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빡, 깨어났다. 잠들었던 건 아니지만, 어딘가 다른 세계에 발이 빠졌다가 돌아온 것 같다.
도연은 눈 앞에 펼쳐진 희멀건 것이 무엇일까 잠깐 어리둥절했다.
"마실래요?"
"아니……."
지윤이 돌아온 모양이다. 게으르게 대답하며 도연은 눈을 몇 번 깜빡거려 눈가에 고여있던 물기를 없앤다. 눈 앞이 맑아지자, 한참 보고 있던 것이 침실의 천장임을 깨닫는다. 고개를 조금 기울이자 지윤이 쉽게 시야에 들어온다. 냉장고에 다녀오는 길에 먼저 입을 축였는지, 손에 들린 병은 반쯤 비어있었다. 눈을 감았다. 기척이 다가오더니 침대 끝에 체중이 실렸다. 목이 말랐는지 남은 물을 전부 비우고 나서야 지윤은 옆에 누웠다.
아직 오르락내리락 하는 가슴 위로 곧 마른 손이 올라왔다. 지윤의 손도 함께 들썩거린다. 숨을 가다듬어봤지만 잘 되지 않는다. 실컷 뒹굴고 난 뒤라 숨이 차고 졸렸다. 숨이 차니까 헐떡거린다. 평소 몸을 잘 쓰지 않다보니 이것도 운동이라고, 심장이 온 몸에 피와 산소를 돌리느라 바쁘게 박동하고 있었다. 손가락 발가락 끄트머리까지 찌릿찌릿, 땀도 흘렸고, 침대에 사지가 손가락 한 마디쯤 더 파묻힌 것 같다.
여운……이라고 말하면 어쩐지 우습지만, 솔직히는 기분 좋은 감각이 몸에 남아있다.
"기분 좀 나아졌어요?"
그러게, 기분 말이야.
오늘은 정말 기분이 별로였는데, 애석하게도 유지윤은 잘생겼다. 엄청나게 잘생긴 미남이냐면 그건 또 절대 아닌데도, 이상하게 뜯어보면 뜯어볼수록 흠잡을 구석이 없다. 무슨 얘기냐면, 또 얼굴에 홀려 한바탕 해버린 뒤란 말이었다. 여러가지 의미로 지윤에게 예의가 아니기도 하고, 섹스 후에 찾아온 기분 좋은 피로감을 부정하기도 유치해보여 도연은 고개를 끄덕인다. 끄덕임을 확인한 지윤이 팔을 완전히 감아왔다. 도연은 지윤이 안겨올 때가 조금 더 좋았으므로, 지윤의 어깨를 눌러 동그란 머리통을 제 가슴에 붙이게 했다.
"그 얘기 마저 하고 싶어요?"
"무슨 얘기?"
지윤은 도연의 심박이 조금 느려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물었다.
"작가 그만둔다는 얘기."
아.
대답을 피하려고 섹스하자고 꼬신 줄 알았는데. 실은 지윤의 그런 태도 때문에 기분이 조금 더 '별로'였던 것도 있었다. 하지만 딱히 진지하게 은퇴를 고려하는 중이라 물었던 것도 아니고, 실제로 작가를 그만두려고 해~ 같은 투로 말한 것도 아니었다. 어느 쪽도 아닐 수밖에 없는 게,
만약인데, 나 때문에 배우를 그만둬야 하면 그만둘 수 있어?
라는 화제에 대한 대화를 주고받은 뒤에
넌 내가 작품을 못하게 되면 어떨 것 같아? 나랑 계속 사귈 거야?
라고 물었던 것뿐이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클리셰한 농담, 만약에 만약을 가정한 질문이었으니까 그만두고 뭐 하려고요? 아, 저한테 시집오면 되겠네요~ 같은 한가한 소리로 화제를 돌려도 그래 녀석 넘어가주마 하고 같이 넘어졌던 것이다. 설마 하는 내내 속으로 실컷 걱정하고 있었던 건가 싶어 힘이 풀렸다.
일이야 나야, 나야 일이야 하는 질문은 클리셰하다고 생각했지만, 지윤은 내심 놀랐던 모양이다.
"듣기 싫은 거 아니었어?"
하지만 고쳐주기 귀찮으니 잠시 내버려두기로 했다.
"아뇨. 아까부터 기분 안 좋아보여서, 그럴 땐 안 좋은 생각부터 하게 되잖아요."
"그래서?"
"지금은 기분 좀 나아졌다면서요."
"어……, 그랬지."
"아직 그 얘기 하고 싶은 거면 듣고 싶네요."
"……."
딱히 고민 상담을 하려던 게 아니라 더 들려줄 말은 없다.
어떻게 할까……싶어서 턱을 조금 당기자 지윤의 어깨가 눈에 들어왔다. 지윤은 도연의 품에 바짝 기댄 채 등을 웅크리고 있다. 침대가 좁기 때문이 아니라 도연에게 가까이 붙어있기 위함이다. 그건 도연이 대본에 지문으로 써놓았기 때문이 아니다. 물론 지윤은 배우고,
온 힘을 다해 배우이고,
그만둘 수 있어? 같은 걸 물은 것만으로 겁에 질려 미간이 굳어지는, 배우지만,
이 침대 위의 유지윤은 어느 드라마의 어느 영화의 어느 배역도 아닌 그냥 유지윤이다. 어쩌면 도연만의.
"물론……그만둬도 되죠. 농담 아니고 정말로, 도연 씨가 그러고 싶으면요.
팬의 입장에선, 많이 슬프겠지만요."
문득, 이유모를 쾌감이 끼쳐 뒷목이 오싹해졌을 때, 지윤이 아주 조그맣게 말했다,
"농담이면 앞으로 그런 농담 하지 말아요."
어쩌면 지윤이 그렇게 말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도연은 대답 대신 손바닥을 펼쳐 지윤의 목덜미를 몇 번 쓰다듬었다. 땀을 흘렸던 몸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약하고 축축한 것을 만지는 기분이 들었다. 딱딱하게 튀어나온 목뼈나 귀의 모양을 더듬고, 그러다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헤집어 넣고, 멋대로 헝클어뜨렸다가 다시 빗어줬다가, 나중에는 그 몸 위에 올라탄 채 꾸욱꾸욱 힘주어 입맞추고 있었다. 이렇게 해도 깨지거나 망가지지 않는다고, 도연은 알고 있었다.