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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의 애매한 서화

2월 3일




 "주 의원님."
 "이 군, 어서 오게."

 파티라는 이름 아래에 사람들이 어디까지 화려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 연우는 질리도록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겨우 오늘로 네 살이 되는 아이의 생일 파티마저 그런 파티에 해당되는 것인지까지는 알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초대받았을 때는 분명히 '가벼운 집안 잔치'라고 들었건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온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호스트가 호스트인 만큼, 이미 그들에겐 파티의 타이틀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연우마저도 아직 신문이나 뉴스에서밖에 얼굴을 보지 못한 사람들도 몇몇, 그 화려한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웃고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을 사귀게 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축하드립니다."
 "……내가 축하받을 일은 아니지만, 고맙네."

 그렇긴 하군요, 악수를 나누면서 연우는 희미하게 웃었다. 의례처럼 조부와 부모님의 안부를 전하고는 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을 누구의 손자나 아들이 아닌 이 연우로 상대해주는 그의 태도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연우마저도 오늘, 파티의 주인공을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가 하나뿐인 손자의 이야기를 할 때 얼마나 밝은 표정이 되는지 연우는 알고 있었다. 생일이란 말을 듣고 가져왔던 꾸러미를 건네고 있는데,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지도 않으면서 내가 잘 계시는지 어떻게 알아?"
 "……어머니."

 어머니. 김 의원님이라고 불러야하는 상황은 아닌 것 같아서, 일단은 조금 더 익숙한 호칭을 써본다.

 "이야, 생일이라고 정말로 선물을 사온거야?"
 "……그러면 안 되는 건가요."
 "안 되긴."

 손에 들린 선물을 보고 놀랐는지, 엄마 생일이나 좀 그렇게 챙겨 봐, 하고 어머니는 혀를 차며 말했다. 사실 연우가 호스트인 '주 의원님'과 알게 된 것은 그와 대학 선후배 사이인 어머니가 기여한 부분도 있다. 이런 파티라면 더 오랜 시간 친분이 있었을 어머니가 오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우리 둘째가 아직 순진해서요. 기율 군은 벌써 결혼해서 애가 네 살인데 언제 며느리 데려올런지…….

 "흠, 흠."

 어머니가 연 양의 이야기를 꺼낼 것 같은 기분에, 연우는 저도 모르게 헛기침을 하며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시선에는 '기율 군'이 닿았다. 멀리에, 그것도 무리 속에 섞여있는데도 키가 큰 탓일까 쉽게 눈에 띄었다. 기율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남녀 몇몇과 칵테일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본인은 잊어버렸을지도 모르지만, 연우는 어머니를 대신해 조문을 갔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교통사고라고 했었던가……자세한 것은 연우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 때 어머니와 누이를 잃은 고등학생이 벌써 결혼을 하고 아버지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새삼스레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고 만다. 어머니의 목소리를 피해 저 쪽으로 인사를 하러 가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는데,

 기율이 누군가와 눈을 마주친다. 웃는 낯이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 표정이 한층 밝아진다. 어울리고 있던 이들에게 무어라 말하는가 싶더니, 그는 기다렸단 듯이 무리에서 벗어난다. 머리를 틀어올린 여자의 앞에 멈춰선다. 잠시 몸을 낮췄다가, 어린 아이를 안아올린다. 저 정도로 작은 아이에게 어린이용 국어사전이 괜찮은 선물이었을지 조금 자신이 없어진다. 어린이용 정장을 차려입은 아이는, 쓰고 있는 고깔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몇 번인가 만지작거린 뒤에야 작은 손으로 기율을 붙잡았다.
 그대로 기율과 여자는 잠시 이야기를 나눈다.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이 편안해보이는 표정이었다.

 여자가 뒤돌아본다.

 그 순간 온 세상이 아주 조금 느려진다. 웃음소리, 음악소리, 속삭이는 소리, 수군거리는 소리, 잔과 잔이 부딪치고 포크와 접시가 부딪치는 온갖 소리들이, 귓가에 늘어져 윙윙 울렸다. 연우는 숨을 삼켰다. 사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여자는 많은 테이블과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똑바로 연우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아무 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도로 연우를 등졌다.

 "……얘, 이 연우."

 아.

 "아, 네."
 "글쎄, 얘가 이런다니까요."

 물 속에서 끌려나온 것처럼, 모든 소리들이 갑작스레 선명해졌다.
 다행히 그녀와의 조우는 아주 찰나의 것이어서, 그렇게 시간이 많이 흐르진 않은 것 같다. 윙윙거리던 소리들 사이로 어머니가, 예쁜 아가씨를 보여주더니 헤어졌다고 하더라고요. 지금 헤어져가지고 결혼은 언제 하려는지……하고 아무도 관심없을 자신의 연애사에 대해 한 두마디 말하던 것이 기억난다. 분명 얼빠진 것처럼 보였을 표정을 가리려 안경을 고쳐쓰자, 어머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마 이 정도면 결혼 화제가 유쾌하지 않은 나잇대의 싱글 남성처럼 보이는 데에 성공한 것 같았다.

 "뭐. 이런 데도 좋지만 데이트도 좀 하고."
 "네, 그래야죠."
 "효도가 다른 게 없어. 제 때 취직하고 제 때 결혼하는 게 효도지."
 "네, 그렇죠……."

 잠시 모자간의 진부한 대화가 이어진다. 이 사이에 끼어있는 그가 불편하지 않을까, 힐끔 눈치를 본다. 그가 이 말에 동의하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신을 향해 허허 웃는 것을 보면 특별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가끔 본가에도 좀 들리고 그래. 이 의원님이 서운해하시더라."
 "……이 의원님이요."

 아, 늬 아버지 말이야. 그 집 안에 있는 이 의원만 연우까지 셋이란 사실을 어머니는 자주 잊는다.
 하하, 주말에 한 번 들릴테니까……. 그럼 이야기들 나누시죠. 웃는 소리를 내면서 양 쪽으로 인사를 하고는 어머니에게서 멀어진다. 자신이 채 몇 걸음을 떼기도 전에 그건 그렇고 말이에요, 선배……하고 어머니는 다른 화제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어차피 어머니도 '선배'를 만나러 온 것이지 자신에게 불만이 있어서 무어라 말을 건 것이 아니란 것은 알고 있다. 연우는 한 테이블에 다가가 칵테일을 한 잔 집어들었다. 데이트라. 공부하란 말도 한 번 듣지 않고 자랐는데 이런 잔소리를 빈말로 들을 줄은, 조금 쓴웃음이 나왔다.

 데이트는 곧잘 하고 있다, 늦을 거라고 연락해두긴 했지만 어차피 자신보다 늦게 귀가하곤 하는 애인과. 그 애인이 얼마나 자신에게 사랑스러운 사람인지 소개할 날이 오지 않을 것이란 걸 연우는 알고 있다. 자신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남자라는 것과 어머니가 말한 그 '예쁜 아가씨'와 동일인물이란 것 중에 어느 쪽이 더 말하기 곤란한 부분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라도, 더더욱.

 한 모금을 멋없이 홀짝이며 잠시 기율을 바라본다. 기율이나 그 옆의 여자 대신 기율이 안고 있는 아이의 고깔모자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아이가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모자 끝에 매달려있는 은술 장식이 정원의 조명을 받고 반짝반짝 흔들리고 있었다.
 여자는 이제 케이크를 먹고 있다. 이 자리에서는 그녀의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지만, 기율이 그녀를 웃으면서 바라보는 것을 보면 그녀도 웃고 있지 않을까 가만히 상상해본다. 아이의 입에 케이크 위의 딸기를 넣어주느라 그녀는 아주 바빠보였지만, 설령 바쁘지 않더라도 다시 이 쪽을 돌아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두 번 다시 없을 일이었다.

 그러니까, 기율에게 굳이 인사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아마도 지금 그에게 다가가면, 편안히 웃는 저 얼굴에 다시 미묘한 미소가 덧씌워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지금 아이의 옆에 붙어서 케이크를 먹고 있는 여자를 소개해주겠지. 연우 형, 혹은 이 의원님, 이 쪽은……하고. 아니, 어쩌면 거의 15년 전의 일이니 자신이 누군지부터 기율에게 다시 소개해야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옆에 서서 어색한 통성명을 듣고 있던 여자는,

 웃었을까.
 처음 보는 시아버지의 지인을 대하듯이, 그렇게라도 조금은 웃어줬을까, 생각해본다.

 그 생각이 역겨울 정도로 우스워서, 연우는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연우는 지금껏 단 한 번도 그녀가 행복해보이는 얼굴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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