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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의 애매한 서화

그 너머 어딘가에




 "신기했어."

 방송국을 빠져나오는데 지민이 그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막 잠에서 깬 듯한 눈을 하고 팔을 뻗어오는데, 기억하던 눈높이와는 달라서 공중에 들고 말았다. 그녀가 신고 있던 납작한 슬리퍼를 발견한 것은 그것이 바닥으로 떨어진 뒤의 일이었다. ……밤바람 아직 찬데, 맨발로 나온 거야? 뭐, 금방 집에 가겠지 싶어서. 집? 어느 집? 율이 집. 내 집? 안 돼? 여자? 아닙니다. 나도 알아. 아하. 그럼 집에 갈까요, 배지민 씨? 넵. 아 발 시리다. 맨발로 나오니까 발 시리지.

 "어떤 게?"
 "아는 사람 목소리가 라디오에서 나오는 거."

 집 대신, 지금 두 사람은 야식을 먹으러 레스토랑에 왔다. 메뉴판을 보고 있던 지민이 입을 연 참이었다.
 기율의 목소리가 주파를 탄 건 사실 처음이 아니었다. 속해있는 밴드가 공중파를 타면서 인지도가 올라간 것은 물론, 몇 번인가는 나리의 간절한 부탁으로 지금처럼 방송국에 불려온 적도 있다. 그런 것은 대개 생방송이었고 굳이 지민에게 보고한 적은 없으니 그녀가 들은 것은 처음이었는지도. 그렇게 말하다가 지민은 무언가 기억해냈는지 아니, 처음은 아닌 것 같지만 하고 말을 고쳤는데, 결국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아니고, 단순히 문명을 신기해하는 인상이었다.

 "그런가. 나리 씨가 DJ."
 "응? 아까 같이 얘기하던 그 애가 그 애야?"
 "응. 나리 씨가 그 애야."

 애라기보단 아줌마에 가깝지만. 결혼? 결혼한 줄은 몰랐는데. 결혼했지. 결혼식 때……지유 씨가 소개하기를 안녕하세요, 오늘은 축가를 부르러 온ㅡ

 "ㅡOne Married and Remainders!"

 지민이 눈을 둥그렇게 뜨며 웃었다.

 "그 밴드, 그런 이름이었어?"
 "아마? 그 때는."

 풀네임이 항상 바뀌지만, 사실 밴드로써 OMR은 지금 한창이었다. 수입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그들의 노래는 꽤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고 음반 판매량이나 공연 수익도 불황을 고려했을 때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그들은 아이돌이 아니었기에 데뷔 이후에도 시끄러운 극성팬도 안티팬도 생기지 않았다. 조금 더 사랑받고 조금 더 유명해졌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계약을 연장한다는 둥 하던 걸 보면 소속사에서도 불만이 없었던 거겠지…….
 인디밴드 시절이 짧지 않은 만큼, 밴드의 성공은 값진 성과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애……걱정하는 거 같던데. 이제 뭐하고 먹고 사나 그런 거."
 "나도 들었어."

 지민이 야밤에 그를 찾아온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사실 그런 것을 신경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기율은 조금 놀라있던 참이었다. 심지어 공중파 데뷔 때는 그럼 취미가 직업이 된 거네? 잘 됐다. 하고 넘어가지 않았었나…….

 ……랑 형이 기자회견 날짜 잡아놨다고 그러던데 벌써 이런 얘기해도 되나 모르겠네. 한참 잘 나가려던 판에 참 잘 하는 짓이에요. 연 씨는 해체하면 뭐 할 거에요? 생각 안 해봤지만, 돈 벌려면 사무실 하나 차려야지 싶네요. 사무실? 무슨 사무실? 변호사. 연수원 가면서 내가 떡볶이를 2만원어치나 쐈는데 기억이 안 난다 이건가? 아, 사시 붙었었지. 근데 연 씨가 언제 떡볶이를 쐈다고? 좋다고 해치울 땐 언제고 오리발이네? 귤 씨, 그 때 기억나죠? ……글쎄, 떡볶이는 너무 자주 먹어서. 뭐? 이럴 수가. 여러분, 저 법대나온 가수입니다. 알았으니까 닥치세요. 변호사 우 연이라……. 난 이제 뭐 해서 남편 먹여살린담. 응? 나리 씨는 여지껏 남편이 먹여 살리고 있던 거 아니야? ……뭐 임마? 나 돈 버는 여자거든?

 "난 그 때 녹음실에 같이 있었으니까."
 "어. 그렇지?"

 그래서, 귤 형은 해체하면 이제 뭐 할거에요?

 "……그렇지. 그랬겠네……."

 지민은 손톱 끝만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시선을 들었다. 기율은 지민의 안색이 평소와 조금 다른 것을 깨달았다. 잘 숨기고 있던 초조와 불안이 그녀의 올라간 입가에서부터 식당 안의 온기에 찬찬히 번져나오고 있었다. 있잖아.

 "……그런 건,
 그런 건 율이한테 직접 들을 줄 알았는데. 라디오가 아니라."

 …….

 "지민아, 나는……."
 "내가 싫어졌어?"

 ──네?
 어쨌건 남자친구의 일이다. 라디오 같은 걸 통해 들은 게 싫었을지도 모르겠다 싶어 사과하려는데, 기율이 입을 열기도 전에 지민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러고보니 일하던 중이었는지 아직껏 안경도 쓰고 있다.

 "아니요. 좋아하는데?"
 "그럼?"

 돌아온 즉답이 별로였는지, 지민은 초조한 표정이었다.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물잔을 집어들어 들이킨다. 생각보다 차가웠는지 입을 가리고 작게 진저리를 친다. 아니, 콜록거리는 걸 보니 목에 걸린 것 같다. 괜찮아? 안 괜찮아.

 "……그럼, 나 버리고 가는 건 왜 그러는 건데?"

 콜록. 콜록. 따지려고 심야택시까지 타고 왔는데 나 보자마자 율인 날 번쩍 안아주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하고……. 이게 뭐야. 내가 왜 라디오를 틀었을까? 안 틀어놨으면 좋았을텐데……. 그랬으면 지금 기분좋게 뭐 먹을지 고르고 있었을 거 아니야. 아닌가. 그랬으면 그냥 침대에 누워있었겠네, 이 시간이니까. 이거 봐. 벌써 새벽 두 신데!
 평소 표정변화가 많지 않은 여자친구가 보여주는 드문 광경을 보면서, 기율은 그녀가 화를 내고 있는 건지 겁에 질린 건지 둘 다인지를 생각했다. 하지만 왜 그녀가 지금 맨발로 기율을 찾아왔는지는 빠르게 이해가 됐다.

 "가희가 가버렸을 때는 보내고 나서야 내가 뭘 잘못한걸까 한참 생각했는데."

 분명히, 나리가 물었을 때 기율은 갖고 있던 소소한 낭만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뭐 잘못했으면, 그냥 가지 말고 나한테 말을 하라고……그러려고 했는데. ……나 아직 좋아해?"
 "좋아한다니까. 그리고 너만 괜찮으면,"
 "나만 괜찮으면, 뭐?"

 바다로 나가볼까 하는데. 세계일주라도. 과연 남다른 주 기율 씨. 왜 랑 형이 귤 형 보러 방송 나가면 말하지 말라 그러는지 알 것 같아. 헛소ㄹ……아니, 남다른 소리 할까봐 그런거지. 어떤 의미로 지유 선배보다 이상해요. 나리 씨, 그거 욕 같은데. 아. 문자가 막 오네요. 잠깐 음악 듣고……아 우리 노래 틀어도 된다구? 신난다. 뭐 틀까?

 "같이 가려고 했는데. 바다는."

 지민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데려갈거야?"
 "지난 번엔 두고 갔더니 다른 남자하고 아이스크림 먹고 있었잖아? 불안하니까, 데려가야지."

 여기서의 바다는 지난 번의 바다와는 조금 다른 바다지만.

 "같이 가 주실건가요? 배 지민 씨."
 "ㅡ기다려봐. 10초만."

 지민은 10초가 흘러가는 동안 계속 말이 없었다. 미래에 대해 상상하는 듯 했는데, 머지않아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때, 별로야?"
 "아니."

 아니라는 건 예스라는 뜻이려나 싶은데, 지민이 기율의 손을 잡아왔다. 언제 투덜거리고 있었냐는 듯이 산뜻한 표정이었는데, 닿아오는 손가락은 아직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 손이 얼마나 추위를 타는지 기율은 새삼스레 실감한다. 손 위를 감싸자, 그녀가 손이 녹는다며 웃는 대신 물었다. 내가 예전에 결혼하자 그랬던 거 기억나? 하고.

 "밴드 이름은 TMR이 되겠지만……이제 안 한댔으니까 상관없으려나?"

 



^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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