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조금 불편한 날씨다.
"비가 많이 오네요. 어떻게 집에 간다……."
비를 좋아했었다. 당신이 비 오는 날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당신은 비가 오는 휴일이면 쇼팽을 틀어놓고 요리를 하곤 했고, 그래서 나는 늘 달군 팬에서 기름이 지글거리는 소리와 비가 바닥을 때리는 소리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다. 술에 약했던 나는 당신이 만든 안주에 맥주 한 캔을 나눠마시고도 금방 나른해져서, 당신의 무릎에 뺨을 기대고 실없이 웃곤 했다. 누나. 부르면, 가끔은 부르기도 전에, 당신도 내 곁에 몸을 눕힌다. 다 마신 맥주캔이 발끝에 걸려 넘어지고, 빗소리가 거세지거나 약해지거나, 틀어놓은 CD가 모든 트랙을 돌고 잠잠해져도 방 안은 상냥하게 시끄러웠다. 비가 내리든 내리지 않든, 휴일의 섹스는 당신도 나도 좋아하는 것이었다.
"별 수 없나……. 우산도 없고, 그칠 때까지 좀 더 마실까."
맞은 편에서 소주병을 비우던 선배가 투덜거리듯 말했다.
나는 미안한 듯 웃으며 그러자 말했지만, 사실 별로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날씨와는 상관이 없다. 그 집에는 아무도 없다.
"장마가 빨리 오나봐요."
"우산 좀 갖고 다니지. 술 마신다니까 지갑만 들고 나왔냐."
걱정이 담긴 목소리가 귓가를 쓸고 지나간다. 선배의 평소 표정은 사납지만, 이따금 손을 뻗어 머리를 쓸어줄 때면 굉장히 다정한 표정을 지어주곤 했다. 이런 것에 목마른 나는 실없이 웃으며 되물었다. 그러는 선배는요. 시커먼 후배놈이 뭐가 좋다고 또 불러주셨어요? ……. 선배는 말을 아낀다. 좋은 구석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불쌍했을 뿐이겠지만, 선배는 굳이 그렇게 소리내어 대답하는 대신 손을 떼내면서 창 밖을 내다보는 것이다. 진짜 비 많이 오네, 죽죽 쏟아진다, 하고. 정말이지 친절한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선배가 이토록 내게 친절한 이유도 알고 있다. 다른 특별한 호감이 있어서가 아니다. 내게는 동정받기 쉬운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하하,"
물론, 당신이 나를 두고 죽었기 때문이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 마셔요, 마셔."
"오냐, 따라봐라."
나는 두 손으로 술을 따르고, 두 손으로 잔을 받는다. 챙, 유리잔이 부딪치면서 작은 수면이 찰랑찰랑 흔들린다. 고개를 돌리면서 입 안에 털어넣는다. 떫고 쓴 맛이 목을 뜨겁게 쓸고 지나간다. 이제는 맥주 한 캔 정도로는 취하지도 않았다. 나는 술을 배웠다.
알코올은, 언제나 당신을 기억해내는 데에 도움이 됐다. 당신이 이제 없다는 사실을 잊는 데에도.
"크으,"
술이 얼마나 편리한 음료인지는 술을 배우면서 함께 알았다. 여전히 술은 맛이 없지만, 사랑하는 당신을 잃고 시름에 잠긴 나라도 웃을 수 있다. 아니, 그런 나라서 웃으면서 선배에게 술을 권할 수 있다. 마시고 마시다보면 선배도 나도 조금씩 조금씩 느슨해지고, 내 주량이 늘어나는 만큼 선배가 마셔야할 술의 양도 늘어난다. 그것에 선배가 부담을 느낄 것 같을 때면, 난 쓸쓸해하면서 당신의 핑계를 대면 되는 것이다. 운없이 시커먼 후배놈을 상대해주고 있는 이유를 상기시켜주면, 선배는 대꾸없이 술을 입 안에 털어넣곤 했다.
"집에 들어가셔야 할텐데 어떻게 해요?"
"비 때문인데 뭐, 어쩔 수 없지."
"영 안 그치네요. ……그 사람, 비 오는 날을 좋아했었는데."
"……아."
그러니까, 바로 지금처럼.
비로 부옇게 번진 유리창을 바라보다가, 나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웃는다. 그렇게 소리내어 중얼거리면, 당신이 그리웠던 것도 같다.
"……저는요, 비가 싫어요."
그리운 당신.
당신이 좋아했던 비가 내리는 날인데, 나는 오늘도 당신을 팔아 좋아하는 사람의 시간을 사고 있다.
"딱히 나쁜 기억이 있던 건 아니지만,"
"그 사람이 좋아했었지, 하고,"
취한 사람처럼 들쭉날쭉, 더듬더듬, 말꼬리를 느슨하게 늘려가면서,
"저도 모르게 그 사람을 생각하게 되니까……."
정말로 올라올 것 같은 취기를 억지로 누르거나, 그 위에 올라타거나 하면서,
"그러면……조금 외로워지니까,"
나는 잃어버린 당신에 대해 정성껏 주정을 늘어놓는다. 나는 선배가 아니라 비가 내리는 창을 바라보고 있지만, 선배의 걱정어린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술은 당신의 빈 자리를 잊게 해주기도 했지만, 당신의 기억을 끄집어내 무언가 말하게 하는데도 도움이 됐다. 그런 것을 말하고 있으면, 당신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너무 일찍 죽었던 당신을 생각하면, 나는 조금 괴로워진다. 하지만 그 죽음을 팔아 관심을 구걸하는 나를 생각하면, 그것보다 조금 더. 아주 조금, ……많이. 하지만 견딜 수 있다. 외롭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니까……비는 싫어요."
힘없이 웃으며 말한다. 그러자, 비가 불편할 나의 선배는 그랬느냐며 작게 한숨을 쉬고 술잔을 비운다.
물론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나는 당신이 내 일부가 되기 전부터 비를 좋아했다. 비 오는 날의 눅눅한 공기와 특유의 냄새도, 우산을 때리는 빗방울도, 바람소리도, 물에 젖은 옷감처럼 색이 짙어진 창 밖의 풍경도, 한밤처럼 어두웠던 하늘이 낮처럼 밝아지는 순간의 오싹함도 좋아했다. 당신과 사랑에 빠지게 됐다고 해서 갑자기 비가 싫어질 리는 없다, 당신도 비를 좋아했으니까. 기름을 넉넉히 써서 반들거리던 당신의 김치전도, 당신이 쇼팽이라 해서 쇼팽이려니 하고 흘려들었던 피아노곡도, 당신과 한 모금씩 번갈아 나눠마셨던 차가운 캔맥주 몇 모금도,
"아, 병이 비었네요."
당신은 한 모금도 제대로 마시지 않았었지만, 상관없었다.
그 몇 모금에 쉽게 따뜻해지는 나와, 바른 정신으로 내게 닿아오는 당신과, 당신의 체온에 기대 몽롱한 취기를 토하는 것도, 나는 전부 좋았다. 비 오는 날의 당신은 사랑스러웠고, 내게는 비에 관한 안 좋은 추억 같은 것도, 괴로운 기억 같은 것도 없었다.
괴로운 것은 비의 탓도, 당신의 잘못도 아니었다. 나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마저도 상관없었다.
"새 병이니 또 건배할까요?"
비를 좋아했었다. 그리고 지금도 비를 좋아한다. 그것은 당신이 비 오는 날을 좋아했기 때문이고, 내가 비 오는 날을 좋아했기 때문이고, 함께 빗소리를 듣던 당신이 이제 없다고 해서 갑자기 변하거나 하는 감상은 아니다. 여전히 비는 조금 불편하니까,
"건배."
"건배."
지금처럼 쏟아지는 동안이라면, 좋아하는 선배는 어디로도 가지 않는 것이다.
밀린 리퀘스트를 수행해봅시다. 비 오는 날 청승떠는 HS.
너무 드문드문 썼더니 글이 누더기같지만 더 끌고 있어봤자 나아지지 않을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