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의연
교연이 침대 위에서 발견한 것은 봉투였다. 붉은 봉투를 기대어두기 위해, 반듯하게 펴놓고 나갔던 침대보가 조금 구겨져있었다. 가벼운 결벽기가 있는 그였지만, 그의 룸메이트는 필요한 부분만을 맵시있게 손대두었기에 차마 미간을 찌푸릴 수가 없었다. 교연은 손가락을 구김 뒤로 넣어 그것을 집어들었다. 봉투 안에는 하얀 카드가 한 장 들어있었다:
Happy Valentine's day!
Your H.
의겸의 필기체는 꼬리가 조금 긴 것을 빼면 교과서처럼 전형적이어서, 오히려 단정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교연은 혹시나 해서 카드의 뒷면을 뒤집어보고, 봉투도 다시 털어봤지만, 막 구입해온 것 같은 종이냄새를 빼면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의겸은 그 짧막한 인사 한 줄밖에 남겨두지 않았다. 오늘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인사를 남기고 간 곳은 교연의 침대 위 뿐일 것이었다.
2. 진진
녀석이 조금 늦게 귀가했다. 내가 조금 일찍 온 것도 있었지만, 전적으로 과외선생을 기다리게 하는 제자 쪽이 나쁘다. 요즘들어 건방지게 실실 쪼개는 게 얄밉기도 했고 잘 됐다. 이렇게 저렇게 혼내줄 계획을 짜고 있는데 현관문이 띠릭띠릭 소리를 내더니 활짝 열렸다. 내 눈높이를 훌쩍 넘긴 녀석의 멍청한 면상이 등장. ……어라.
"……아, 선배 왔나. 일찍 왔네."
그 손에는 알록달록한 짐이 한 가득. 그런 건가. 해피 발렌타인이라던가, 그런 건가, 그런 건가.
순간 기분이 확 나빠졌다.
"……정이진."
"왜?"
"왜 늦었어?"
"왜 늦었냐니, 선배가 일찍 온거다."
어라. 웬일로 말대답이 꼬박꼬박 돌아온다. 뭘 잘못 먹었나? 짜증나서 퍽 걷어찼더니 이진이 잠깐 균형을 잃었다. 하지만 나보다 체격이 있어선가 넘어지지도 짐을 떨어뜨리지도 않는다. 재수없다. 몇 번 더 걷어차봤지만 맞아준 건지 피한 건지 애매한 타격감. 그런 사이로 신주머니를 내려놓거나 운동화를 벗거나 하고 태연히 집에 들어온다.
"짜증나."
"하하, 선배 오늘 기분 별론가."
보면 모르냐고.
웃는 낯이 짜증난다. 이상하게 반짝반짝한 것도 기분나쁘고, 잔뜩 받아온 초콜렛 꾸러미도 왠지 멍청하고, 짜증난다. 이제 고3 올라가는 애들이 할 일이 그렇게 없나? 왜 녀석한테 초콜렛 같은 걸 주고 있는거야? 아니꼬와서 다시 한번 퍽, 팔꿈치를 쳤더니, 아니 치려고 했는데 솜씨좋게 피해버린다. 몸으로 안 된다고 해도 난 녀석의 선배다. 방법은 있지.
"정이진, 그거 다 버리고 와."
"왜?"
"짜증나니까."
"먹을 거 버리면 안 된다, 선배."
……ㅓ아ㅓㅣ;?
짜증이 나다 못해 어이가 없어져서 잠깐 할 말을 잃은 사이, 이진은 쇼파 위에 짐을 와르르 내려놓고 있었다. 아, 바닥에 엉망진창으로 내팽겨쳐지는 걸 보고 싶었단 말이야. 하지만 이제 와서 다 집어 던지는 것도 좀 아니다. 어쩌지. 선배. 왜? 분노하고 있는 나를 거의 못 본 척 하다시피 하고 있던 이진이 어느 새 가나초콜릿을 하나 손에 꼭 쥐어준다.
그거 하나만 호주머니 안에 따로 들어있었다.
"어?"
"이건 선배 꺼다. 천원 주고 샀다."
자랑스럽게 웃는다.
……이 멍청이가. 오백원짜리를 왜 천원 주고 사와?
3. 귤밀
"우체국입니다. 택배 수령하세요."
"……네, 나가요."
별로 그런 것처럼 들리지는 않지만, 여자친구의 방문.
예고문자도 인터폰도 없이 문 앞에 당도한 손님을 위해 기율은 현관으로 나갔다. 문 앞에는 파란 모자를 눌러 쓴 택배 기사 대신, 평범한 코트 차림의 여대생이 하얀 숨을 뱉으며 서 있었다. 읏차, 주 기율 씨 맞으시죠? 이렇다할 인사를 하기도 전에 커다란 상자가 품에 떠넘겨진다. 흔한 소포지로 포장된 상자의 뚜껑 위에, 거대한 귤색 리본이 감겨있었다.
"아, 고마워."
오늘은 2월 14일. 흔히 발렌타인 데이라고 부르는 날이다. 적지 않은 연애경험에 미루어봤을 때, 이런 날에 받는 상자 속의 내용물은 당연히 초콜릿, 조금 비껴가봤자 쿠키나 케이크일 것이었다. 생일 철이 막 지났으니 케이크는 제외하더라도, 주전부리라기엔 손 안에 범상치않은 중량감이 느껴졌다. 뭔가 재미있는 장난이라도 떠오른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먹을 거 아니야?"
"맞는데? 군것질거리."
맛있게 먹어. 양치도 잊지 말고 하시구요. 그리고 지민은 인사처럼 어깨를 짚으면서 가까이 턱을 당겨왔는데, 기율이 안고 있던 상자와 신장 차에 가로막혀 입을 맞추는 데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녀가 장난스레 지어낸 분한 듯한ㅡ혹은 아쉬운 듯한ㅡ표정은 물론 볼만했지만, 장난이라고 하자면, 별로 재미있는 장난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안 들어오게?"
어느 날의 작별인사 같았다는 점에서.
"응. 오늘은 택배니까."
"택배라서?"
"네, 택배라서."
지민은 조금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섰는데, 추위에 양 뺨이 얼어있었기에 뿌듯해하는 것인지 부끄러워하는 것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기율은 품 안의 상자로 시선을 힐끗 내린다. 택배라고 말은 해도, 그 위에 수신인이나 발신인의 주소 같은 것이 쓰여있지는 않다. 뚜껑 사이를 엿보자 그 안에는 반들반들한 감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알알이 연두색 리본을 두른 귤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주전부리기는 했다.
"저기, 지금 내려가고 계신 기사님."
"응?"
계단에 대고 부르자, 난간 사이로 지민의 얼굴이 기율을 올려다본다.
여전히 양 빰은 파리하게 붉고, 수줍어하는 건지 즐거워하는 건지도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사인 받아가셔야죠."
지금 바깥이 춥다는 것 정도는 알아보기 쉬운 일이다.
4. 연우연+할날
"임마, 먹으라고 줘도 안 먹는다."
어이없다는 듯이 핀잔을 주는 연의 목소리가 꽤 뾰족해서, 연우는 냉장고를 열다 말고 거실을 돌아보았다. 쇼파 위에는 연과 그의 고등학교 친구이자ㅡ익애하는 길드원 윤 나리 양의 남자친구라고 자칭하는 남자가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 풍경이 눈에 조금 거슬려서, 연우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하루가 동거인을 지나치게 자주 방문하는 친구라서도, 귀여운 나리를 끈질기게 쫓아다니며 귀찮게 하는 남자라서도 아니다. 나리의 주기적인 험담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금 음침한 인상일 뿐 꽤 성실한 사람처럼 보였던 것이다. 게다가 학교의 동문이라고 하면 묘하게 가산점이 붙는 것이다. 하루라는 사람 자체가 눈에 거슬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맛있는데."
……하지만, 그 커다란 덩치로 쇼파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핑크색 바구니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은 보기에 썩 쾌적하지 못하다. 연우는 생각까지는 입 밖에 내지 않기로 하고, 다시 냉장고로 시선을 돌려 본래의 목적이었던 생수병을 꺼냈다.
"안 준다며. 안 먹어봐도 파는 쪼꼬렛이 다 똑같지 뭐."
"그래도, 나리가 준 거니까……."
방금 입에 넣은 초콜렛에서 벗겨낸 포장지를 구깃구깃 한 쪽에 뭉쳐놓으면서, 하루가 기쁜 듯 말하고 있었다. 그의 눈물겹고 끈질겼던 구애는 이제서야 겨우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렇게 무서운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하고 언젠가의 나리가 투덜거린 것을 기억한다. 피해다니기를 포기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발렌타인 데이까지 챙겨준건가.
"……발렌타인 말이야, 좋은 거구나."
"네에, 어련하시겠어? 많이 먹어라."
행복에 겨운 하루에게는 어떻게 들렸을지 모르겠지만,
흥얼거리듯 말하는 연의 목소리가, 연우의 귓가에 유독 구깃거렸다.
5. 사란
"사현, 사현."
평온한 빛비춤달, 유금 가.
유금 가의 소가주는 여느 때처럼 입궁 채비를 하던 중이었다. 거울에 쿨-시크한 얼굴을 비춰보며 관복의 깃을 여미고 있는데, 그의 아내가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거짓말처럼 사현의 얼굴에서 쿨-부분이 증발하고, 무른 미소가 퍼졌다.
아아, 나는 차가운 도시남자. 하지만 내 여자에겐 따뜻하겠지?……아니, 이건 당최 어느 나라의 싯구인건지.
"무슨 일이에요, 가란?"
"……이거, 가져가서 나눠드세요."
가란이 내민 것은 수수한 무늬의 비단보에 감싸인 꾸러미였다. 당장 풀어볼 수는 없겠지.
"이게 뭔데요?"
"유과……인데요."
곧 산달을 앞둔 아내는 수줍게 말을 내놓았다. 어제는 갑자기 단 과자가 먹고 싶어져서 아가씨께 부탁을 드렸었는데, 엿장수에게 바다 너머의 나라에는 정인에게 과자나 엿 따위로 마음을 전하는 풍습이 있는 날도 있다고 들으셨다고……. 여기야 단야국이고 자기야 단야국의 왕녀니 상관은 없겠지만, 이미 가약을 맺은 반려에게 다시 마음을 전하는 것도 조금 어쩌고어쩌고, 결국 전해주는 것 뿐이지만 어쩌고저쩌고, 그런 가란의 모습을 사현은 잠시 부드러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모쪼록, 그 마음만은 열심히 전해져온다.
"가란."
"네?"
"고마워요. 다녀올게요."
어린 아내는 뺨을 붉히며 웃었다. 달큰한 꿀이 흐르는 아침이었다.
6. 쥬하
"……어라."
하늬가 단정하게 포장된 초콜렛을 내밀었을 때 지후가 든 감상은 사실 그게 전부였다. 그것이 여과없이 밖으로 튀어나온 것은 일단 웃은 뒤였지만, 어라? 뒤로는 정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아서, 말을 잇기 위해서는 머리를 조금 굴려야했다.
"친구라서 주는 건가, 의리 있는데?"
하늬와의 관계는 정의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우정을 나누는 사이는 아니었다. 차라리 침대친구라고 하면 모를까. 그걸 염두에 두고 들었는지, 일순 하늬의 눈빛이 조금 변했던 것 같다. 변했었다고 생각한다. 의리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평범한 친구로써 지후가 받아온 의리초콜렛이 이런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크기나 부피나, 예상되는 가격적인 면에서……
……까지가, 머릿 속으로 생각하던 것들이었다.
"고마워."
그래서 그런 것을 생각하기 전에 떠올랐던 말로 마무리짓는다.
화려하지 않은 포장지를 벗겨내고, 상자의 끝을 손톱 끝으로 뜯어냈다. 대단하지 않은 것처럼, 서랍처럼 담겨있던 몇 갠가의 초콜렛이 끌려나왔다. 한 알을 집어서 입 안에 넣고, 맛을 느끼기도 전에 하늬에게도 권한다. 그녀의 손가락이 초콜렛을 하나 집어들었다. 씹는 것을 잊고 있는 사이, 조금 씁쓸하고 달짝지근한 맛이 입 안에 엉겨붙었다.
2월의 풍습은 아직, 혹은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어라, 고마워.
그 정도의 일인 것 같았다.
발렌타인 로그니까 2월에 행동하는 쪽 + 답로그 위주로..
민란이나 한묘나 명소, 바늘이나 소휘가 없는 것은 그런 탓이라고 생각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