면 2월 3일에 대해 처음 듣자마자 알았을지도 모르는 거고, 아니면 J야말로 이번 대본을 받아보고 나서야 기율이란 캐릭터에 대해 조사했을지도 모르는 거다. 뭐,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겠지 싶다.
"복선이었다는 거네요. 생일부터가."
G가 극적으로 박수를 쳐보이자, 보기좋게 연기를 마친 J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생각해보면 뻔한 복선인데, 모르고 볼테니까 재밌지 않을까?"
"그러게요. 이번 화 시청자 게시판 기대되는데."
"좀 걱정이에요. 나 안티 잔뜩 생기지 않을까? 반대에 떠밀려 다음 시즌부터 하차라던가."
율이 요즘 완전 대세잖아. 하면서 J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녹차색 드레스를 입고 우아하게 웃던 모습과 어렴풋이 오버랩된다. 지금 그녀는 그 때와는 달리 무난한 여대생의 겨울 옷차림을 하고 있다. 무난한 대학생의 옷차림을 하고 있는 것은 G도 마찬가지였다.
"그럴 리가요. 피날레에 이런 떡밥을 던져놓고?"
G가 조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작가 말로는 다음 시즌부터 지민과 기율의 러브라인에 힘을 줘서 다룰 예정이라고 했었다.
"책임져주셔야죠, 선배님."
어디서부턴가 조금, 기율의 흉내를 냈던 것 같은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