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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의 애매한 서화

현실의 연애




 아.

 유독 피곤한 날이었다. 지민은 하루를 욕조에서 마감하기 위해 옷을 벗다가, 웬지 모를 위화감을 느끼고 거울 앞에 섰다. 눈과 귀는 한 쌍에 코와 입은 하나씩, 그 이목구비로 굉장히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가 그 안에서 지민을 바라보고 있다. 앙상한 어깨는 늘 그랬듯이 볼품없었지만, 평소와 크게 달라진 것은 없는 것 같았다. 지민은 거울 안의 여자를 한참 뜯어보다가, 그녀가 거울 앞의 칫솔 한 쌍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나는 지민이 어릴 때부터 써온 연두색이었고, 나머지 하나는……혼자 사는 집에서 뭐하러 칫솔을 두 개씩 꽃아 놓은거지? 지민은 이유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당황했다. 하지만 주인모를 칫솔은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었다. 오래 전부터, 아주 당연한 것처럼, 그 자리에 줄곧 꽃혀있었다. 지민은 눈을 가늘게 뜨고 칫솔을 내려다본다. 세월에 조금 바래있었지만, 무슨 색인지는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노을과, 오렌지와, 가로등 특유의 시린 불빛을 떠올리게 하는 색.

 ……그리고, 그것들과 동시에 떠오르는 사람.
 지민은 칫솔의 주인을 기억해낸다.

 위화감을 느낀 것은 거울 속의 여자였을텐데, 지민은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도 아무 표정도 없는 그녀를 보고 조금 놀랐다. 결코 무덤덤한 기억을 떠올린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민은 울고 싶었다. 떠올린 기억이 아팠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자는 아무런 감흥이 없어보였다. 얼핏 웃고있는 것도 같았다. 항의하듯이 노려보아도, 여자는 아무 말 없이 지민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눈가가 얼핏 젖어드는 것도 같았는데, ……그 뒤로는 여자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지민이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기 때문이다. 욕실의 얼음장같은 타일에 등을 기대자, 숨이 막힐 듯한 오한이 스며들었다.


 기율과는,
 오늘같이 피곤한 겨울밤에 헤어졌었다.

 바람빠지는 듯한 소리를 뱉으며, 지민은 어렵게 숨을 들이마셨다.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도록 추웠는데, 어쩐지 필요한만큼 숨을 들이마시지 못하는 것 같았다. 눈을 감자, 지민이 가장 싫어하는 어둠과 가장 무서워하는 침묵과, 가장 견디지 못하는 추위가 한꺼번에 찾아왔다. 몇 번이고 숨을 헐떡거리면서, 지민은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기분을 받는다.

 그래, 바다에 갔었는데…….

 지민은 그 해 여름 이후로 바다에 가 본 일이 없었다. 스물의 지민에게 흘러넘쳤던 모든 행운과 모든 행복들이 조각조각 부서지고 빛무리가 되어 폐부를 찔러왔다. 옛 일을 떠올렸을 뿐인데 숨이 막힌다는 건 이상한 일이지만,
 아무래도 왜 거울 속의 여자가 울지 않았는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예전부터 지민은 이런 고통에 대비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선물을 받으면 잃어버리는 것을 상상하고, 행복이 찾아오면 그 행복이 끝나는 순간을 상상해가면서……그래서 단 한 번도 선물을 잃어버린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 선물들은 이미 소중한 물건이 아니게 되었다. 그런 것을 몇 번이나 반복하면서도 지민은 아무것도 끝내지 못했다. 아무것도 슬퍼하지 못했고, 아무것도 기뻐하지 못했다. 소중해야했을 것들은 잡동사니가 되거나 지민을 떠난 지 오래였다.
 간신히 다시 욕실 문을 열었을 때, 지민은 이미 녹초가 되어있었다. 허물처럼 벗어놓은 코트 속을 더듬어서, 딱딱한 핸드폰을 움켜쥔다. 당장 떠오르는 단축번호를 길게 눌렀다. 긴 침묵이 흐르다가, 신호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지민아?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율아.
 있잖아,
 바다에 갔었던 거, 기억나?
 ……바다에, 그 때…….

 갈라진 목소리를 다듬던 중에, 짜낸 듯한 눈물이 한 줄기 흘렀다.

 ……율아,
 나…….
 거울을 봤는데, 내가…….

 말이 잘 되지 않는다. 한 번 눈물이 떨어지자 뒤이어 미지근한 것들이 뺨을 훑고 뚝뚝 떨어졌다. ……그러니까, 거울을 봤는데, ……아니, 칫솔이……네가, 나는……. 지민은 말을 고르지도 맺지도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역시나 그런 매끄러운 표정으로 슬퍼할 수 있는 건 이 남자 뿐이었다고 생각하면서, 역시나ㅡ이 남자와 헤어지는 것은ㅡ아프고ㅡ괴롭기 그지없는, 그런 일이었구나 생각하면서, 역시나, 우린 두 번 다시 같이 여행을 가지 못했구나 생각하면서…….

 ……미안해, 응? 미안……갑자기 전화해서…….
 자는 데 깨운 건 아니지? 미안해, ……율아, 나는…….

 이번에야말로 무슨 기억이나 생각 때문이 아니라, 눈에 차는 물 때문에 숨을 못 쉬겠다고 생각할 즈음에,

 지민아.

 응?

 어디야?

 잠자코 듣고 있던 그가 물어왔다.

 여기?

 지민은 주변을 둘러봤다. 해가 내린지 오래라, 욕실에서 새어나오는 귤색 조명을 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마저도 눈 앞이 흐려서 제대로 분간할 수 없었다. 쥐고있는 핸드폰만이 긴 통화로 인해 미지근히 열을 뿜고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지민은, 그 곳이 수화기 너머의 기율과 같은 시공에 있는지도 자신이 없었다.

 몰라……. 여기가 어디지?





내가_알면_이러고_있을까.png
그림으론 무리길래 글로 써봤고. ... ... .... 고록스멜 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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