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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의 애매한 서화

쓰다 말았나? 비밀글이 있길래 일단 풀어봄




 서울에는 바다가 없다.
 그래서 그 방 안에는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도 소금처럼 떫은 모래 냄새도 없었다. 하지만 어느 날의 바다에서 그랬던 것처럼 두 사람은 함께 누워있었다. 지민은 바다에 몸을 던졌던 그 날처럼 노곤한 몸을 늘어뜨리고 있었고, 기율은 처음 한 침대를 썼던 그 날처럼 팔을 감아 그녀를 끌어안고 있었다. 지민은 아주 좁은 침대에 누운 양 기율의 팔에 매달려왔는데, 몇 번씩 입을 맞추고도 안심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뭔가 말하려는 듯 하다가 입술을 가로막히기도 하고, 그러다가도 불안하다는 듯 도로 달려들기도 했다. 몇 번인가는 입술이 엇갈리기도 했고 한 번은 세게 부딪치기도 했지만, 다른 말을 나눌 필요는 없었다. 입술이 떨어질 때만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율아……."
 지민이 간신히 기율을 불렀을 때엔, 조금 섬칫했다. 그 애칭으로 기율을 부르는 사람이 지민 하나뿐이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기율은 얼마든지 거기에 응, 하고 대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민의 손이 너무 차가웠다.
 열이 끓는 것 같던 입 안과는 딴판이었다.
 여름의 지하철 안에서, 봄비가 내리거나 가을의 밤이 시릴 때, 겨울바람을 맞으며 들어갔던 어느 베이커리나 어느 레스토랑에서 했던 것처럼, 기율은 지민의 손을 보듬어 녹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 손은 힘껏 기율의 셔츠를 움켜쥐고 있었다. 혹시 미끄러져 놓칠까, 손끝에 힘을 주다못해 가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떼어낼 엄두가 나지 않을만큼, 힘껏. 그래서 기율은 그녀를 품고 기다렸다. 차가운 밤공기가 체온에 녹아 전부 흐려질 때까지, 그녀가 정신을 고르고 숨을 고를 때까지…….
 아니 어쩌면, 그녀를 안은 팔을 놓을 수가 없었으니까.
 …….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있잖아."

 아니,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길고 짧은 침묵을 깨고, 지민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목소리였다.
 "율이, 너한테……."
 "응."
 기율은 언제나 그렇듯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지민은 입 안의 말들이 잘 정리되지 않는 것 같았다. 사실 양니가 계속 부딪히고 있어서, 입 밖으로 나오는 말들도 뚝뚝 끊어져서 들렸다. 그녀는 어금니를 억지로 악물어가며 한 마디 한 마디를 뱉었다. 한 마디 한 마디마다 숨소리와 울음소리가 뒤섞였다. 그래도 결코 말하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다. 끌어안고 있었기에, 지민이 온 몸에 힘을 주며 버티는 것을 기율은 알았다. 알 수 밖에 없었다.
 너한테 말이야,
 나는,
 해야하는 말이 있었어
 어제……아니,
 지난 달,
 아니면 재작년,
 적어도 지금이 아니라
 최대한 더 빨리,
 말해야했던 게…….
 "그건……."
 지민은 거의 말하기 직전이었다.
 기율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민이 하려는 말이, 이상할 만큼 궁금하지 않았다.
 사실 기율은 4년을 기다렸다. 기다렸던 시간과 내버려뒀던 시간 중에 어느 쪽이 더 긴 지는, 알 수 없지만, 조금 더 기다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어느 쪽도 결코 짧지는 않았다. 지민이 덮어두거나 망설였던 것과, 같은 길이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민아."
 하지만, 지민에게 사과를 받고 싶지는 않았다.
 여느 때의 자신처럼 괜찮아, 하고 대답하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따뜻한 것을 마시자며 뻔뻔히 웃었다면 모를까, 여느 때의 그녀는 차가운 손을 사과하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기율은 지민에게 용서의 말을 건넬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 날은 두 사람이 연애를 했던 어느 한 해와도, 긴 일상의 어떤 하루와도 같지 않은 날이었다. 너무 오래 헤어져있었다. 너무 오래 얼어있었다. 그리움도 실연도 무뎌질만큼 긴 시간이 흐른 뒤였다. 하지만 여전히 차가운 손이었다. 여전히도 추위를 타는 손이었다. 기율은 그 손을 데우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지민의 말대로, 사실 두 사람은 제대로 헤어지지 않았으니까.
 친구였던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
 "응?"
 지민이 숨을 삼키고 물었다, 입 안에서 막 튀어나오려던 말도 함께.
 기율은 대답하는 대신 손을 겹친다. 힘주어 잡자, 셔츠를 놓지 못하던 손아귀에서 힘이 어이없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천천히,
 손바닥 안에 장마철의 에어컨이나, 봄눈이나 가을비의, 겨울 바람의 추위 한 조각이 번져 없어진다. 그 감각은 분명 조금 오싹할지도 모르지만, 지민이 이런 것을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 다시 그 손을 잡을 수 있으니까, 언 손 같은 것은 얼마든지 녹여줄 수 있다.
 그녀는 얼어죽지 않을 것이다. 물에 빠지거나 차에 치이는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기유,"
 "― ―아니야."
 침묵에 초조해진 지민이 입술을 벌렸을 때, 기율도 입을 열었다. 지민의 말을 자른 것이 조금 통쾌했다.
 "아니야."
 기율은 거듭해 말했다. 잡은 손에 자꾸만 힘이 실렸다. 지민은 아프다고 불평하는 대신 눈을 감았다. 사실 불평을 들은 적은 한 번도 없어서, 어느 정도로 힘을 줘야 그녀가 안심하는지 기율은 몰랐다. 지민은 아주 어렵게, 어렵게, 이마를 기대왔을 뿐이었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물비린내가 났다.
 "……."
 울릴 생각은 아니었지만, 지민이 입을 다문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따뜻해질 거야."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속삭였다. 아주 나중에서야 기억해냈지만, 그것은 나리가 쓰다가 말고 폐기했던 가사의 후렴구절이었다. 비오는 날 고양이 시체 2 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곡이었다.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두진 않을 거에요. 따뜻해질 거야. 따뜻해질 거야. 내가 당신의 봄이 될테니, 그렇게 죽지는 말아줘요. 나와 또 한 번 일요일 오후를 보내줘요……. 
 "아무 말도, 안 해도 돼."
 하지만 그런 노랫말의 출처야 아무래도 좋았을 테다.
 함께였던 지난 계절들에 그랬듯이, 기율이 지민을 끌어안은 것은 그녀의 몸이 차가워서가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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