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율의 집에 대해 지민이 아는 것은 연두색 칫솔 하나를 맡겨둔 투룸 오피스텔 뿐이었다. 그래서 그 좁지 않은 방이 한 다스 쯤 들어가고도 남을 듯이 커다란 집 앞에 섰을 때 지민이 느낀 것은, 아직도 기율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 뿐이었다. ……이런 데 사는 건 무슨 재벌그룹 사장이나 국회의원이나, 그런 사람들 뿐인 줄 알았는데. 집 크기랑은 상관없는 것 같지만……얘기 안 했었나? 하고 문패를 가리키는데 지민도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이 새겨져있었다.
……정말?
그럼 거짓말이겠어.
현관문이 열리기 전에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아주 조금 들었었다. 그런데 기율과 손을 잡고 있던 중이라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고보면, 안녕하세요, 며느리에 입후보하러 왔습니다 하는 걸로 끝나는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난 대체 누구한테 청혼을 해버린건지.
결혼이란 건 집안과 집안의 문제라던데 한 번쯤은 물어볼 걸 그랬나. 깐깐한 인상의 여자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그래서……부모님은 뭘 하시는지? 하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할까. 아버지의 전 직장이 공기업이라는 것 말고는 아는 것이 없다. 지금은 시골에서……잠깐, 농사를 하고 있는지 낚시를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부모 현황도 모르는 불효녀라고 두툼한 돈봉투를 내주면서 쫓아내면 어쩐다. 얼마나 넣어주려나……아니, 그게 아니지. 지금이라도 전화해서 물어볼까 생각하는 중에 기율이 사소한 것을 정정해주었다. 네가 한 건 무조건 무효라니까요. 프로포즈는 내가 한 거라니까.
ㅡ삑.
아. 그랬었지.
너무 웃었나봐. 입 아프다.
밍크코트 차림의 우아한 어머님은 없었다. 지민에게 물어온 것도 이름 뿐이었다. 많이 불편했어? 아니, 그냥 자꾸 웃게 돼서……나 되게 이상했지 않아? 할 말 없으면 자꾸 웃고. 괜찮아. 웃으면 좋지. 오가는 말이 적었던지라 말실수를 하진 않은 것 같은데, 긴장한 탓인지 반지를 낀 손가락이 자꾸 식었다. 지민은 대접받은 찻잔에서 내내 손을 떼지 못했다.
여기가 2층입니다.
네에.
스타킹의 얇은 섬유 너머로 차가운 바닥이 느껴졌다. 어째서인지 박물관을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을 받는다.
여기가 내가 쓰던 방, 이 옆은 동생이 쓰던 방.
어째 다 과거형이네.
지금은 안 쓰니까. 그리고,
여기는…….
기율이 잠시 한 방 앞에서 멈춰섰다.
방의 문패는 꼭 유물처럼 그 곳에 걸려있었다. 지민은 대문의 문패를 읽었을 때처럼 감흥없이 그 이름을 눈에 담았다가, 곧 그렇게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이 집의 아무도 입에 담지 않은 이름이었다. 막연히 지민은 거실에 놓여있던 몇몇 사진 속 소녀의 이름인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한껏 사랑받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진은 기율의 교복차림에서 멈춰있었다. 물음표 없이 기율을 올려다보자, 기율이 느릿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여긴 누나 방이야.
과거형이 아니었다.
지민이 아는 기율은 가진 표정이 많지 않았다. 웃거나, 웃거나, 웃지 않거나. 그 문패를 내려다보는 기율의 표정도 그것들과 크게는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지민은 잠시 그런 기율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지민이 아는 그대로의 기율이었다. 그것이 지민을 조금 안심하게 하고, 그가 끼워줬던 반지를 조금 시리게 했다.
…….
그래서 다른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지민은 신랑 자리에 입후보한 하나뿐인 후보에게 살짝 손을 뻗는다. 구두의 도움이 1cm도 없는 탓에 발끝에 조금 더 힘을 실어야 했다. 아슬아슬하게 머리 위에 손 끝이 닿았다. 같이 누워있을 때였더라면 더 손쉬웠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넣는다. 대견스러운 제자나 가여운 짐승을 쓰다듬듯이, 그리고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하듯이 조심스럽게 쓸어내린다. 얼어있던 손끝이 조금 따뜻해진다.
다른 말을 할 필요는, 조금도 없었다.
어디서 잘 거야? 오랜만에 본가에서? 다행히도, 계단을 내려오는 길은 올라가는 것보다 훨씬 쉬웠다. 별로, 집에 가야겠지. 나도 데려갈거야? 데려가지 뭐. 실없는 대화를 하고, 문패ㅡ현관 쪽의ㅡ의 주인과 작별인사를 하면서, 시간이 멈춘 듯한 그 집의 2층을 등졌다. 지민은 왠지 사랑받는 며느리가 될 것 같은 희미한 예감을 받았다.
……그러고보니 아까 그 손수건은 의외였어. 꽤 화려하던데. 아, 선물 받아서 쟁여놨던 건데 낮에 뜯어보고 놀랐지 뭐야. 누가 나한테 손수건을 선물한거지? 손수건 같은 거 안 키우는데. 음……. 배지민 씨 취향같지는 않지만, 그 옷에는 어울리는 것 같은데. 나비자수가? 좀 야하지 않아? ……그래? 나비자수가? 그럼. 나비잖아.
그러자, 다시 거짓말같은 현실이 흐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