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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의 애매한 서화

나를 다 잃는 날에도 너는 내게 남아



 헤어지는 길에, 기율이 말했다.

 "이제, 봄이겠네."

 아 응. 지민은 대답했다. 내일은 입춘이었다. 지민의 생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지민의 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생일은 지민을 긁어내리는 날이었다. 지민의 그릇이 뒤집어지고, 안에 들어있던 것들의 순서가 뒤섞여 뚝뚝 떨어지는 날이었다. 지민은 생일이면 다른 사람들처럼 나이를 먹었지만, 생일이면 지민을 뺀 모든 것들이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차곡차곡 쌓고 메웠다고 믿었던 것들은 밀가루 반죽마냥 견고하지 못해서, 언제나 형편없이 뭉그러졌다.
 1년만큼 그렇게 열심히 도망쳤는데도, 2월은 돌아오고 만다. 기율을 만나 손을 잡고, 케이크의 차가움에 상처받으면서, 스물 한 살이 되고, 두 살이 되고, 다시 스물이 되었다가, 내일은 스물 넷이 될 것이었다. 봄은, 글쎄.

 "응."

 기율이 하늘을 보며 말했기에, 지민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내년에는 만나지 않았으면, 그런 것을 생각했다.

 "못 보던 목도린데, 선물?"
 "……아."

 숨이 막히는 생각이었다.

 "가희가."
 "아, 가희 씨."
 "아직 같이 살거든."
 "아직? 그 땐 고등학생이었잖아. 이제 대학 갔으려나."
 "응, 얘기 안했나? 후배 됐어. 전공이 뭐라더라……."
 "잊어버린 거야?"
 "음. 음. 잠깐만. 분명히 들었었는데."

 하지만 기율을 만나지 않는 2월은 이미 상상할 수가 없었다. 기율이 없는 봄도, 여름도, 가을에도 이제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겨울만은 잘 떨어지지 않았다.
 2월.
 그것은 지민의 그릇 가장 밑바닥에 있다.

 "음……. 미술사 그런 거 한다던데."
 "아, 그런 쪽이구나."
 "그치. 좋아하는 애들은 좋아하니까."

 예전에 지민의 방에 붙어있던 그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기억력이 좋다고 생각하며 지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 그림은 가희가 가져온 것이고, 아직도 방에 걸려있다. 전셋집이라 못 대신 접착식 행거를 써서 고정시켰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하하."

 웃었다.

 물기가 많고 싱거운 감정들이 천천히 흘러내린다.
 카페에서 정류장까지 함께 걷는 길은 길게도 짧게도 느껴졌다. 그와 걸음 걸음을 옮기는 동안 그것들은 뚝뚝 흘러내려 덩어리진다. 몇 년을 반복하고 거듭해도 똑같이 먹먹한 계절이었지만, 지민은 피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것에서 도망치려면 기율을 더 만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숨을 죽이고 모든 것이 익숙해지길 기다리는 것이었다.

 "……."

 하지만, 이따금은 기율의 멱살을 잡아 흔들고 싶었다.
 기율과 입술을 맞추지 않는 이유가 뭘까 생각할 때도 있었다.
 언제까지 이런 데이트를 계속해야 하는 걸까, 생각하기도 했었다.

 "가야지."
 "응."

 하지만 그런 생각들을 따져 묻기에, 지민의 전 남자친구는 너무 키가 컸다.

 "안녕."
 "응. 연락할게."
 "응. 안녕."

 그저 늘 생각의 끝은,
 내년에도 너를 만날 수 있기를, 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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