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춥다."
중얼거리자, 기율은 그래? 하고 손을 잡아주었다. 맞닿은 손가락을 타고 체온이 전해졌다.
그렇게 한다고 2월의 추위가 냉큼 가실 리는 없지만, 마음 한 켠으론 장갑을 두고 나와서 잘 됐다고 생각한다.
2월, 정확히는 2월 3일. 이제는 연례행사가 되어버린 기율과의 저녁식사가 끝난 참이었다.
룸메이트에게 지민은 늘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대답했지만, 사실 기율이 지민의 친구였던 적은 없다. 물론 남자친구였던 적은 있지만, 모쪼록 그와 돈독한 우정을 나누는 사이는 아닌 것 같다. 작년의 오늘처럼, 재작년의 오늘처럼, 오늘도 케이크를 자르고 잡담을 하며 웃었지만, 친구와의 저녁식사와는 결코 같지 않았다. 그것은 언제나, 언제나 한 때 사귀었던 남자와의 데이트가 되고 말았다. 헤어졌던 EX들과는 이미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지내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이 만남은 조금 이상하단 생각도 든다.
"차갑지?"
"그야, 차갑지만."
기율이 웃었다.
"업혔을 때 무겁지, 하는 거랑 다를 게 뭐야?"
"……그러게."
시선을 멀리 돌린다. 멀리에 지민이 타야하는 버스가 오고 있었다.
나 저거 타. 알아. 기억력도 시력도 좋은 그가 맞잡았던 손을 놓아준다. 지민은 빈 손으로 핸드백을 뒤적여 카드지갑을 꺼내들었다. 작별인사만 하면 되는데 왠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와중에 사거리의 신호가 바뀌느라, 몇 미터 앞에서 버스가 멈춰선다. 버스를 가로막은 횡단보도 위로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며 흘러가고 있었다. 운이 없는 버스였다.
이따금씩, 지민은 그런 버스 안에서 그와의 약속시간을 넘기곤 했었다.
꼭 약속시간이 촉박할 때의 버스는 하얀 사각형에 걸려 야속하게 멈춰서곤 했고, 그럴 때면 차 안에 갇힌 채 두 차례의 건널목 신호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운명의 장난 내지 머피의 법칙같은 것을 일일이 초조해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지민은 버스에 매달린 시계의 초침을 노려보지도, 핸드폰을 열어 눈 앞에 보일 버스 안에 타고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지도 않고 약속시간을 흘려보냈다. 그저 저 너머에 어렴풋이 보이는 키 큰 남자의 인영이 기율이겠거니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 예상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아, 신호 걸렸네."
"그러게. 2분이던가."
기율의 흐르는 듯한 대답에, 문득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본다. 그는 희미하게 웃고 있다.
미안, 신호에 걸렸네. 그러게, 보고 있었어. 약속했던 시간보다 2분 늦게 도착한 여자친구에게 기율은 언제고 관대했다. 그저 데이트를 망치지 않으려는 그의 지혜인지도 몰랐지만, 그 미소 덕분에 지민은 갇힌 버스 안에서 뻔한 문자메시지를 보내거나 시계의 분이 늘어나다가 도로 00이 되는 것을 보며 안절부절하지 않아도 됐었다. 늘 그 운나쁜 신호를 기다려주던 그의 말대로, 2분 정도 뒤면 버스가 도착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2월 3일이 돌아올 때까지 아마 만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헤어진 사이니까. 하지만 친구가 아니었으니까.
어쩌면, 친구가 될 일은 영영 없을지도 모른다.
연인이었던 시절과 다를 것 없는 온유한 미소를 보면서, 지민은 그렇게 생각했다.
"……율아."
정말 좋아했던 남자친구를 부르던 호칭 그대로, 지민은 기율을 부른다. 그러자 그가 응? 하고 버스에서 시선을 떼고 내려다본다. 왠지 그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지민은 다시 버스로 고개를 돌린다. 어느 새 한 차례의 신호가 끝나고, 이번에는 버스의 건너편 횡단보도 위로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목까지 차오른 기분이 이상한 포장에 싸여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응?"
"그 날, 그 책을 사서 다행이었어."
그를 바로 눈 앞에 두고도 떠오르는 이 기억들이 언제쯤 추억이 될지는 자신이 없었다. 적어도 아직은, 절대로 오늘은 아니었다.
하지만, 기율과의 모든 날은 전부 좋은 추억이 될 것이었다. 오랫동안 숨을 죽이고 기다리다보면, 언젠가는.
"서점에서 그 책을 골라서, 그 전차를 타고, 그 자리에 앉아서."
지민은 웃었다. 연인이었던 시절에 짓던 것처럼 매끄럽게, 이 웃음으로 그가 무언가 기분좋은 기억을 떠올려주길 바라면서.
"……율이도, 그렇게 생각하지?"
멈춰서있던 버스가 조금 뒤뚱거리다가, 느릿느릿 가까워져온다. 기율이 대답 대신 다시 손을 내밀었다. 아직 헤어지기까지는 몇 초 정도가 남아있다. 그 손바닥 위로 왼손을 얹자, 그가 양 손으로 손가락을 꼭 감쌌다가 놓아주었다. 갈게. 응, 잘 가. 응, 잘 들어가. 응. 가. 늘 만나 데이트를 해왔던 장소에서, 오늘은 데이트를 마치고 작별인사를 한다. 그를 등진다. 작은 마법처럼 손끝이 외로워졌다.
아, 역시 다음 2월에는 꼭 장갑을 챙겨야지, 생각했다.
겨울의 가죽장갑은 레알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어디서... 망한 냄새 안 나요?... 어디긴 어디야 이 로그가 망한 냄새지ㅠㅠㅠ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