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잇-삣.
현관에 도어-락이 붙어있어서 참 다행이다. 아무도 내 몫의 집열쇠를 만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문을 잠글 수가 없는 것이다. 엄마를 도둑맞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문이 제대로 잠겼나 한 번 열어본다. 물론 정말 문을 열어볼 수 있었던 건 아니라서 손잡이를 돌려보는 정도에서 그만두고 엘리베이터를 탄다. 버튼 앞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발디딤판이 있지만 1층으로 내려가는 길이니까 굳이 디디고 설 필요가 없다. 돌아오는 길에는 아마 도움을 받아야겠지만…….
……그러고보니까, 혼자 집 밖에 나와보는 건 처음이다.
딩동, 1층입니다.
엄마처럼 양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고 아파트를 빠져나왔다. 주머니 속에 든 종이돈이 까끌거렸다.
[SYSTEM] 애기귤(이)/가 마이홈을 빠져나왔다! '가출소년' 타이틀을 획득했다!
[SYSTEM] 애기귤(은)/는 튜토리얼 필드 - 아파트단지(으)로 이동했다!
"어, 주윤이다."
"윤아. 소꿉놀이 안 할래애? 아빠 시켜줄게에."
집 앞에는 놀이터가 있다. 엄마는 이런 게 집 앞에 있어서 쓸데없이 집값만 비싸다고 했지만, 쓸데없는 것 치고는 슈퍼랑 카페 다음으로 자주 오는 곳이다. 가끔 아빠가 나를 끌고나와 그네를 밀어주거나 시소를 타거나ㅡ마음은 알겠지만, 그냥 날 괴롭히고 싶은 것 같다ㅡ하기도 하고, 가끔 엄마가 나를 놀고 있는 애기들 사이에 멋대로 끼워놓고 신나하기도ㅡ엄마는 마음 속으로도 그냥 날 괴롭히고 싶어하는 게 분명했다ㅡ한다. 지금은 그 애기들과 잘못 마주쳐버린 거다.
"심부름 가는 중이라서."
미안. 하고 웃어보이자 소꿉놀이를 하면 늘 엄마를 맡는 애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심부르음?"
"응. 심부름."
"윤이는 벌써 심부름도 갈 줄 알아? 심부름은 오빠야들만 하는 거랬는데에. 대단하다야."
그 오빠들보다 내가 똑똑하니까 괜찮아. 하지만 이런 생각은 속으로만 하기로 하고ㅡ엄마가 그랬다. 아는 게 많을수록 겸손해져야 하는 거라고ㅡ나는 다시 인사를 했다. 그럼 다음에 봐. 으응. 다음에 같이 놀자. 소꿉놀이 아니면 얼음땡이나아, 탈출! 탈출하자아. 응, 그래. 애기들의 배웅을 받으며 놀이터를 등진다.
하지만 차라리 소꿉놀이 쪽이 낫다고 생각한다. 가끔 나리 이모가 오면 꼭 연우랑 소꿉놀이를 하게 되는데, 연우는 이모가 사라지면 풀썩 쓰러져서, 나 지금 너무 졸린데, 밥은 알아서 먹고 가면 안 돼……? 미안해……. 하고 조용히 잠을 자는 것이다. ……아무래도 나리 이모 때문인 것 같지만, 그러면 나도 맘편히 응, 알았어. 하고 읽던 책을 읽을 수 있다.
그래. 빨리 다녀와서 읽던 책이나 마저 읽어야지.
[SYSTEM] 애기귤(은)/는 놀이터 애기A(와)/과 놀이터 애기B(와)/과 마주쳤다!
[SYSTEM] 애기귤은 회피를 시도했다……회피에 성공했다!
[SYSTEM] 애기귤의 대화술이 2포인트 상승했다!
[SYSTEM] 애기귤의 기력이 4포인트 상승했다! 이동속도가 조금 빨라졌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응? 이게 누구야?"
입에 밴 것처럼 인사를 하던 슈퍼 아줌마가 나를 보자마자 깜짝 놀란다. 문은 열렸는데 사람이 들어오는 건 보지 못했어서 놀란 것 같기도 하고, 손님이 너무 작아서 놀란 것 같기도 하다. 어느 쪽이든 나는 손님이니까 어리다고 얕보이진 않았으면 좋겠다. 생글생글 웃자 아줌마가 내 얼굴이 기억났는지 아니면 내가 귀여워보였는지 빙그레 웃는다.
"엄마가 심부름 보냈어?"
"네,"
거짓말이지만,
"두부 한 모만 주세요."
"어린 애가 벌써부터, 착하네."
그럼요. 엄마도 내가 사온 두부를 받으면 분명히 어머나 이 두부를 우리 애기가 사왔다구? 우리 애기 다 컸네, 엄마가 그것도 모르고……역시 우리 애기가 우주에서 제일 착하고 똑똑하다니까. 고마워 우리 애기. 하고 신나할 게 분명하다. 별로 어려운 일을 해낸 건 아니지만, 조금 우쭐해진다. 겸사겸사 애기라고 부르는 것도 그만하면 좋을텐데…….
"800원짜리랑 1100원짜리 중에 어느 거?"
응? 이건 새로운 문제다.
"1100원짜리는 800원짜리보다 더 좋은 거에요?"
"800원짜리는 기계두부고 1100원짜리는 손두부지. 손두부가 더 맛있는 거야."
엄마가 나물을 무칠 때마다 하도 손맛이 중요하다고 해서, 나는 손맛이란 말이 음식에 들어가면 왠지 다 좋은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들어둔 대로라면 엄마는 800원짜리 두부를 사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나한테는 지금 천 원짜리 두 장……그러니까 2000원이 있다. 혹시 몰라서 한 장 더 가져오길 잘한걸까. 내 돈이라면 좋겠지만, 음…….
"손두부는 얼마나 더 맛있는데요?"
"응?"
두부를 담을 비닐봉지를 뜯던 아줌마가 허허 웃었다.
"그야 300원만큼이지."
"아……."
아, 진작 뺄셈을 해볼걸.
"……천 원밖에 안 가져왔는데, 손두부로 주시면 안 돼요?"
[SYSTEM] 애기귤(은)/는 슈퍼 아줌마(을)/를 만났다!
[SYSTEM] 애기귤(은)/는 전투를 시작했다!……슈퍼 아줌마의 공격! 애기귤(은)/는 슈퍼 아줌마의 공격을 피했다! 애기귤의 공격! 이 때 슈퍼 아줌마의 함정카드 <손두부의 유혹> 발동! 애기귤(은)/는 반격을 시도했다! 필살기 <미라클 애교작렬> 발동! 크리티컬 하트 히트! 슈퍼 아줌마(은)/는 전투의욕을 잃었다!……애기귤(은)/는 전투에서 승리했다!
[SYSTEM] 애기귤(은)/는 경험치를 147포인트 얻었다! 아이템 <비닐봉지에 담긴 두부(1100)>를 얻었다!
[SYSTEM] 애기귤의 지력이 5포인트 상승했다!
[SYSTEM] 애기귤의 대화술이 5포인트 상승했다!
[SYSTEM] 애기귤의 레벨이 1 올랐다! 매력이 10포인트 상승했다!
아, 뿌듯한 하루였다.
아직 하루가 다 끝나진 않았지만 왠지 그런 기분이다. 엄마가 정말 천 원짜리를 한 장 주고 심부름을 시켰다고 치면 200원은 내가 가지는 돈이니까, 그걸 더 맛있는 두부를 위해 쓰는 건 나쁘지 않은 생각 같았다. 걸음이 붕붕 뜨는 것 같다. 몇 걸음 걷다가 비닐봉지에 든 두부를 슬쩍 열어본다. 슈퍼 아줌마께는 죄송하지만, 1100원짜리 손두부에서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다. 응. 이만하면 뿌듯한 하루라고 말해도 될 것 같다.
이제 집에 돌아가서, 남은 천 원은 화장대 위에 두부는 식탁 위에 올려놓고 책을 읽다가, 세 시간이 지나면 모른 척 엄마를 깨워야지. 아니, 내가 두부는 사 가니까 엄마는 다시 슈퍼에 안 와도 된다. 그러면 세 시간 반 뒤에 깨워도 괜찮을 것 같다. 30분을 더 자고 일어난 엄마는……. 아, 엄마의 된장찌개도 조금 더ㅡ300원만큼ㅡ맛있어질 거다.
붕, 붕,
비닐봉지를 그네처럼 흔들면서 걷다가, 두부가 깨질 것 같아서 그만둔다.
그렇지만 기분이 좋은 것까지 그만둘 수는 없다. 연우와 한 시간 넘게 소꿉놀이를 하고 놀라고 해도 지금은 재미있을 것 같다. 연우는 또 미안한데 너무 졸려서……하고 바닥에 엎드릴지도 모르지만, 그럼 또 나는 책을 읽으면 된다.
나리 이모가 연우에게 어떤 엄마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엄마는 식사 준비를 빼먹거나 미루고 계속 자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 때까지 안 자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같지만, 그 부분도 엄마의 일 중에 하나인 것이다. 다같이 아침을 먹은 다음, 아빠를 출근시키고, 설거지까지 하고 나서, 그러고 나야 엄마는 잠을 자거나 다시 일을 하거나 한다. 잠결에 설거지를 두 번 하거나 하긴 해도, 내가 알려주면 금방 그만두고 침대로 돌아가니까 그 정도면 괜찮은 엄마가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다른 엄마들이 어떻게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보통 엄마라면 열심히 화장을 하고 옷을 차려입은 다음 놀이방 같은 곳에 날 맡기고 일을 하러 나가는걸까.
그런 건 조금 싫을 것 같다.
아니, 싫다. 그럼 놀이방에서 놀이방 애기들과 소꿉놀이나 하면서 엄마가 오기만 기다리고 있겠지…….
……잠깐만,
[SYSTEM] 애기귤(은)/는 튜토리얼 필드를 벗어났다!
[INFO] 미니맵이 지원되지 않는 곳입니다. 경험치가 20% 증가합니다.
여기가, 어디지.
[SYSTEM] 애기귤(은)/는 '길을 잃은' 타이틀을 획득했다!
네 뒤로 갈수록 맥이 빠지는 건 제 아이덴티티인 거 같네연 병시나 까지 말고 고쳨ㅋㅋㅋㅋㅋ
무튼 이어지는 것 같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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