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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의 애매한 서화

지하철 2호선, 녹색의 이글루




 지민은 지하철을 좋아했지만 여름에 한정해서 그리 즐기지 못했다. 지하철이나 버스 같은 대중교통이나 은행, 동사무소 같은 기관엔 그런 규칙이라도 있는지 하나같이 북극으로 변해버리는 탓이다. 보통 이럴 때 옆에 붙어서 체온을 나눠줘야 할 절친은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바람처럼 한국을 떠났고, 한동안 장마 때문에 밖에 나가지도 못하다가 이제 겨우 해가 났을 뿐인데, 이 열차는 누가 지하철 아니랄까 뼈가 시리도록 에어컨을 틀고 있는 것이다. 아니, 요점은

 "추워."

 춥다는 거다.

 "……냉방이 좀 심하긴 하네."

 눈 앞에 서 있던 남자친구에게 불만사항을 토로하자, 미소가 돌아왔다. 사실 자리에 얌전히 앉아서는 연두색 셔츠밖에 보이지 않을만큼의 장신이지만, 지민이 턱을 들고 기율이 허리를 숙인 덕분에 눈을 마주치는 데는 무리가 없다. 왜 웃냐고 묻지 않은 것은 그 보기좋은 미소가 그의 습관적인 표정이란 것을 알고 있어서지만, 역시 어리광을 받아주려는 것 같아보인다. 지민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 마저 투덜거릴 생각이었는데, 저도 모르게 살짝 미소짓고 만다.

 "좀이 아닌걸."

 보통 이런 대화를 하는 건 지해와였다. 그럼 지해는 어리광부리지 마, 밀이! 세상은 원래 이렇게 춥고 매서운거야! 하면서 어깨나 손을 슥슥 문질러주곤 했다. 지민은 불과 두 달 전에 막 성년의 날을 보낸 참이었지만, 스무 살이라면 대한민국의 막내 어른답게 아직 이 세상에 대고 어리광을 부릴 여지는 남아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리고 나면 금방 따뜻해질거야."

 보통은 밖에 나가면 더워질거라고 하지 않나 싶지만, 지민에 한해서는 맞는 말이다.

 "봄에 눈 녹듯?"
 "봄에 눈 녹듯."
 "……뭔가 이상한 표현인데."
 "네가 먼저 썼잖아."

 기율을 따라 조용조용하게 웃다가 말고, 지민은 가방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다. 도로롱. 한창 더울 시간이라고들 하는 두 시를 조금 넘겼다. 도로롱. 몇 시야? 2시 2분. 아, 나 그 시간 좋아해. 좋아해? 2시 2분을? 2가 2개잖아. 보통 2시 22분을 더 좋아하던데, 2가 더 많잖아. ……글쎄, 적어도 20분 뒤엔 이미 도착한 뒤일걸? H역.

 "그러게, 얼마나 왔지?"

 그러고보니 어디로 가는 길인지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덜컹덜컹.
 좋아하는 지하철이 좋아하는 리듬으로 흔들리고, 한 손으로 손잡이ㅡ정확히는 손잡이들이 매달린 바ㅡ를 잡고 있던 기율도 흔들린다. 그리고 별로 좋아하지 않는 멜로디와 함께, 안내방송이 답한다. 다음 역은 시청, 시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소요산, 청량리 방면으로 가실 분들은 이번 역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주시기 바랍니다. 다음 역은…….

 "시청이네."
 "응, 시청."

 시청이나 덕수궁에 볼일이 있는지 아니면 1호선으로 갈아탈 생각인진 모르겠지만, 옆에서 한참 음악을 듣고 있던 여자가 MP3을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일어선다. 언젠가 지금이랑 비슷한 풍경을 본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금속 의자에 손짓하자, 기율이 큰 키를 구겨 자리에 앉는다. 여느 지하철 안에 나란히 앉은 커플들처럼 해볼까 하다가, 기율의 어깨는 기대기 조금 높으니까 대신 오른손을 끌어다 잡아본다. 겨우 그 뿐인데, 얼어있던 왼쪽 팔에 묘하게 온기가 어린다.

 "왜 이렇게 차가워?"

 나 아까부터 춥다고 했는데. 이번엔 제대로, 아까 버스에서 본 커플처럼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어본다. 마주보고 있지 않으니 입이 제멋대로 웃어버리지는 않는다. 기율의 목소리가 이런저런 것을 말한다. 잘 들리지 않지만, 미안해 같은 말은 아니었던 것 같다. 매서운 에어컨 바람에 얻어맞고 있던 팔과 팔이 맞닿고, 맞닿은 부분부터 체온이 퍼진다. 지하철은 북극 같고, 2호선은 연두색이고, 어쩌다보니 연두색 눈으로 지은 이글루 같은 것으로 사고가 흘러든다. ……삐지기는 커녕, 또 미소짓고 있던 것을 깨닫는다. 지민은 그 쯤에서 귀엽게 토라진 척 하는 여자친구 역할은 포기하기로 한다.

 "아, 그런데 율아."
 "응?"
 "우리 언제 또 이랬던 적 있는 거 같지 않아?"

 어디서 봄바람 냄새가 났다.


 나중에 언젠가 연두색 얼음집에 대해 이야기하자 기율은 같이 웃어주다가, 이글루는 따뜻하다던데? 그래야 사람이 살지, 하고 조심스레 물었다. 나도 알엉. 근데? 그냥. 네 손이 따뜻했더란 말은 하지 않고 그렇게 대꾸하자, 글쎄, 식용 색소같은 걸로 염색하면 되지 않을까? 하고 진지한 대답이 돌아온다. 몰라, 율이가 화학 전공이니까 율이가 알아야지. 그런 건 안 배우는데. 안 배워? 안 배워요. 에이, 그럼 뭐 배우는데? 화학과에선 화학 배우지. 재미없다 화학과. ……그럼 영문과에선 뭘 배우는데? 그야, 영문과에선 영어 배우지. ……. 뭐야, 너 방금 재미없다고 생각했지?




In Fob Chain Messenger 8.0* : Written by Appeal For Irhi
주 기율 21세, 배 지민 20세 여름. 물론 화학과나 영문과의 커리큘럼을 내가 알 리는 없지.
귤이가 연두색 셔츠를 입고 있는 건 지금 내 바탕화면과 관련있는 모종의 이유가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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