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정복이나 할 것이지, 보쌈해 갈 게 없어서 오레노 요메를…….
마왕성을 평정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개나소나 찍는다는 만렙은 옛날옛적에 찍었고, 동료들에게 강탈하다시피 선물받은 장비빨도 잘 받았던 것이다. 용사는 손 안에 들어온 몬스터-볼을 내려다보며 속으로 본심을 중얼거렸다. 주먹만한 그 공은 겉보기엔 평범했지만, 버튼을 눌러 붉은 뚜껑을 열면 용사의 펫이 된 마왕을 소환시켜줄 것이다. 몇 번 땅에 퉁겨보다가 금방 새 장난감에 질려버린 용사는, 공주가 갇혀있다는 고탑으로 걸음을 옮겼다.
ㅡ그러니까 숨이 찬 건 전투가 힘들어서가 아니라 계단이 너무 많아서다.
용사가 탑의 꼭대기에 도착했을 때엔 이미 달이 떠 있었다. 고풍스러운 침대에 드리워진 실루엣이 홀로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용사는 한 걸음에 달려가 공주를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누르고 그 인영을 잠시 바라보았다. 뒤늦게 인기척을 느낀 듯한 공주가 뒤를 돌아보았다. 달빛 때문에 잘은 보이지 않지만, 자신을 향해 미소짓고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쓰고 있던 투구를 벗으며, 용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주님,
……구하러 왔어.
용사의 입술 사이에서 낭랑한 미성이 흘러나왔다. 많은 계단 덕분에 조금 땀을 흘린 흑발이 어깨를 흘러내리고, 상기된 뺨이 달빛에 하얗게 빛났다. 그러자 앉아있던 공주가 팔을 뻗어 용사를 침대로 끌어당겼다. 진작 끌어안을 걸 그랬나 후회하기도 전에, 그 팔 안에 쓰러지듯 안긴다. 입술 위를 가볍게 누르고 떨어진 공주의 입술이, 부드러운 호를 그리며 말했다.
ㅡ글쎄, 왕자라니까? 용사님.
그치만 한 번쯤 저런 대사 해보고 싶었다구.
나 백마도 타고 왔다? 하고 으쓱거리는 그녀의 눈이 조금 피곤해보였기에 프린세스, 아니 프린스 기율은 그랬어? 하고 눈을 휘었다. 멋있네, 백마 탄 기사님. 하고 머리를 쓸어주자 글쎄, 기사 작위는 없지만……. 하고 지민은 현실적인 이야기를 걱정했다. 그나저나……달도 떴잖아. 너 왜 안 자고 있었어? 오늘쯤 올 것 같아서, 안 자고 기다렸지. 자고 있어야 했어? 지민이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며 툴툴거렸다. 당연하지. 어릴 때 동화책은 안 읽었어? 무슨 동화책?
밤에 오면 입맞춰서 깨울 수 있을 거 같아서 저녁 때 왔는데.
왕자가 폭소했다. 키스는 했잖아? 그치만 한 번쯤 해보고 싶었다구(2) 백마탄 기사님이라면 한 번쯤 해봐야되는 거 아니야? 키스로 공주님 깨우기. ……방금 전엔 기사 작위 없다고 하지 않았어? ……에이. 그런 사소한 건 접어둬.
그녀의 왕자에게 손쉽게 무장해제되고 있던 지민이 짧게 박수를 쳤다. 그래, 왕성에 가면 너 구해온 상으로 뭔가 줄지도 몰라, 작위라던가 작위라던가, 기사 작위. 기사 작위가 갖고 싶어? 글쎄, 주면 받아야지. 어쩌면 정말 백마 탄 기사가 될 수 있을지두. 눈을 빛내는 그의 여기사를 내려다보며 기율은 그럴지도 모르지, 하고 조용히 웃었다.
왕성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건 기사 작위가 아니라, 프린세스의 왕관이 아닐까 싶지만.
F(x)의 chu♡를 들으면서 썼음. ...
그냥 말 타고 싸우는 캐릭터면 다 기사인 거 아닌가 싶긴 하지만 기냥 뻘장난이 하고 싶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