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날 혼자 밖에 내보내는 일에는 아직 관심이 없는 것 같았지만, 우리가 사는 아파트 건물은 안 씻은 쌀 같은 색깔이고 멀리서도 찾기 쉽다고 했다. 하늘 위에 보이는 쌀색 아파트는 내가 기억하던 것보다 훨씬 작아서 아, 멀어보인다 딴 생각을 너무 오래 했나 역시 난 걸음이 빠른 것 같아 하지만 길을 잃은 건 아니지, 하고 부지런히 걸었을 뿐인데……왔던 길이랑 비슷한 구석이 너무 없지 않나 생각하고 멈춰섰을 땐 이미 아파트 안의 놀이터였다. 우리 집 앞에 있는 것과 비슷하게 생긴 놀이터였지만, 처음 보는 애기들이 술래잡기를 하며 놀고 있었다. 그러니까,
엄마는 같은 쌀색 아파트에도 1단지와 2단지가 있다는 걸 가르쳐주지 않았던 거다.
일단 우리 집을 닮은 아파트단지를 빠져나오기로 한다. 나오는 길에 다시 한 번 턱을 들고 열심히 주변을 둘러봐도, 우리 아파트와 똑같은 쌀색이다. 그리고 다른 쌀색 아파트는 보이지 않는다. 아직도 이 안으로 들어가면 202동이 있어야할 것 같은데, 입구에 있는 안내도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1로 시작하는 아파트들 뿐이었다. 그리고 이런 안내도는 단지 안을 안내하는 걸로도 충분히 벅차서, 2단지의 202동 2202호로 가는 길 같은 건 나와있지 않았다.
……미아가 되어버리다니, 그것도 이런 초보적인 실수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무도 내게 길을 잃었을 때 이렇게 저렇게 하면 된다는 이야기를 해준 적이…….
"……아."
아들, 나무를 잘 보면 산 속에서도 방향을 쉽게 찾을 수 있는거야. 이끼가 많이 껴있는 쪽이 남쪽이거든. 이끼들을 따라가면……. 저기요, 바다의 왕자 씨? 바다에서 찾는 걸 가르쳐놔야지. 바다엔 나무가 없잖아. 그야, 바다에는 등대가 있잖아. 등대……그거 그냥 불빛 아냐? 태평양 건널 땐 본 적도 없고. 뭐, 그 땐 GPS가 있었으니까……. 그게 망가지면 어떻게 하는데? 그게 그렇게 쉽게 망가지는 게 아니에요. 그래도 망가지면? 글쎄, 나침반이라던가, 북극성이나……. ……. 그래도 안 망가졌잖아. 그 때 재밌었지? 응. 응. 애기는 걸음마 연습하다가 파도 칠 때마다 넘어지고 엎어지고…….
"……."
이건 별로 도움이 안된다. 여긴 산도 아니고 바다도 아니니까.
……엄마나 아빠가 나쁜 건 아니다.
나는 매일 집에만 있는데, 정말로 길을 잃을 '일' 같은 게 일어날 리 없잖아.
"한아름마트, 코아문구, 부동산뱅크……김밥나라."
참푸른슈퍼, 아침문구, 하나부동산 쪽이 우리 동네에 있는 가게들이다. 김밥집 이름은 김밥천국.
다른 이름의 가게들과, 다른 얼굴의 사람들과, 같은 색이긴 하지만 숫자 하나씩이 다른 아파트. 카페라는 건 엄마가 다니는 곳 한 군데일 줄 알았는데 지나오면서 벌써 두 군데나 다른 이름의 카페를 봤다. 누가 나를 완전히 다른 곳에 뚝 떨어뜨린 것 같다. 분명히 내 발로 걸어서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가는 길을 모르겠다는 건 조금 이상하다.
갑자기, 세상이 너무 커보인다.
집들도 가게들도 차들도 사람들도, 높다랗고 커다랗고, 많다.
엄마라면 잠깐 짜증을 내다가 진작 핸드폰을 꺼내서 아빠에게 전화를 했을 것 같다. 아빠는 온 동네의 길을 구석구석 다 알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아마 어떻게 집에 가는지도 알고 있을 거다. 아빠가 전화를 안 받으면 엄마는 전화기에 대고 Give me a call~ baby baby~ 하고 흥얼흥얼 노래를 부를 것이다. 베이비는 아빠가 아니라 내 쪽인 것 같은데…….
하지만 나는 핸드폰도 없고, 운전을 오래 했다는 아빠와는 달리 동네 심부름 경험도 한 번인 뉴비ㅡ글쎄, 요즘 뉴비들은 길드 믿고 너무 설쳐대서 문제라니까. ……나리 이모, 뉴비가 뭐에요? 음? 뉴비는……뭔가 처음 하는 사람을 뉴비라 그래요. n e w b i e. 스키장에도 초보자용 코스가 있고 상급자용 코스가 있듯이……그리고 길드라는 건ㅡ였다.
ㅡ뉴비는 늅늅하고 울기나 할 것이지. 어휴.
나리 이모와 아빠가 나누는 이야기는 보통 알아듣기 어렵지만, 그 말을 할 때의 이모의 표정은 기억났다. 연우가 나루 형을 볼 때 짓는 표정이랑 닮았었다. ……새삼 뉴비라는 걸 인정하고 나서 나루 형을 떠올리자 조금 부끄러워진다.
계속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더니 손이 슬슬 시려왔다. 다른 손으로 옮겨쥐고 파카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어 본다. 주머니 속도 차갑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마 두부도 빠르게 식고 있을 것 같다. 비닐봉지를 손목에 걸고 양 손을 꾹 주머니 속에 넣었다. 진작 이렇게 할 걸 잘못했다. 엄마 손은 꼭꼭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 같은데도 매번 차갑던데…….
엄마.
찻길 위에는 커다란 차와 버스들이 빵빵거리며 달리고 있었다. 어느 방향인가로 걸어가다보면 다시 집으로 갈 수 있을텐데, 그 방향을 모르겠다. 세 번째로 만난 카페의 유리창 너머를 들여다봤지만 엄마는 없다. 분명히 다른 가게인데도 엄마가 창가 자리에 노트북을 펼쳐놓고 '일'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김이 모락모락나는 커피에 손을 녹이면서.
……엄마는,
엄마는 아직 자고 있을 거다.
"집 전화번호 아니?"
순경 아저씨가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으면서 물었다. 알고는 있지만……엄마가 아직 주무시고 계실 것 같은데요. 시계를 보자 집을 나오고 한 시간 반 쯤 지났다. 한 시간이면 60분이다. 60분이 넘도록 길을 헤매고 있었다는 게 놀랍긴 했지만, 길만 가르쳐주면 혼자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순경 아저씨는 날 데리고 경찰서까지 와버린 거다.
"거참 꼬마애가. 몇 살이야?"
커피를 받아들면서 형사 아저씨가 혀를 찼다.
"2월이면 다섯 살이에요. 그리고 이름은 주 윤인데요."
"허허, 그래 주 윤 어린이."
다섯 잔 째의 커피를 뽑아서 입에 가져가던 순경 아저씨가 뭣, 하고 놀란 소리를 냈다. 아마 다섯 잔째 커피는 아저씨 몫이었던 모양이다. 아저씨가 쓰고 있던 안경에 하얗게 김이 끼었다가 다시 눈이 보였다. 올려다보자 길에서 만나 처음 말을 걸었을 때의 표정을 다시 짓고 있다. 뭐라더라, 책에서 읽었던 것 같은데. '어안이 벙벙'하다고 하던가?
"너 네 살이니?"
"네? 네."
"진짜 네 살?"
"가짜로 네 살일 수는 없잖아요."
응. 어안이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어안이 벙벙해보이는 표정.
"……길 잃고서 '실례합니다. 제가 길을 잃어버린 것 같거든요.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 같은 걸 하는 네 살 짜리는 순경하면서 네가 처음이다. 좀 작아도 여섯 살은 된 줄 알았지."
처음 만났을 땐 순경하면서 너같이 깍듯한 미아는 또 처음 봤다고 하시더니.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거라고 나리 이모가 그랬지만, 어린 나이라는 건 꽤 어른들을 놀라게 하는 모양이다. 사실 그렇게 말했던 나리 이모도 세 살이 이렇게 말을 잘해? 하고 놀랐던 적이 있었고. 내 몸집은 다른 네 살짜리 애기들과 비슷비슷하니까 문제될 것도 없다. 게다가,
"후년이면 여섯 살인걸요. 네 살이나 여섯 살이나 다를 건 없을 것 같은데요."
이건 진심이었는데 순경 아저씨가 그러니, 하고는 그냥 하하 웃었다. 길을 안 가르쳐주고 경찰서로 데려와버린 건 마음에 안 들지만,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나쁜 사람을 잡는 게 경찰의 '일'이니까 당연한 건가 싶지만,
"그리고 전 율무차로 부탁드려요, 아저씨."
그래서 나도 그냥 생긋 웃기로 했다.
좀 짧지만 지난 편이 길었던 것 뿐이죠 네.... 더 쓰면 마지막 장이 너무 짧아질 것 같아서 끊고.
뒤는 라스트이자 클라이막스이자, 뭐... 그런 것일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