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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의 애매한 서화

All I wanted, only one, street level miracle




 "말도 안 돼. 헤어졌다구?"

 지해가 입을 떡 벌렸다.

 "응."

 대답하면서, 지민은 들고 있던 소주잔을 한 숨에 비웠다. 달고 끈적거리는 액체가 목 안을 긁으면서 넘어갔다. 지해는 그런 그녀를 신기하단 듯이 보다가 빈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술시중에 고마워하기도 전에 번거로운 질문이 돌아왔다.

 "왜?"

 그러니까, 번거로운 질문.

 "왜 헤어졌는뎅? 얘기해죠."

 글쎄 왜였을까.
 대답하지 않자 지해는 저 혼자 이것저것 떠들기 시작했다. 군대는 다녀왔다 그랬잖아? 군대는 아니고, 설마 손버릇인가? 나빠? 나쁜 거 알았으면 더 일찍 헤어졌을테고. 아님 너무 바빠? 거의 맨날 보는 것 같더니 아니야? 아님 밀이가 바빠서? 그건 아닐텐데. 그게 아니면……. 지해의 수선을 잠시 무시한 채, 지민은 침대에 등을 기댔다. 희미한 취기 덕분에, 헤어진 남자친구의 키나 얼굴이나 학벌 같은 것에 대해 운운하고 있는 지해의 목소리는 조금 멀리에서 들린다.

 왜?

 지민 안의 이유는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사소한 불안에 불과했다. 그것에 먹혀든 지민이 어리석을 정도로 작은 불안이었다. 그것을 입 밖에 내버리지 않았다면 지금 지해가 저렇게 기율의 가상 프로필을ㅡ어떤 부분은, 지민보다 더 자세히 기억하는 것 같다ㅡ읊으며 요란을 떨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었다면 또 다른 이야기를 주제로 요란을 떨고 있었겠지.
 기율이 얼마나 좋은 남자친구였는지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지해가 떠들지 않더라도 잘 알고 있다. 그 좋은 남자친구에게 결별을 선언한 것은 지민이었고, 이별을 견디는 데 익숙한 것은 지민의 몇 안 되는 자랑거리였다. 크고 작은 이별들에 상처입으면서 지민의 속은 갈수록 견고해졌고, 갈수록 마실 수 있는 술이 늘었고, 갈수록 외로워졌지만, 연애에 열중하던 순간순간 지민이 시달렸던 크고 작은 긴장과 두근거림과, 불안에서만큼은 잠시 해방될 수 있었다.

 그래서 지민은 이별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 이유가, 사소하고 멍청한 것일 뿐이었다.

 "게이다."
 
 팡, 하고 지해가 박수를 쳤다.

 "게이인거지? 게이였던거지?"
 "아니야."

 본 적도 없는 사람에게 실례는 충분히 저지른 것 같다. 그의 비교적 일반적인 연애관을 지켜주면서, 지민은 그럼? 하는 표정으로 보고 있는 지해를 보았다. 왠지 한숨이 나와서, 지민은 내려놓았던 잔을 들어 입 안에 털어넣었다.

 "내가 차였어."

 기율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이유를 말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두 사람은 1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케이크를 사서 나누어먹고, 촛불을 끄고, 장난처럼 교제를 약속했던 그 때처럼 입맞춤을 나누고 돌아갔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되고 말았다.

 이별을 말한 것은 지민이었지만, 이유를 묻지 않은 것은 기율이었다.
 그 순간의 기율은 분명 평소의 미소와는 조금 다른 표정을 지었지만, 그 얼굴 뒤의 것을 읽을 수 있을만큼 눈이 좋지는 못했다. 지민이 그와 보낸 1년이 기율이 그녀와 보낸 1년과 같은 무게가 아니라면, 어차피 두 사람은 헤어져야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 날이 조금 빨리 온 것 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민은 입 안에 물고 있던 이유를 말하지 못했다. 그러자 그렇게 소중하고 무거웠던 불안과 두근거림이, 긴장과 피로들이, 하잘것없이 가볍고 무의미한 것처럼 느껴졌다.

 "엉?"
 "차였다니까."
 "진짜? 거짓말이지?"
 "정말이야."

 그러니까 그 말은 절반쯤 진짜였다.

 "말도 안 돼! 왜?"
 "글쎄……,"

 그런 와중에도 지해는 술잔을 채우는 데 열심이었다. 하지만 술을 따르는 척,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잠시 조용해진 지해의 정수리에서 시선을 떼고, 지민은 그녀의 발끝을 내려다봤다. 한 해와 네 계절이 지나가는 사이, 엄지발톱에 꾹꾹 채워 발랐던 연두색의 페디큐어가 절반쯤 밀려있었다. 내일은 이걸 덧발라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지민은 느릿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덕분에 목소리가 갈라지지는 않았다. ……나는 별로 좋은 여자친구가 아니었거든.

 지해가 술병을 내려놓고 지민을 꾹 끌어안았다. 체온이 높고 축축한 손이 멋대로 지민의 머리를 끌어다 가슴 위에 짓누른다. 괜찮아 괜찮아, 밀이는 이제 더 좋은 남자 만날거야. 그치? 지민은 매번 더 좋은 남자라는 단어의 정의를 알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지해의 서툰 위로는 언제나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언제나, 도움이 되었다.
 지민은 지해의 어깨 너머로 그녀의 방을 본다. 낯선 가구들과 익숙한 가구들이 뒤섞인 방은 원래부터 2인실이었던 것처럼 눈 앞에 들어차있었다. 가희가 가져온 입식 의자와 지민이 쓰는 좌상, 그리고 익숙한 현관을 차례로 눈에 담는다. 알려줬던 비밀번호 대신 매번 성실히도 도어벨을 두 번 누르는 남자가 그 너머에 서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지민은 눈을 감았다. 지해의 작은 손이 연신 어깨를 토닥이고 있어서, 취한 척 잠들 수도 없었다. 벨소리가 들릴 일은 없었다.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지민은 이별을 견디는 데에 익숙했다. 그것은 지민이 가진 몇 안 되는 특기였다.
 그래서 이 실연이 오랫동안 아프리란 것도 알 수 있었다. 이별을 말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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