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왔어, 언니?”
지민이 그녀의 방에 돌아왔을 때, 방에는 램프가 켜져 있었다. 웬 소녀가 싱크대 앞에 서 있었다. 가희였다.
하얀 얼굴이 잠시 지민을 돌아봤다가, 안심한 듯 다시 설거지를 시작한다. 아무래도 식사를 혼자 한 모양이다. 한 박자 늦게 도어락이 잠기는 전자음이 울리는 동안에도, 지민은 멀거니 가희의 어깨를 덮은 수건과 그 위에 늘어진 검고 긴 머리카락 따위를 보며 서 있었다. 이 방을 가희와 같이 쓰게 된 것은 몇 달 전부터건만, 이따금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저녁만 먹고 온다더니?”
“아, 응.”
하지만 그 룸메이트 덕분에, 낯선 상념에서도 쉽게 깨어난다. 지민은 신고 있던 롱부츠를 벗고 집 안에 들어섰다. 따끈한 실내로 들어오자 얼어있던 발끝이 조금 녹는 듯했다. 가희가 보일러를 틀어둔 모양이어서, 방 안은 환하고 따뜻했다. 지민은 허물처럼 코트를 벗어놓고 침대에 기어올라갔다. 전기담요에 스위치를 넣고 그대로 엎드리자, 피로가 스멀스멀 기어나와 지민을 덮쳤다. 그 무게에 깔려 죽어버릴 것 같았다.
“왜 이렇게 늦었어? 빨리 온다며.”
가희가 말을 걸었다.
“……그러게.”
지민은 엉망으로 대답하며 눈을 감았다. 저녁을 먹은 것까지는 좋았다. 샐러드는 상큼했고 거기에 곁들인 연어 스테이크도 입에 맞았다……아니, 스테이크가 메인 요리였지. 입 안에 남은 연어의 식감이나 레스토랑에서 들었던 익숙한 노래 따위를 떠올려보다가, 떠올려보려고 애쓰다가, 지민은 가희의 기척이 다가온 것을 느끼고 다시 눈을 떴다. 까만 눈 한 쌍이 가만히 지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민은 뒤늦게 조금 미안해졌다.
“버스를 잘못 탔어.”
“버스를?”
“응. 미안해.”
사과하자, 가희가 조금 떨어지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언니가 미안할 건 아니지.”
그 말은 맞지만, 늦은 밤까지 빈 집에 여고생을 혼자 두는 것도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니었다. 게다가,
“기다렸잖아?”
“…….”
당황한 듯한 가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무어라 느낌표가 붙은 말들을 어물거리더니 뻣뻣하게 걸음을 옮긴다. 기다리는 줄 알고 있으면 일찍 일찍 들어와, 같은 말이 들려왔다. 귀여워라. 지민은 네네, 하고 웃으면서 천장을 올려다봤다. 램프의 불빛 때문에 야광별이 잘 보이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램프의 불빛 때문이었을 거다.
지민은 다시 눈을 감는다. 머지않아 가느다랗게 물소리가 들려왔다. 가희가 다시 설거지를 하기 시작한 것 같다.
아마,
라라라 라라라라 난 너를……하는, 뭐 그런 노래 같았는데.
사실 지민은, 가희가 버스를 잘못 탄 이유를 물어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저, 가희가 방을 데워두고 불을 밝혀둬서, 설거지를 하고 있어서, 지금 혼자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슬슬 다른 생각을 해야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으니까, 뭐든지, 뭐라도, 계속. 그래서 기억나지 않던 노래의 제목을 더듬던 중이었다. 물소리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순간, 이번에는 시계의 째깍거리는 소리가 귀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지민은 애써 부엌의 물소리 쪽에 정신을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자꾸 손끝이 시려오고 발목이 차가워지고, 그 노래를 알아듣고 반가웠던 기억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만이 끊임없이 끊임없이 지민의 고막을 긁었다.
째깍,
째깍,
‘왜 이렇게 손이 차?’
손등에 스친 그의 손끝이 굉장히 차가워서, 저도 모르게 손을 잡아끌었다. 차가운 감촉의 손가락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녹이다가, 자신의 손끝이 녹고 있는 것을 깨닫기도 전에 손목을 잡혔다. 아이구, 네 손이 더 차가운데요? 상냥한 웃음과 함께, 기율은 지민이 했던 것처럼 그녀의 손가락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번갈아가며 녹여주었다.
째깍,
사실, 몇 초 정도, 헤어진 사이라는 걸 잊어버릴 뻔했다.
‘아, 이 노래 아는 노랜데.’
‘……그래?’
지민은 평소처럼 떠들었다. 이번에 고3이 되는 선영이와 이제 고등학생이 된 지원이의 이름을 뒤바꿔 말했던 것 같지만 기율은 그녀의 실수를 모른 척 해줬거나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기율이 무언가 빨간 성게나 OMR 카드나 떡볶이 같은 것을 운운했던 기억이 났지만 어느 게 그가 들어가게 된 밴드의 이름이고 밴드의 간식인지까지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
째깍, 째깍,
노래의 첫 소절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것은, 애초부터 그런 것을 귀기울여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손이야 누구랑 잡고 있어도 상처가 되지 않았지만, 기율의 미소가 한결같이 따뜻한 것은, 그의 손이 예전처럼 상냥한 것은 조금 슬펐다. 연인이었던 시절과 그렇지 않게 된 오늘의 기율이 변함없는 것은, 한 번도 지민과 연인인 적이 없었다는 뜻일지도 몰랐으니까. 그래서 지민도 그 때와 다르지 않게 웃고 떠들고 음식을 먹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너를, 아무리 생각해도 난 너를,
잊은 듯 눈감아도 난 너를, 아닌 듯 돌아서도 난 너를…….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저,
째깍,
그저, 연어의 식감이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였던 게 아닐까 생각할 뿐이다.
“언니, 언니.”
“―아, 설거지 다 했어?”
“응.”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눈을 뜨자 야광별 대신 미간을 조금 좁힌 가희가 시야에 가득 찼다. 그것만으로 초침소리가 잊혀져 거짓말처럼 들리지 않게 되어버렸다. 왜 그래? 하고 묻자 가희의 입술이 뭔가 달싹이려다가 새침하게 다물렸다.
“아니야.”
아니라면서, 연신 벽 쪽을 힐끔거린다. 그 시선을 따라가보니 커다란 바늘의 벽시계가 쉼없이 째깍거리고 있다. 눈대중으로 시간을 읽으면 지금은 11시 59분, 20초, 21초, 22초. 가희가 다시 맞은편의 침대에 걸터앉는다.
“저녁은 맛있었어?”
“응.”
지민은 얼핏 오늘의 저녁식사를 돌이켜본다. 어디에서 누굴 만나 무얼 먹었고 같은 것을 잊어버릴 만큼 기억력이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참 맛있었습니다 밖에 할 말이 없었다. 그의 생일보다 하루 늦고 자신의 생일보다 하루 이른 생일 케이크가 아주 달았고 조금 짠 맛이 났다는 것밖에는,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혓바닥에 남은 것은 그것뿐이었다.
“가희 혼자 먹게 해서 삐친 건 아니지?”
“괜찮아. 방학 아닐 땐 언니 혼자 먹잖아.”
“하긴, 그럼 됐고.”
“그건 그런데, 언니…….”
그 순간,
지민의 핸드폰이 무섭게 진동했다. 아마도 누군가가 시간을 지정해 예약해둔 문자메시지거나, 제일 먼저 축하인사를 하려는 누군가의 전화일 것이었기에 슬라이드를 열었다. 어, 챙겨줘서 고마워. 너도 오늘 하루 잘 보내. 의례적인 통화를 하는 동안, 몇 차례 밀려오는 진동음에 지민은 몇 번인가 미간을 좁혔다. 그 사이 타이밍을 놓친 가희가 허둥지둥 베개 밑에서 포장된 선물을 꺼내들고 있었다. 그래, 이만 끊을게. 응.
“뭐 말하려고 했어?”
“……아니, 노래를 부르길래.”
그 순간에, 지민의 스물이 끝났다.
가희는 자정에 맞춰 선물을 건넬 생각으로 계속 시계를 힐끔거렸던 모양이었다. 그것이 기껍게 느껴졌기에 지민은 웃으면서 선물을 받아들었다.
“지나버렸네, 자정…….”
“내년엔 가희가 제일 먼저 주면 되지.”
째깍거리던 시계에 잠시 시선을 둔다. 열심히 노려보면 바늘이 막 12시 1분을 막 지나고 있다. 사실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도 같다. 포장을 뜯기 전에 지민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웃었다.
“그런데, 내가 노래를 불렀어?”
왠지 그 순간에는, 외로움에 어깨를 감쌀 필요가 없었다.
사족1. 손을 번갈아 감싸쥐고 녹여주는 건 귤이 방법을 무심결에 따라하고 있던 것 같음... 남한테는 하지 않음.
사족3. 나중에 저 바늘 크고 심란할 때만 시끄러워지는 벽시계는 플립시계로 교체된다고 함.
사족4. 귤밀인데 귤이가 안 나와서 죄송... 열심히 웨말 얘길 해줬을 텐데 귀가 먹어서 죄송...
사족6. 아.. 몰라... 다 상관없어../냥미
+
그래도 생일 내용이니 좀 수정해서 4일로 당겨보고......
겸사겸사 노래의 제일 좋아하는 부분을 적어봄v///v
Everybody says that times heals everything.
But what of the wretched hollow? The endless-in between?
Are we just going to wait it out?
Sit here, just going to wait it out?
Sit here, cold, just going to sweat it out?
+
원고내용을 좀 수정해서 붙여둠. (2011/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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