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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의 애매한 서화

이리디머블 필링스

Chopin – Nocturne Op. 55 No. 1

 

 

 

1.

 

노아 한은 십여년간 반복되어 온 정기검진 절차에 일일이 불유쾌한 감상을 가질 만큼 동적인 인간이 못 되었다. 이 시대의 상급종합병원이란 본래 숙련된 의사의 수보다 특정 기능을 탑재한 기계의 수가 많은 공간이었다. 운동과 반응, 소화와 호흡, 비뇨와 생식, 순환과 면역. 유기물인 노아의 신체가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일련의 채취와 촬영과 검사들을 거치며 노아는 컨베이어 벨트 위의 공산품과 같은 취급을 받았지만, 인간의 존엄이란 고작 그러한 이유로 손상될 만한 것이 아니었다. 

 

“AST/ALT비가 좋구나.”

“그런가요. 뵈러 오려니 조금 신경이 쓰이더라고요.”

“금주라도 했던 거니?”

“그렇지는 않지만, 늘 그것부터 보시잖아요.”

“사회생활을 하려면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겠지. 네가 너무 제약을 느끼진 않았으면 한단다, 네 건강에.”

 

검진은 반드시 살아있는 인간과의 문진問診으로 끝이 났다. 백발의 의사가 차트를 읽기 위해 안경을 코끝까지 끌어내리는 동안, 노아는 그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한 때는 안경조차 쓰지 않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노시老視를 느끼는 것이 분명했다. 업그레이드와 교체가 가능한 기계와는 달리 인간의 영육靈肉은 하루하루 늙어간다. 노아도 그도, 골격과 근육, 혈관과 신경으로 절묘하게 뒤얽힌 신체에 갇혀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노아는 죽음을 염두에 두며 대답하였다.

 

“그러니.”

“그럼요.”

 

일상적인 안부 인사로 시작하여 한 주의 업무량이나 스트레스 요인에 관해 묻는 그의 어조나 표정에는 의료인 특유의 침착함이 있었으나, 검사 결과가 동기화된 전자 차트의 항목을 확인하는 눈에서는 엷은 안도의 감정이 엿보였다. 그가 만들어낸 유일한 것이 정상 범주 내의 인간이며, 아직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고 위안하는 과정은 통상 그런 식으로 이루어졌다. 때문에 힘든 일 같은 것은 없고, 직장 사람들과는 두루 원만하게 지내고 있노라고, 노아 한은 하나뿐인 어머니를 향해 살갑게 답하였다.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프로그래밍된 것처럼 언제나와 같은 대답이었지만, 닥터 소피아 한을 만족시키기엔 충분하였다. 

노아는 성심을 다하여 미소하였다.

 

“그러시다니 저도 기뻐요.”

 

 

 

이리디머블 필링스

Irredeemable f--lings

P. Cup

 

 

 

2. 

 

마침 입에 올린 <직장 사람>에 해당하는 사람과 조우한 것은 공교롭게도 노아가 아닌 닥터 한 내외의 직장에서였다.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보낸 병원이었지만, 아무리 익숙한 장소라고 해도 스쳐 지나가는 모든 사람의 얼굴을 구분하거나 아는 척 말을 걸며 돌아다니지는 않는다ㅡ그럴 나이는 지났기도 하고, 더군다나 노아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는 것이 어렵다. 그러나 외과장실에서 나와 로비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때에 노아는 어떠한 위화감을 감지하였다. 한 인영이 반대편 복도 한가운데에 굳은 듯이 멈추어 서 있었고, 그러한 행태는 꼭 행선지를 잃은 사람의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노아는 그에게 도움이 필요한지 확인하기 위해 에어 체어의 방향을 잠시 돌렸다. 노아는 곧 그와 구면이며 그에게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직장 사람과 잘 지내고 있다고 답했었지.)

노아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니 스스로 했던 말에 최선을 다하고자 하였다.

 

“닥터 진? 이런 데서 뵙네요.”

한 박자 늦게 그의 이름이 떠올랐다.

 

보다 접점이 있는 사이였다면 조금 더 일찍 알아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창백한 뺨을 올려다보며 노아는 생각했다. 

 

 

 

3. 

 

노아의 직장, 센트럴 특수공학연구소는 그 권위에 어울리게 매년 많은 공학자들이 입사하였다. 높은 업무 강도를 버티지 못하거나 기관의 요구치에 미치지 못해 1년을 채우지 못하고 퇴사하는 경우도 허다하였지만, 일단은 모두 우수한 인재들이었다. 킬리안 진은 그런 인재 중에서도 같은 해에 입사하여 아직 퇴사하지 않은 동기였다. 이야기를 나눈 일이 한 손에 꼽을 만큼 적은 또 다른 동기, 엔시아 오스타라에 비해도 그와는 유독 접점이 희소하였는데, 그건 아마 오스타라 쪽이 그나마 조직 문화에 타협하기 때문일 것이다.

(여러분, 단언컨대 노아는 두 사람에 비하면 <사회생활>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달리 말해 연구소 내에서 노아가 킬리안 진에게 어떠한 인상을 받을 기회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좋았다. 입사년도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거의 알지 못하는 그에게 일련의 동지애를 느낄 뿐, 그것이 노아만의 일방적인 호감이란 사실도 익히 잘 알고 있다. 노아는 인간관계에 욕심이 적었다. 직장에서 친구를 사귀리란 기대 같은 것은 애초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노아가 그에게 말을 걸었던 것은, 

 

 

 

4.

 

그럴 필요가 있다는 정보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킬리안과 병원에서 마주쳤을 때 노아는 휘핑 크림과 초콜릿 시럽이 잔뜩 뿌려진 초콜릿 라떼를 마셨다. (덩달아 같은 음료를 주문한 것인데, 그렇게 단 음료를 선택한 것은 처음이었다.) 일부러 알려 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 이후 노아는 연구소에 떠다니던 소문들을 어렴풋이 식별하게 되었다. 인명사고에 대한 인륜적인 애도와, 사망자와 킬리안 진 사이의 관계, 그가 더 괴팍해진 것 같다는 조심스러운 우려 같은 것들.

걱정과 안타까움에서 시작된 이야기였겠지만 사실 그것들은 모두 가십거리였다. 가깝지 않은 타인의 불행과 비극은 흔히 호기심이나 흥미의 먹이로 전락하곤 하였다. 물론 노아도 킬리안도 병원에서 동료와 만난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는 않았다. 노아는 소문을 물어 나르는 사람이 아니었지만―노아의 취향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이득이 될 부분이 하등 없는 것 같았다―, 들려오는 이야기를 모두 흘려들을 수는 없었다. 그 날 마주했던 창백한 얼굴과 이야기 속의 단서들은, 킬리안이 어느 날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을 때 그의 이상을 조금 더 유추하기 쉽게 해주었다.

 

“흉통胸痛이 있을 때도 도움이 돼요.”

 

인간의 영과 육신靈肉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었다. 심적인 고통에는 종종 물리적인 통증이 동반되었으므로, 진통제는 종종 도움이 되었다. 항시 휴대하고 있는 소염진통제를 건네며, 노아는 통증이란 말을 입에 올렸다.

 

통증은 실제 또는 잠재적인 신체 손상과 관련된, 불쾌한 감각이나 감정적 경험을 의미한다. 

방대한 양의 기록과 자료, 데이터와 가상 현실, 촉각 통신 기술을 이용해 세상의 다양한 현상들을 간접적으로 체험하였으나, 노아는 상실喪失을 무엇으로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에게 이렇게 강렬하고 깊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은 경이롭고도 애처롭게 느껴졌다. 노아는 노아가 모르는 일에 대해 감히 입을 놀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고는 굉장히 갑작스러운 비극이었다고 들었다.

그것만은, 노아도 분명 경험한 적이 있다.

 

“이따금 속절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 같아요. 진.”

곁을 지키다 문득, 노아는 그렇게 말했다. 감히 노아에게도 건넬 수 있는 위로가 있음에 쓸쓸함을 느꼈다.

 

“다들, 무엇이든 지나가거나 익숙해진다고들 하는데.”

한동안 말이 없던 킬리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물 없이 약을 삼키느라 찡그렸던 미간이 어느새 고요해졌다.

 

“정말로 그럴까요.”

“…….”

 

노아는 잔잔한 얼굴로 킬리안을 바라보았다.

지난 일은 지나갔을 뿐이다. 남겨진 인간만이 지나간 일의 여파에 오래도록 괴로워한다.

 

“그렇겠죠, 아마?”

 

그러나 어떠한 일에 기인한 손상은 치유할 수 없기도 했다. 이미 10여 년이 흐른 사고의 여파를 노아는 매일 경험하였다. 인간인 노아는 결코 그 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죽는 날까지 노아 자신의 일부로 안고 살아가는 것 말고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지금으로부터 20년이 더 흐른다고 그 감각에 익숙해질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를 낙담시킬 마음도 그에게 거짓을 말할 생각도 없었으므로, 대신 노아는 선선히 웃었다.

언젠가.

 

“제가 알게 되면 진에게도 꼭 알려줄게요.”

 

노아는 노아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을 고른 것 같았다, 노아에게도 킬리안에게도.

물론 그 정도의 대답은 누구라도 할 수 있었으므로 킬리안은 노아와 다른 감상을 가질 수도, 어쩌면 노아가 방금 한 약속을 빈말로 취급하거나 완전히 잊어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였다.

 

 

 

5.

 

어느 날엔가 킬리안이 케이크를 사 들고 연구실에 찾아온 적이 있다. 그가 그렇게 하기로 한 까닭을 노아는 몰랐지만, 대접할 음료가 허브향의 술밖에 없는 것은 조금 반성이 되었다. 킬리안과 나누어 먹은 갸또 쇼콜라에는 가나슈로 된 필링이 들어있었다. 노아는 디저트나 베이커리에 관심이 낮은 사람이었지만 그 부드럽고 연약한 식감은 분명 인간의 어떠한 심정에 위로가,

보충이 될 것 같았다.

 

 

 

#.

 

작은 전자음을 끝으로 손안의 USB에 상태표시등이 꺼졌다. 노아는 그 저장장치 안에 들어있던 어떤 소프트웨어가 손상되었음을 어렴풋이 짐작하였다. 그 소프트웨어는 불과 얼마 전까지 그들을 공격했던 아미쿠스 알파에 침입해 하드웨어로 사용하다가 이 USB로 흐르듯 이동하였다. 영겁같이 길었던 어둠과 폭력의 시간이 끝나고 잠겨 있던 문이 열렸다. 의아하게도 그것은 노아가 5년간 생활한 직장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터무니없는 일을 당했다. 그러나 홀로 공황에 빠지기엔 너무 많은 부상자가 있었고 노아는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하였다. (물론 사지 모두가 멀쩡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아하하.) 냉정을 다짐한 노아는 문의 개폐부를 에어 체어로 떠민 채 부상자와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을 구분하였다. 로즈 화이트 경위가 부상자를 한 사람 한 사람씩 문밖으로 끌어 나르는 동안 노아는 연구소와 전담국에 보고할 수 있는 사항과 보고해야 하는 사항, 그중에 공중선을 통해 보고해도 되는 것과 대면 보고가 필요한 것을 구분하여 몇 통의 통화를 했다.

 

“진?”

 

시야에 같은 변을 겪은 동료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 노아는 어렵지 않게 그를 알아본다.

 

“진, 진…….”

“진.”

 

노아가 움직일 수 있는 사람으로 분류했던 킬리안은 구급차를 부르는 데 어떠한 난항을 겪고 있었다. 하려는 말이 잘 정리되지 않는 것 같기도, 목소리를 내는 것이 힘든 것 같기도 했다. 문이 완전히 고정되었는지 확인한 뒤 노아는 그에게 에어 체어의 부피가 허락하는 한도까지 다가갔다. 목에 힘을 주어 이름을 불러봤지만, 통화 중인 구급대원뿐만 아니라 앞에 있는 노아의 부름도 잘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손끝이 하얗게 되도록 유테크를 움켜쥐고 있을 뿐이었다. 스피커 너머로 응답을 재촉하는 목소리가 노아에게까지 들려왔다.

 

“킬리안,”

 

알고 지낸 지 수년이 흘렀지만 노아는 여전히 킬리안 진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 그의 불안과 동요를 유추하기에 충분한 정보를 갖고 있었다. 그러할 필요를 느꼈으므로, 노아는 평소의 노아가 쉽사리 하지 않는 일을 했다. 늘 등을 기대어 앉아 있던 에어 체어를 기울여 상체를 바짝 내밀고, 그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는다. 반응이 느껴졌다. “킬리안,” 어렵사리 눈이 마주쳤다.

 

“유테크를 줘요. 괜찮아요.”

 

 

 

 

 

200229

닥터 킬리안 진과의 관록. 로그의 대부분을 11월에 작성했는데 이렇게나 늦게 완성을 한다...

bgm은 킬리안의 음악 취향을 고려하여 선정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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